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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0월 5일 개다.

오늘 아침은 신시(新詩) 이야기.

오랜만에 무성읍(無聲泣)을 외워보고 감개무량.

원주 강의는 몸이 불편해서 쉬기로 하고 5-6년 여자반에 문장독본의 2-3장을 읽어 듣겨주었다.

강아지 이름을 추추(秋秋)라고 지었다. 사원(辭源)에 찾아보니 〈사원 인용문 생략〉


오후엔 아내와 함께 기봉이 데리고 보례 서병무 씨 댁에 인사를 갔었다. 기봉이의 이웃마을 나들이는 처음이다. 이날 가을 날씨 유난히 좋아서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고 들에는 벼가 한창으로 익었고 산기슭엔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었었다.

오랜만에 역에 나가서 구휼사업을 실지로 보았다. 역시 전 직원이 나와서 분투하는 양 그 지성과 그 꾸준함에 새삼스러이 감복했다. 구휼사업도 중간에 한두 가지 잡음도 들리고 또 늘 그리 굵지도 못한 감자를 쓰는 것이 하도 초라해서 마음속으로 어떤 전환책을 생각했더니 오늘 가서 그 수많은 이재(罹災) 귀환동포의 비참한 정경과 하찮은 감자톨에도 하도 고마워하고 감동하는 것을 보고 이 사업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새삼스러이 용솟음쳤다.

염병준 군(平川茂信)이 오랜만에 병정으로부터 돌아왔다. 일본이 풍재(風災)로 큰 흉년이란 이야기. 그리고 일본사람이 매우 인정 많은 사람들이란 것을 중언부언하기에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누구나 도척(盜跖)의 류가 아닌 한,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남에게 인정을 쓰고 싶은 법이다. 그들은 조선의 모든 부를 긁어다 떵떵거리고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고 조선사람은 그와 반대로 깡그리 착취를 당하고 나니 인심이 효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10월 6일 흐리다. (토) [시월 초하루]

〈대지〉의 교정을 끝마치다.

아침엔 조선 한시(漢詩) 이야기.

오후엔 아내가 기봉이 데리고 가창골 유 씨 댁에 다녀오다. 유의순 서기 자당께서 기봉이 날 때 해산 구완해준 은의(恩義)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 집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기봉이가 오랜만에 좋은 똥을 누었다 하여 그 어머니가 하도 좋아서 똥을 먹었다. 얼굴도 찡그리지 않고 좀 짭짤하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그의 절대(絶大)한 모성애에 감격할 뿐, 신뢰감이 무럭무럭 가슴에 솟는다.



10월 7일 흐리다. (일)

로망 로랑의 〈성웅(聖雄) Gandhi〉(宮本正博 역)를 읽다.

[Mahatma Gandhi 위대한 혼]

고요하고 검은 눈,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 작달막한 사나이, 여윈 얼굴. 겉으로 불쑥 내민 큼직한 귀. 흰 두건을 쓰고, 몸에도 검소한 옷을 입고. 맨발 그대로였다. 쌀과 과일을 먹고 물만 마시고, 마룻바닥에 누워서 잠은 자듯마듯하고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한다. 몸조심 같은 건 도무지 염두에도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먼저 남의 눈에 비치는 건 그의 위대한 인내력과 가없이 넓은 사랑의 표현뿐이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적에게 대해서도 온화정중하며 청정무구한 지성(至誠)의 사람이다. 스스로 몸가짐이 겸손신중하고, 그 때문에 결단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또 그는 “내가 잘못이었다”라는 말을 조금도 꺼리는 법이 없고, 자기의 과오를 숨기려 하지 않고 또 그와 타협하려 하질 않는다. 일체의 권모술수를 쓰지 않고 변설(辯舌)의 힘을 물리친다.

