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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 러시아, 트럼프 손잡고 외교 무대 복귀 앞둬
우크라 비무장화 요구 등 제국주의적 야욕 노골화 우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연합뉴스


(1) ‘세계 경찰’ 미국의 후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숨 가쁘게 벌어진 일련의 ‘국제질서 흔들기’의 최대 승자는 러시아라는 평가가 많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에서 ‘불량 국가’ 취급을 받았던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노골적인 ‘편들기’에 힘입어 외교 무대 복귀를 앞두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넘어 옛 소련 국가들에 대한 지역 패권을 구축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노골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손상됐고 푸틴 대통령은 서방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였다. 전쟁 초반 군비 지출과 군수품 생산에 기대온 성장은 한계에 봉착했고, 서방의 제재와 고금리 정책으로 경제는 날로 악화하고 있다.

3년을 끈 전쟁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5분의 1가량을 차지했으나, 전쟁 장기화로 동원이 힘들어지면서 북한군 파병에 기대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푸틴 대통령이 당초 “3일 안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던 전쟁이 3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체면도 구겼다. 러시아가 트럼프의 종전 압박, 특히 우크라이나의 ‘상당한 양보’를 전제로 한 평화협상을 반기는 이유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종전 해법을 두고 각종 추측이 나오고 있으나, 러시아는 이 전쟁과 관련해 비교적 일관된 요구를 내걸어 왔다.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포기할 것과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지역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 골자다. 이는 미국도 이미 러시아의 손을 들어준 내용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저지, 즉 ‘나토의 동진’을 막는 것은 러시아가 3년 전 전쟁을 시작한 핵심 명분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나토 확장을 러시아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규정해 왔으며, 이젠 더 나아가 나토군이 동유럽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일단 이 요구는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는 향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와 비무장화는 전쟁 초기 튀르키예에서 몇 주간 열렸다가 결렬된 평화협상에서도 러시아 측 핵심 요구 사항이었다. 이후에도 러시아는 전후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부터 무기를 제공받거나 군사 훈련을 받아선 안 된다고 주장해 왔으며, 최근에는 휴전 감시를 위해 평화유지군을 우크라이나에 배치한다는 유럽의 구상도 거부했다. 즉 사실상 군대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무장 해제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구상인 것이다.

3일(현지시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로젠몬탁(장미 월요일) 카니발 퍼레이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풍자하는 조형물이 전시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요구는 우크라이나에 ‘친러 정부’를 세운다는 푸틴 대통령의 오랜 야심과도 맞닿아 있다.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연구원은 “푸틴의 핵심 목표는 ‘친러시아적 우크라이나’이며, 이는 단순히 영토 분할이나 접경 안보 문제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체가 서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최근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치달은 뒤 미국이 노골적으로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거론하자 러시아가 크게 반색한 이유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2의 벨라루스’로 만들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토머스 그레이엄 미국외교협회 연구원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국내 정치를 포함해 향후 지정학적 방향까지 통제하려는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면서 “그가 그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래 비전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하다”고 짚었다. 푸틴 대통령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등 옛 소련권 국가들을 아우르는 ‘지역 패권 구축’에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점령 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간 되풀이해온 ‘나토의 확장 위협’ 주장 역시 허울 뿐인 전쟁 구실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유라시아센터의 피터 디킨슨은 “우크라이나가 자국보다 훨씬 크고 부유한 러시아를 상대로 영토적 야심을 품지 않으며, 러시아에 결코 안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그런데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무장 해제를 고집하는 것은 이 전쟁을 완수해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한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짚었다. 이어 “이는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사회가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경고”라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공개적으로 설전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안보 위협을 느낀 핀란드와 스웨덴이 오랜 세월 유지해온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했을 당시, 푸틴 대통령은 두 국가의 나토 가입이 “문제가 없다”며 우크라이나 때와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핀란드의 나토 가입으로 러시아와 나토의 국경선이 두 배 이상 길어지고 스웨덴의 합류로 발트해가 사실상 ‘나토의 바다’가 됐음에도, 러시아는 종전의 ‘보복 위협’과 달리 비교적 제한적인 대응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실제로는 가입 가능성이 희박했던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 움직임만으로도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논리적 모순’을 두고 러시아가 실제로는 나토를 자국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디킨슨은 “푸틴이 경계하는 것은 나토 그 자체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보호 아래 들어가 그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가로막을 가능성”이라며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훨씬 광범위한 ‘역사적 사명’으로 보고 있으며, 그의 목표는 유럽 지도에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지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침공을 18세기 러시아 차르 표트르 대제의 제국 확장에 빗대는 등 그의 궁극적 야망이 옛소련 붕괴를 되돌리고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데 있다는 해석이다.

러시아가 이 같은 ‘전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조성한 현 상황은 분명 활용할 만한 ‘기회’지만, 푸틴 대통령에겐 평화협상이 급하지 않으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스타노바야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군사적·정치적으로 더 취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압박을 가해 협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며 “지금 미국과 협상해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기 어려우며, 현재로선 트럼프가 러시아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만 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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