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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눈을 뜹니다. 세수와 양치를 마친 뒤 가볍게 좀 걷습니다.

대부분은 휴대전화로 유튜브나 SNS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책을 읽거나 뜨개질도 합니다. 밥은 점심 저녁 두 끼만 먹습니다.

저녁 8시, 남보다 좀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눕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다 밤 10시쯤 잠에 듭니다.

소현숙(42) 씨와 박정혜(39) 씨가 설명한 단순한 일과.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공장 옥상에서 눈을 떠, 옥상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옥상에서 잠자리에 듭니다.

현숙 씨와 정혜 씨는 장기 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입니다.

지난해 1월 8일 새벽, 자신들의 일터였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의 3층짜리 공장 옥상에 올라가 텐트를 친 지 오늘(8일)로 벌써 426일째. 이제 두 사람은 '국내 최장기 고공농성 여성 노동자'로 불립니다.

사진 제공: 박정혜

■ 10년 넘게 '새빠지게' 일했는데…공장 화재와 함께 날아온 해고장

지금은 한 지붕 아래에서 언니-동생 하며 살고 있지만, 현숙 씨와 정혜 씨가 처음부터 특별한 사이였던 건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액정디스플레이(LCD) 편광필름 제조사였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일본 화학기업 '니토덴코'가 2003년 경북 구미에 세운 자회사로, 주로 LG디스플레이(구미 공장)에 납품했습니다.

최근 10년(2012~2022년)간 평균 매출이 650억 원이고 평균 영업이익은 280억 원이 넘는, 지역에서 유명한 기업이었죠.

현숙 씨는 2006년, 정혜 씨는 2011년 한국옵티칼에 입사해 쭉 검사원으로 일했습니다.

24시간을 2교대로 일하며, 완성된 편광필름에 불량이 없는지 검사하는 게 주 업무였습니다.

"액정에 불량품을 얼마나 잡아내느냐에 따라 회사가 수주받을 수 있는 물량이 달라지니까. 불량을 하나라도 놓치면 손해니까,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검사를 했어요." (소현숙 씨)

"하루 12시간이 기본 근무였어요. 힘들다는 생각 전혀 없이, 회사를 위해서 '새빠지게' 일했던 거 같아요. 특근도 정말 열심히 했고." (박정혜 씨)

성실하고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는 이들의 일상을 바꾼 건, 2022년 가을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였습니다.

2022년 10월 4일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 불이 났다. (사진 제공: 시청자)

2022년 10월 4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쯤, 한국옵티칼 공장에서 큰불이 났습니다.

14시간 동안 이어진 이 불로, 3만 7천 제곱미터가 넘는 큰 공장이 모두 불에 타버렸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설비 배선 누전을 원인으로 추정했습니다.

한국옵티칼 화재를 보도한 2022년 10월 5일 KBS 뉴스9(대구·경북) 화면

한 달 뒤, 모기업인 일본 니토그룹 최고 경영진은 자회사인 한국옵티칼을 청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공장을 복구하려면 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공장을 복구한다고 해도 회사 경영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울 거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해외 이전으로 한국 LCD 시장이 계속 축소되고 있어서, 한국옵티칼이 담당하는 LCD 후공정 산업이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는 겁니다.

이에 한국옵티칼은 전 직원 21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근속기간에 따라 기본급의 17~24개월분의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고, 전체 직원의 92%(193명)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막막한 현실, 희망퇴직을 거부한 17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현숙 씨와 정혜 씨도 있었습니다.

"10년이 넘도록 일한 직장에서 사람을 버리듯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몬 거예요. 자기네들이 이익을 좀 덜 본다 싶으면 칼같이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 인생이 엉망이 되든 말든 그냥 옮겨버리는 거예요. 저는 그 부당함에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옛날부터 이런 일이 반복됐고, 대부분 좋게 그냥 넘어가니까 당연시된 거 같아요. 그걸 바로잡고 싶었어요." (소현숙 씨)

결국 회사는 2023년 2월 2일 이들을 해고했습니다.

■ '고용승계' 요구하며 점거…새벽에 들이닥친 철거업체

현숙 씨와 정혜 씨는 동료들과 함께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하고, 공장 안에 있는 노조 사무실을 점거하며 농성을 계속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화재로 회사가 어려움에 빠진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회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해고'였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국옵티칼의 모기업 니토덴코는 구미뿐 아니라 경기 평택에도 LCD 편광필름 제조 자회사(한국니토옵티칼)를 두고 있었습니다.

공장 화재 이후, 니토덴코는 구미의 LG디스플레이 납품 물량을 평택에서 대신 납품하도록 했는데요.

해고된 노동자들은 이 평택 자회사로 자신들이 옮겨 일할 수 있도록, 고용승계를 해달라고 사측에 요구했습니다.