아니, 그러한 것은 도무지 염두에도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행하여지는 민중의 시위운동까지를 싫어한다. 그의 동무 모-라나 쇼-캇트 아리가 그 튼튼한 몸으로써 그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았던들 그의 섬약한 몸은 어느 때고 부서져 버릴 염려가 없지 않다. 그는 그를 숭배하는 대중을 문자 그대로 우환으로 여기고 본래의 기질로서 다수의 힘을 믿지 않으며 군맹(群盲)정치와 책임감 없는 천민(賤民)을 혐오하기 때문에 소수자의 사이에서만 마음의 평정을 얻고 고독 속에 still small voice(더 작은 목소리)의 명하는 바에 귀를 기울일 때만 행복이다.

彼の人格の美しさは何人も拒むことは出来ない。彼の厳しい禮譲の前には最も過激な敵さえも襟を正さしめられるのである。ヂョゼフ・ゼドーク
그의 인격의 아름다움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그의 철저한 겸양 앞에는 가장 과격한 적까지도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제프 제도크

真理から遠かったことは如何に些細な小さいことでも彼には堪へがたいのである。C・F・アンドリュース
진리에서 멀어지는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C. F. 앤드루스

彼は輝け"るひとり、万能の創造主、Mahatmaなりつねに人々の胸に宿り
愛により、直観により、智によりて啓示さる。
かれを知りし者は不滅とならん。1922.12 タゴール
그는 빛나는 한 사람, 만능의 창조주, 마하트마로서 항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깃들어
사랑에 의해, 직관에 의해, 지혜에 의해 계시된다.
그를 아는 자는 불멸할 것이다. 1922. 12 타고르



10월 8일 흐리다.

제천 행. 차가 없어서 보행, 오정 바로 전에 도달.

미군이 들어온다고 읍내는 몹시 서성거리다.

연합회 지부에 전화 걸렸더니 불통.

저녁은 이종덕(李鐘悳) 씨 댁에서 먹고 제천조합 숙직실에서 자다.

유위한 청년으로서 한가로이 바둑을 두는 풍경. 그의 마음에 그만큼 여유 있음을 부러워해야 좋을까, 책임이 무거운 오늘날 이 땅의 인텔리로서 그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안타까워해야 좋을까.



10월 9일 개다.

새벽 자리속에서 신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얽어 보았다.

새날의 노래

1. 거치른 태평양의 파도는 자고
지축을 울려오는 세기의 고동(鼓動)
무궁화 삼천리에 먼동이 트니
여명의 종(鐘)이 운다 자유와 독립

(후렴) 삼천만 너도나도 조약돌 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터를 닦으세

2. 반만년 내려오는 줄기를 받아
역사의 아들딸인 형제자매여
눈부신 새 이상을 높이 세워서
힘차게 길러내세 우리의 조국

아침 한?구(韓?龜) 씨 댁에서 먹고 식량영단에 갔더니 이택상(李宅相) 씨만이 오두마니 앉아있는 품이 여기도 직장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많은 듯.

A.M. 열시부터 군(郡)에서 미군 장교단과 지방대표와의 회견이 있다기 참석. 사령관으로부터 의례적인 인사가 있은 후 자기네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 온 것이며 조선사람이 그동안도 잘해 나와서 감사하지만 앞으로도 역시 잘 꾸려나가면 자기네는 아무 일도 없겠다는 것이며 병정들이 풍속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혹시 잘못된 일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생각해 달라는 것이며 제천에도 조그만 비행장을 하나 만들 계획이니 원조해 달라는 것이며 제천 청주 간의 도로를 개수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훈민정음 반포 제 499주년 기념일]

끝난 후에 한필수 씨 중심으로 미군 환영연에 대한 협의가 있었는데 아무리 잔약한 민족이기로서니 한 무더기 선량(選良)들이 모여서 어떠한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서 그들의 구미를 맞춰줄까 하고 장시간 진지하게 토의하는 양이 자꾸 울고만 싶었다.

오후에 현철(鉉澈) 군이 오다.
[해설 : 이현철은 이남덕의 친정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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