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말 후쿠오카(福岡) 경매에서 아주 중요한 물건이 출품된답니다.”
2023년 11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도쿄(東京) 지사를 통해 깜짝 놀랄만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12월26일 일본 후쿠오카 유메카이(友茗會) 옥션에서 특별한 경매가 예정돼있다는 소식이었다. 경매에 앞서 인터넷상에 공개된 출품 목록에 과연 눈길을 잡아끄는 유물이 등장했다.
‘경매시작가 200만엔(한화 약 2000만원) Lot(경매 품목번호) 622번 조선 19세기 경복궁 선원전 편액’
출품 목록에는 경복궁 ‘선원전(璿源殿)’이라고 새긴 고색창연한 편액(현판)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있었다.
얼마전 구입환수한 ‘경복궁 선원전’ 현판은 2016년 일제강점기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의 철거업체 창고 천장에서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린채 발견되었다. 창고에는 조선 궁궐의 건물에 설치되었던 잡상 1점도 보관되어 있었다. |김성연 구루시마 다케히코기념관장 촬영 제공
■조선 왕실의 뿌리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왕 및 왕비의 어진(초상화)과, 선원록(왕실 족보) 등 왕실 관련 귀중 문서를 모시고, 각종 의례를 지내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보니 국왕이 옮겨간 궁궐(경복궁·창덕궁·덕수궁)마다 선원전이 설치됐다.
이중 1438년(세종 20) 건립된 경복궁 선원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랬다가 1868년(고종5) 재건됐지만 일제강점기에 헐렸다.(자세한 사연은 후술) 그런데 경매에 출품된 ‘경복궁 선원전’의 유물 설명이 기막혔다.
소장자의 주인은 김성연 관장에게 “철거업체를 운영하던 증조 할아버지가 폭풍우로 무너진 ‘조선관’(데라우치 설립) 잔해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선원전’ 현판 등을 집으로 가져왔고 지금까지 대대로 보관해왔다”고 설명했다.|김성연 관장 제공
“…초대 조선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1852~1919·재임 1910~1916)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로 돌아오면서 경복궁 궁궐 일부를 통째로 해체한 후 일본으로 옮겨와 건물을 지음…이 궁전은 1942년 8월27일 태풍으로 파괴…건물 해체작업에 나선 일꾼이 궁궐의 잔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현판과 잡상 1점을 보관…그후 100년의 보관 끝에 이번 경매에 출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선왕실의 뿌리와도 같은 선원전의 현판을, 강제병합을 진두지휘하고 무단정치로 한국인을 억누른 데라우치 총독이 반출했다니…. 그런 귀중한 문화유산이 일본 땅에서 경매 시작가 3000만원 짜리’로 등장한 것이다. 유물을 확인한 재단 측은 바삐 움직였다.
만약 정식으로 경매에 출품되면 환수될 보장이 없었다. 재단측은 협상대리인인 경매업체와 끈질긴 접촉을 벌였다. 마침내 이 선원전 현판을 경매에 내보내지 않고 사전에 구입 환수할 수 있었다.
2016년 첫 발견 후 종적을 감췄던 선원전 현판은 2023년 12월26일 일본 후쿠오카 경매에출품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도 공개되어 있는 경매회사의 인터넷 소개글에는 ‘ 2023년 12월26일 후쿠오카 경매에 ’경복궁 선원전 편액’이 시작가 200만엔(한화 약 2000만원)에 출품된다‘는 정보를 알리고 있다. 유물 설명서에는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고향에 가져온 경복궁 궁궐 건물의 일부‘라고 소개했다.
■쏙 빠진 데라우치 이름
‘경복궁 선원전 현판’의 구입환수 소식은 1년 이상 전문가 검토 등을 거친 뒤 지난 2월6일에야 발표되었다.
그러나 보도자료에 ‘데라우치가 반출해갔다…(운운)’는 내용은 쏙 빠져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데라우치의 선원전 현판 반출’ 사실을 증거할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다만 ‘경복궁 선원전 전각의 반출’ 기록은 존재했다.