노조 집회에 참석한 소현숙 씨 (사진 제공: 소현숙)

노조 집회에 참석한 박정혜 씨 (사진 제공: 박정혜)

하지만 사측에선 두 회사가 별개의 법인이고, 법률상의 업무 양도양수도 없었기 때문에 고용승계 의무 역시 없다고 맞섰습니다. 대신 평택에서 노동자 20명을 신규로 채용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게, 그 평택 회사는 우리가 몰랐던 회사가 아니잖아요. 니토덴코가 소유한 회사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교류도 꾸준히 있었고, 저는 여태까지 같은 회사라고 알고 있었어요. 실제로 불이 난 뒤에 저희(구미)가 갖고 있던 물량을 니토옵티칼(평택)로 갖고 갔어요. 물량을 갖고 가 놓고서 법인이 다르니 우리를 고용 승계할 순 없다면서 신규 채용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어요." (박정혜 씨)

그렇게 노사가 해를 넘겨 대치하던 2024년 1월 8일 새벽.

평소처럼 새벽에 공장 노조 사무실로 향하던 현숙 씨는, 용달차를 타고 온 철거업체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소름이 끼쳤다. 이 새벽에 철거하러 왔다니. 지회로 달려 들어가서 철거업자들이 온 것을 알린 후 나는 급하게 짐을 꾸렸다. 무작정 출하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야만 했다. 이렇게 내몰리듯 쫓겨날 수는 없었다. 박정혜 수석 부지회장도 올라왔다. 둘이서 찬바람 부는 새벽에 벌벌 떨면서 텐트를 치고 옥상을 정리했다. 바람이 매서웠다. 고용승계 전까지는 내려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 쇠사슬도 걸었다." (소현숙 씨, 2024년 6월 26일 <한겨레> 기고 중)

이날부터 두 사람의 터전은 옥상으로 바뀌었습니다.

■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공의 시간'…그럼에도 버티는 이유는

현숙 씨와 정혜 씨처럼 고공 농성에 나섰던 여성 노동자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 씨의 모습은 아직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죠.

1931년, 회사(평원고무공장)의 임금 삭감에 항의하며 을밀대 지붕에 올랐던 여성 직공 강주룡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로 기록돼 있기도 합니다.

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KBS 자료화면)

평양 을밀대 지붕에 앉아 있는 강주룡. (사진 출처: ‘동광’ 1931년 7월호)

수영과 캠핑을 즐기고,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했던 정혜 씨. 조용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종종 뮤지컬 공연 관람과 맛집 탐방을 즐겼던 현숙 씨.

1년 2개월째 불 탄 공장 옥상을 지키고 있는 두 사람은, 이제 '국내 최장기 고공농성 여성 노동자'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고공농성 '선배'인 김진숙 씨는 두 사람에게 "고공 투쟁 중 건강을 못 챙기면, 지상에 내려갔을 때 생활하는 게 너무 힘들다"며 "건강을 잘 챙기라"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고 합니다.

박정혜 씨는 최근 짬짬이 시간을 내 김진숙 씨의 책 <소금꽃나무>를 읽고 있다. (사진 제공: 박정혜)

'옥상 투쟁' 기간 동안, 이들을 향한 사측(한국옵티칼)의 압박은 더해가고 있습니다.

회사는 정혜 씨와 현숙 씨를 포함한 해고 노동자들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했고, 검찰이 기소해 곧 형사재판이 시작됩니다.

회사는 공장 점거로 청산 절차가 늦어지면서 금전적 피해를 보고 있다며, 노조와 해고 노동자 개개인을 상대로 총 2억 원을 물어내라는 손해배상 소송도 청구했습니다. 청구 금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23년에는 회사 측 신청으로 부동산과 임차보증금에 대한 가압류가 진행된 적도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부당해고 구제 신청은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 모두에서 수용되지 않았고, 중노위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이 서울행정법원에서 3년째 진행 중이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두 사람이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뭔지 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표현을 하지 않고 알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 이렇게 해고할 거예요. 이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탄압했는지,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소현숙 씨)

"우리는 단지 회사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던 노동자였을 뿐이고, 회사도 우리를 '소중한 인적 자원'이라고 했어요. 어떻게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이렇게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너무 컸어요. 어떻게든 고용승계와 사과를 받고 싶어요. 사실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 엄청 많이 해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다 힘들어요. 나는 정말 내려가고 싶은데,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공장) 밑에서 싸워주는 조합원들, 연대해 주는 시민분들을 보면서 힘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그분들이 없었다면 솔직히 저희가 이 자리에 없었을 거 같긴 해요." (박정혜 씨)

공장 밑에서 현숙, 정혜 씨를 지원하며 농성 중인 금속노조 한국옵티칼지회 조합원 5명은 오늘 서울에서 열리는 3·8 여성의날 집회에 참석해, 두 여성 노동자의 영상 메시지를 전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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