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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소외 계층' 장년층 등 "문자 어려워"
다른 동네만 대피령에 "여긴 안전" 착각도
대피하고 한참 지나서야 '늑장 문자' 오기도
26일 한 경북 영덕군 주민의 피처폰 문자메시지 목록에 산불 관련 재난문자 대신 한국전력공사의 '정전 공지' 안내 문자만이 보인다(왼쪽 사진). 다른 영덕 주민의 스마트폰에는 재난문자 여러 통이 와 있다(오른쪽 사진). 두 사람은 모두 경북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 주민으로, 25일 화마가 덮친 마을에서 함께 대피했다. 영덕=김나연 기자


"그걸(스마트폰) 써야 재난문자가 온다는데… 전 너무 어려워서 이것(피처폰)만 써요."


26일 경북 영덕 이재민대피소인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만난 차모(42)씨는 기자가 꺼낸 휴대폰과 자신의 휴대폰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차씨가 손에 든 건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 구형 휴대폰을 일컫는 '피처폰'이었다. 그의 휴대폰에 있는 산불 관련 문자는 '산불로 인한 정전'을 알리는 한국전력공사 알림뿐이었다. 그가 스마트폰 사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하자, 같은 마을 주민은 "차씨에겐 지적 장애가 있다"고 귀띔했다.

경북 북부를 휩쓴 초대형 산불로 인명과 재난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재난 문자'는 대피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는 26일과 27일, 영덕을 비롯해 안동, 청송, 영양의 대피소와 마을에서 주민 30여명을 만난 결과 "재난 문자가 대피에 도움이 됐다"고 말한 주민은 1명뿐이었다.

어렵고, 부정확하고, 늦은 재난문자



피처폰을 쓰는 일부 주민은 재난 문자를 아예 받지 못했다. 2세대(2G), 3세대(3G) 구형 휴대폰엔 당국이 재난 문자 발송에 활용하는 'CBS(Cell Broadcasting Service)'를 탑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난 문자를 받아본 적 없다"는 차씨는 이웃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산불이 나자 왜 빨리 피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을 쓰더라도 마을 주민 대다수가 '디지털 소외 계층'인 장년층이라 정보 인식이 늦었다. 이재민들 사이에선 "안전문자야 너무 많이 오니까 다 못 읽었고 '설마 우리 동네겠어' 했다"(김용철·80), "문자는 어려워서 잘 못 본다"(강월석·84) 등의 하소연이 나왔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주민 남경구씨의 휴대전화에 25일 영덕 내 다른 지역민에게 대피령을 내리는 긴급 재난 문자가 와 있다(왼쪽 사진). 이날 남씨는 '영덕읍 대피 문자'를 받지 못했지만, 이장의 대피 안내를 받고 오후 8시 30분쯤 대피했다. 대피 직후 남씨 옆집(오른쪽 사진)이 완전히 전소됐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영덕=김나연 기자


불길이 마을 가까이 왔는데 대피 지역에서 빠지는 등 재난 문자가 체계적이지 못한 점도 혼란을 키웠다. 영덕읍 매정리 주민 남경구(67)씨는 대피령이 떨어진 25일 재난 문자를 확인했지만, 휴대폰엔 영덕군 지품면과 영해면 등의 주민만 대피하라고 알릴 뿐 영덕읍은 빠져 있었다. 그는 '여기까지 불이 닿지 않겠구나' 생각했다가 오후 8시 이장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자 황급히 떠날 채비를 했다. 남씨는 "내가 피하고 10분 뒤 불길이 마을을 집어삼켰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같은 매정리 주민인 이모(89)·권모(86)씨 부부는 집에서 50m 거리에서 26일 사망한 채 발견됐다. 숨진 부부의 아들 이모(62)씨는 "재난 문자가 영덕군 지품면과 영해면 대리에만 왔길래 영덕읍에 계신 부모님은 괜찮을 거라 안심하고 (부모님을 구하는 대신) 곧장 대피소로 달려가 일을 도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뒷북 문자'도 부지기수였다. 영덕군 주민 신모(36)씨는 25일 인근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청송에서 넘어오는 불길을 목격했다. 급히 마을 면사무소에 전화해 "대피해야 한다"고 처음 알린 것도 그였다. 신씨는 "정확히 오후 5시 55분에 어르신들을 차에 모시고 달리고 있었는데, 그때 바로 뒤에 불길이 있었다. 그런데도 대피 문자는 오후 7시에 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영덕군 지품면 주민 김천자(81)씨는 불길이 인근 마을까지 도달했다는 통장의 안내 방송을 듣고 놀라서 몸을 피했다. 다급한 마음에 평소 복용하던 약도 챙기지 못하고 나왔다. 김씨의 딸 최모(60)씨는 "오후 5시에 대피했는데 재난 문자는 2시간 뒤에 왔다"며 "일찍 알려줬으면 중요한 짐이라도 챙겨 나올 여유가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왔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안동 길안면에서 대피한 정모(63)씨도 "불이 번지는 것을 보고 우리가 먼저 재난 문자 발송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지역 공동체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급박한 상황에서 '지역 공동체'에 의지하기도 했다. 대피에 성공한 주민들은 "이장·통장의 방송이나 안내 덕분에 대피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지역 공동체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장·통장이 상황을 늦게 인식하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정교한 알림과 대피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한 이유다. 고현종 노인유니온 사무처장은 "장년층 특성상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강화해 전파 체계를 확립하는 건 중요하다"면서도 "정부에서도 지역사회 지도자에게 상황을 신속히 전달하고 '진동이 울리면 위급 상황이니 주민센터에 연락하라'고 알리는 등 이해가 쉽도록 재난 공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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