즉 서울(경성)의 역사를 정리한 <경성부사>(1934)는 “(고종 때 재건된 경복궁) 선원전 건물은 1932년 신축된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물품창고)를 짓는데 사용됐다”고 설명했다.
경매소식을 입수한 국가유산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유산 재단은 정식 경매에 들어가기 전에 대리인인 경매회사와 접촉, 선원전 현판을 구입환수했다. 그러나 지난 2월3일 발표된 환수 보도자료에는 ‘데라우치의 반출’ 관련 내용은 빠져있었다. 데라우치의 선원전 현판 반출기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국가유산청·국외소재문화유산대단 제공
또 <조선과 건축>(11집 7호·1932년 7월호)에도 의미심장한 내용이 실려있다.(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특임연구원 제공) 선원전 건물을 옮겨 박문사로 지을 때 종도리(棟木)에서 발견된 상량문의 사진과 전문을 공개한 것이다.
“선원전은 경복궁 내 동북쪽에 존재한 9칸 4면 전각…이번에 박문사 고리(庫裡·물품창고)로 이축할 때 종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박문사가 어떤 사찰인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사찰이다. 그래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로 명명했다.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다. 이렇듯 <경성부사>와 <조선과 건축> 등의 문헌 자료에 ‘경복궁 선원전’ 건물을 박문사 조성에 갖다 썼다는 구절이 남아있다. ‘선원전 현판’ 관련 기록은 일절 없었고…
서울의 역사를 기록한 <경성부사>(1934)는 경복궁 선원전 건물은 1932년 신축된 박문사의 부속 건물을 짓는데 사용됐다”고 했다. <조선과 건축> 1932년 7월호는 박문사 조성을 위해 옮겨온 선원전 건물의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의 전문과 사진을 공개했다.|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특임연구원 제공
■기특한 데라우치?
그럼 ‘선원전 현판’이 왜 일본 땅에서, 그것도 소장자의 주장대로 데라우치 생가에서 현현했다는 것인가.
이 수수께끼를 풀어보지 않을 수 없다. 데라우치는 이른바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신의 군인·정치가였다. 1910년 4월 3대 한국통감이 된 데라우치는 강제병합(8월29일)을 진두지휘했고, 초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한다.
데라우치는 헌병(군인)이 경찰을 겸임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무단정치로 차단한 인물이다.
매일신보 1932년 4월25일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박문사의 상량식이 열렸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박문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한자 이름인 ‘이등박문’을 딴 절이었다.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문화유산과 관련, 데라우치를 긍정 평가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즉 일본으로 반출된 경천사 10층 석탑(1907년 반출)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1911년 반출)의 환수에 적극 개입했고, 결국 두 탑 모두 반환시킨(경천사탑 1918년·법천사탑 1912년 무렵 귀환) 이력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데라우치는 1915년 12월 개관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자신이 수집한 유물 809점을 세차례나 기증했다. 기증품 중에는 ‘청자 모란 상감 보자기 무늬 뚜껑 매병’(보물)과 겸재 정선(1676~1759))의 ‘산수화’, 단원 김홍도(1745~?)의 ‘삼선도’ 등이 있다. 1912년 총독부가 후치가미 사다스케(淵上貞助)에게 4000엔을 주고 구입한 국보(78호) 금동반가사유상도 포함되어 있다.
총독부 박물관 책임자였던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1892~1960)는 “데라우치 총독은 총독부의 기밀비까지 써서 미술품을 수집해서 막 설립한 총독부박물관(1916)에 보관했다”(1953년 한일회담 문서)고 증언했다. 후지타는 “조선의 역사상 또는 미술상 중요한 물건은 모조리 반도에 보존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한 총독”이라고 긍정 평가했다.
데라우치 재임 기간(1910~16) 중 대표적인 반출사례는 1913년 일본학자들의 연구 목적으로 도쿄대에 보낸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787책이 있다. 이 오대산사고본의 대부분이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되고, 지금까지 75책만 반환 회수되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두 얼굴의 야누스
하지만 그렇게 곱게 볼 필요가 있을까. 당시 데라우치는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총독이었다.
데라우치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영영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문화유산이 굳이 사사로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할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데라우치는 자기 관할(조선)에 있던 문화재가 내지(일본)로 허락 없이 반출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데라우치는 ‘야누스’였다. 일본을 위한, 혹은 데라우치 개인을 위한 한국 문화재의 반출은 허용 혹은 조장되었다.
규장각 ‘도서출납부’에는 규장각 소장자료가 데라우치 측에 반출되었음을 알리는 기록이 남아있다. 데라우치는 1916년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 엄청난 양의 수집자료를 가져갔다. 총 1만8000여점 중 한국관련자료는 1000여점에 달한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김선영의 논문에서
대표적인 반출 사례는 1913년 10월 일본학계의 연구 목적으로 도쿄대(東京大)에 반출된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 787책(혹은 794책)이 있다.
데라우치는 “일본 본토의 학자들의 연구에 필요하다”는 일본 학자들의 요청에 군말없이 반출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오대산 사고본의 대부분이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소실되었으니 통탄할 따름이다. 그 뿐인가.
데라우치는 조선총독 시절, 즉 1910~1916년 사이 엄청난 양의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과정에서 조선의 서예와 고적, 규장각 자료 등을 정리하는 총독부 직원을 총동원했다. 총독이라는 직위를 한껏 이용한 것이다. 그 중에는 데라우치의 사위로서 총독부 총무국장-정무총감을 지낸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중심에 있었다. 1916년 일본 총리대신으로 승진한 데라우치는 귀국길에 수집 자료들을 몽땅 일본으로 실어갔다.
데라우치 수짐품 중 1996년 경남대로 기증된 98종 135종 1축 중 <정축입학도첩>를 비롯, 조선시대 문장가 및 정치가·학자·명필·화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경남대박물관 제공
1만8000여 점에 달하는 데라우치의 장서 중 한국 관련 자료는 1000여종 1500여점에 달한다.(데라우치 귀국한 이후에 반출된 것도 있다.) 그중 유일본만 70여점에 달한다.
규장각의 ‘도서출납부’에는 규장각 소장자료가 고다마를 거쳐 데라우치 측에 반출되었음을 알리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가운데 98종 135점 1축이 1996년 경남대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기증품만 봐도 눈이 돌아갈 정도다. 효명세자(순조의 아들·1809~1830)의 입학의례를 기록한 <정축입학도첩>과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친필 글씨인 ‘완당법첩조눌인병서’를 비롯, 문장가 및 정치가·학자·명필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개별작품으로 치면 1995점에 이른다. 이 중 예서의 대가인 유한지(1760~1834)의 <유한지 예서 기원첩>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성부사>(1934)는 “야마구치현 데라우치 백작 저택의 ‘데라우치 문고(도서관)’는 경복궁 내 건물을 구입해서 이축했다”고 언급했다. 데라우치의 전기인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은 데라우치의 고향에 지은 ‘조선관’을 담은 사진을 게재했다.
■원구단 건물을 뜯어갔다?
데라우치는 고향인 야마구치현 요시키(吉敷) 미야노(宮野)에 ‘조선관’을 지어 보관했다. 경매 설명문에 등장한대로 데라우치가 조선관 건립을 위해 조선시대 궁궐 건물을 썼다는 것은 100% 분명한 사실이다. <경성부사>(1934)도 ‘데라우치’가 언급되어 있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근정전 등 몇 건물을 남기고 4000여칸을 철거해서 민간에 불하…야마구치현…데라우치 백작 저택의 ‘데라우치 문고’도 경복궁 내 건물을 구입해서 이축했다.”
즉 강제병합(1910년) 이후 본격 훼철되기 시작한 경복궁은 1915년 궁궐 내에서 열린 이른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할 전시관을 만들기 위해 다시 궁궐 건물들을 민간에 불하한다.
1900년대 이후 본격 훼철되기 시작한 경복궁은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한 전시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시 궁궐 건물을 민간에 팔아넘긴다. 이 무렵까지 공매된 경복궁 전각은 4000여칸에 달한다.|<경복궁 변천사(상)>(2007)에서
<경성부사>는 이때 데라우치가 경복궁 건물 중 한 채를 뜯어와 고향(야마구치)에 ‘조선식’ 건물을 지었다고 소개한 것이다. <경성부사>는 어떤 건물인지 특정하지 않았다.
대체 어떤 건물을 뜯어왔다는 걸까. 의미심장한 단서가 있다. 데라우치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1915년 5월26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총독과 문고-총독, 향리에 조선가옥, 전(前) 원구단 부속건물’이라는 제목의 심상치않은 기사가 실린다.(이순우 특임연구원이 신문 기사를 찾아 전해주었다.)
“데라우치 총독이…(고향에) 짓는 문고 건물의 재목은 전(前) 원구단에 세웠던 궁전의 부속건물이니 이곳에 조선호텔을 세웠으므로 (원구단 건물을) 훼철…일반에 입찰…총독이 원래 고향에 조선가옥을 짓고 그곳에 문고를 세우려는 희망…입찰자와 교섭하여 매수….”
매일신보 1915년 5월26일자. “데라우치 총독은…조선호텔 건립으로 민간에 공매된 원구단 부속 건물을 사들였고, 이것을 고향에 짓는 문고 건물 공사에 쓸 것”이라고 했다.
신문은 “건물 규모는 24~25평에 불과하지만 운반 비용까지 합하면 수천엔이 들었다”면서 “총독이 지인들에게 ‘보기는 그래도 돈이 많이 든 집’이라고 자랑하며 크게 웃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이어 “(총독은) 이 문고가 완성되면 앵포문고(櫻圃文庫·오우호분코)라고 명명하고…총독이 수집한 여러 미술품 등을 이곳에 옮겨 영구히 보존하고 조선 연구의 자료에 쓸 것을 계획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두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나는 데라우치가 이미 총독 재임 중에 고향인 야마구치에 조선식 건물을 세워 자신의 수집 유물들을 보관하려 했고, 이미 이름까지 ‘앵포(오우호)문고’라 지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데라우치가 가져간 건물은 다름아닌 조선호텔 건립(1914)을 위해 철거된(1913) 원구단의 부속건물이라는 것이다. 원(환)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단을 가리킨다. 1897년 10월12일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상징 공간이었다. 데라우치가 그런 곳에 호텔을 짓고, 그때 헐어낸 부속 건물을 뜯어갔다는 것이다.
매일신보는 “데라우치 총독은 이 문고가 완성되면 앵포문고라 하고…총독이 수집한 미술품 등을 옮겨 조선 연구의 자료에 쓸 것을 계획 중”이라고 덧붙였다.
■비현각? 계조전?
이게 또 이상하다. 데라우치 문고의 초창기 조선관 앞에서 찍은 초창기 사진(1920년 공개)을 보면 오른쪽 위쪽에 안내판이 서있다.
그런데 그 안내판에 건물와 관련된 설명문이 어렴풋 보인다. “이 건물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할 때 경복궁 일부가 철거되면서 테라우치 원수가 이를 양도받아…옮겨 세운 것으로 왕세자가 공부할 때 사용한 ‘비현각’이라는 건물로 전해진다”는 내용이다.
매일신보 1914년 10월10일자. 데라우치가 가져갔다는 건물이 조선호텔 건립 때문에 헐린 원구단의 부속건물이다. 원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천단을 가리킨다.
여기서 ‘비현각’이 갑자기 등장한다. 그런데 <경성부사>는 1910년대 공매된 궁궐 내 건물을 소개하면서 “비현각 건물은 경성부 니시오켄마치(西四軒町) 별장 남산장(南山莊)으로 바뀌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맞지 않는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또 2021년 일본 학자(와타나베 시게루·渡邊滋 야마구치 현립대 교수)의 연구는 “데라우치의 조선관은 계조전(세자의 정전) 건물일 가능성이 짙다”고 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관 평면도’와 경복궁 도면을 비교하면 비현각보다는 계조전의 치수와 맞는다는 연구결과였다. 하지만 이 또한 추정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데라우치가 세운 ‘조선관’은 원구단 부속건물인지, 비현각인지, 계조전인지 분명하지 않다.
데라치가 콕 찍어 “내가 어떤 건물을 가져왔노라”고 본인 스스로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1915년 5월26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등장하는 ‘원구단 건물’에 눈길이 간다. 총독 재임 시의 기사가 아닌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총독의 동정을 ‘가짜뉴스’로 다루지 않았을테니까….
원구단이 아니라는 자료도 있다. 데라우치 고향에 설립된 데라우치 문고(도서관)의 초창기에 ‘조선관’ 앞에 서있는 안내판에 “이 건물은 경복궁 일부가 철거되면서 테라우치 원수가 양도받아…옮겨 세운 것으로 왕세자가 공부할 때 사용한 ‘비현각’이라는 건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사진은 와타나베 시게루의 논문에서
■창고에 거꾸로 매달린 현판
그렇다면 2023년 경매에서 시쳇말로 ‘갑툭튀’한 경복궁 선원전 현판은 대체 무엇인가.
사실 경복궁 선원전 현판을 가장 먼저 찾아내고,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동분서주한 이가 있었다.
재일 한국 연구자인 김성연 구루시마 다케히코(久留島武彦) 기념관장이다. 벌써 9년 전인 2016년 2월이었다. 김관장은 연구차 야마구치 현립 도서관을 찾았다가 ’조선총독’과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등장하는 자료를 무더기로 발견한다.
비현각은 좀 이상하다. 왜냐면 “경복궁에서 철거된 비현각 건물은 경성부 내의 별장인 남산장으로 바뀌었다”는 글이 경성부사에 나와있다.
그 중 ‘데라우치 문고 조선관 앞 사진’을 보았고, 그 안내판에 등장하는 ‘경복궁 비현각’ 관련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관장은 무엇에 홀린듯 데라우치 문고가 자리잡고 있던 야마구치현 미야노를 찾아가봤다. 그러나 조선관이 서있던 자리에는 빈터만 남아있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나라가 아닌가. 만약 조선관이 무너졌다면 잔해를 처리하는 건설업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관장은 100곳이 넘는 야마구치 현 건설업체에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6월15일 야마구치를 다시 방문, 이미 60년 전에 문을 닫았다는 옛 건설업자의 집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2021년 일본 학자 와타나베는 “데라우치의 조선관은 비현각이 아니라 계조전(세자의 정전) 건물일 가능성이 짙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김관장은 주인과 일본열도를 강타했던 한국드라마 ‘겨울연가’ 이야기를 나눠 어색함을 풀면서 넌지시 ‘조선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주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김관장의 손을 이끌고 집 뒤에 있던 창고로 데려갔다.
김관장은 그 어두컴컴한 창고의 천장 밑 대들보 양쪽에 거꾸로 매달린 커다란 현판을 발견했다.
큰 글자로 새겨진 ‘선원전(璿源殿)’ 현판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주인은 창고 한쪽에 보관해놓은 상자에서 또 하나의 유물을 꺼냈다.
매국노 이완용은 데라우치 전기인 <원수 데라우치 잭작전>에서 “데라우치 백작은 단 한 순간도 조선을 잊은 적이 없다. 지병으로 요양 중이던 백작은 조선에서 일어난 폭동(3·1운동) 때문에 병이 더 깊어졌다”고 소개했다.|<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서
큼지막한 잡상 한 점이었다. 주인에게 그 내력을 들었다. 그 내용은 훗날 제출된 경매 출품 설명서와 다르지 않다.
집 주인의 증조 할아버지가 야마구치에서 건축업에 종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라우치가 조성한 조선관이 태풍으로 인한 집중호우로 무너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철거를 의뢰받은 증조 할아버지가 작업 중 선원전 현판을 발견했고, 이것을 집으로 가져와 보관했다는 것이다.
두 달 뒤인 2016년 8월 김관장이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때 막 이삿짐을 옮기던 참이었다. 그때 대들보에서 내려와 돌담에 기대어 놓은 현판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김관장이 ‘선원전’ 현판을 본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김관장은 그 사이 ‘선원전 현판’의 비밀을 파헤치는 연구를 했고, 지난해(2024년) 10월 그 결과물을 단행본(<아니다, 거기 있었다-경복궁 선원전의 명멸, 그 200일의 기록>·지식과감성)으로 펴냈다. 김관장은 지인에게서 ‘선원전 현판’이 후쿠오카 경매에 출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12월26일 경매장을 찾았다. 하지만 현판은 경매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구입 환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라우치는 백제 망명객 임성태자를 모신 백제인의 후예를 자처했다. 데라우치 전기인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은 “일본에 온 임성태자를 섬기며 절에 살던 부하의 자손이 데라우치 성을 사용했고, 이 내용은 데라우치가 생전에 조사해서 알아낸 것…”이라 했다.
■데라우치는 백제인의 후예?
데라우치는 조선을 끔찍히 여겼다는 후문이 있다.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이 데라우치와의 일화를 소개한 내용이 ‘데라우치 전기’(<원수 데라우치 백작전>·1920)에 소개되어 있다.
“데라우치 백작은 단 한 순간도 조선을 잊은 적이 없다. 병 때문에 요양 중이었던 백작은 조선에서 시끄러운 폭동(3·1운동)이 생긴 뒤에 한층 더 걱정했다. 때문에 병이 더 깊어졌다고 한다”고 썼다. 왜 그토록 조선을 잊지 못했던가. 김성연 관장은 데라우치 전기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데라우치는 한일강제병합 당일 만찬장에서 “고바야가와 다카가게,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라 읊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임성태자(성왕 혹은 위덕왕의 아들)가 야마구치에 머물며 일생을 보냈다…임성태자를 섬기며 절에 살던 부하의 자손이 데라우치(寺內) 성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내용은 데라우치가 생전에 조사해서 알아낸 것…”(<원수 데라우치 백작전>)
데라우치가 생전에 가문의 뿌리를 찾는 조사활동을 벌였고, 마침내 ‘조상=백제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데라우치가 퇴임 후 고향에 조선(대한제국)의 상징인 선원전(혹은 현판)이나 원구단 건물을 옮겨 조선관을 세운 것이다.
미천한 신분의 백제인 후예로서 조선총독을 지낸 그가 퇴임 후에도 조선의 왕으로 코스프레 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데라우치가 1919년 11월 사망한 후 아들인 히사이치(壽一)가 조선관 옆에 2층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지어 이른바 ‘데라우치 문고’를 완성했다.(1922) 그러나 종전 후 아들 히사이치가 죽은 이후 데라우치 문고는 야마구치현립대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관은 빈터만 덩그러니 남기고 사라졌다.
■조선왕 코스프레?
데라우치가 강제병합 당일 만찬에서 읊었다는 시가 귀에 몹시 거슬린다.
“(임진왜란 때 출병한)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旱川隆景)·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세상에 있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임진왜란 때 이루지 못한 조선 정벌의 꿈을 데라우치 본인이 300년만에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다.
경복궁 ‘선원전’ 현판과 데라우치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혐의점은 데라우치를 가리키고 있다.
부연 설명하자면 데라우치는 1919년 11월 병사했다. 그 아들인 히사이치(壽一·1879~1946·훗날 육군 원수)가 조선관 옆에 2층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데라우치 문고(도서관)’를 완성했다.(1922년 2월) 그러나 종전(1945) 후 히사이치가 죽은 이후 데라우치 문고는 야마구치 현립대로 이관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관은 빈터만 덩그러니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이제 정리해볼까. 데라우치가 원구단 부속건물 혹은 경복궁 전각 등을 헐어 고향에 ‘조선관’을 지었다는 기록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경복궁 ‘선원전’ 현판과 데라우치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렇지만 그 현판이 데라우치 고향의 ‘조선관’ 건물에서 나온게 사실이라면 어떨까. ‘선원전 현판 반출’의 유력한 용의자는 ‘데라우치’일 수밖에 없다.(이 기사를 위해 김성연 구루시마 다케히코 기념관장,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특임연구원, 최태선 중앙승가대 교수, 백현민 국가유산청 국외유산협력과 사무관, 강혜승 국외소재문화유산 유통조사부장·김선희 책임, 하승엽 경남대박물관 연구원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히스토리텔러[email protected]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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