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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빨간데, 대통령이 빨갛다고 (말했다고) 해서 우리는 빨갛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오늘(4일)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이 인권위 전원위원회가 끝나고 기자들을 만나 한 말입니다. 안 위원장은 지난달 25일에 국제 인권기구에 헌법재판소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보냈는데, 이것이 탄핵 심판을 받는 윤석열 대통령 측 주장과 거의 같지 않느냐는 기자 물음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 "국민 50% 가까이 헌재 못 믿어"…"대통령 변호인 주장 펼치나"

앞서 국내 204개 인권 단체는 지난해 12·3 비상계엄 옹호 등을 이유로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간리) 승인소위원회에 한국 인권위에 대한 특별심사를 요청했습니다. 특히 지난달 10일에 의결된 이른바 '윤 방어권 보장 안건'에 관해서는 간리를 향해 우리나라의 인권위의 등급 강등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냈습니다. 이후 간리가 인권위 입장을 요구함에 따라 안 위원장은 간리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문제가 된 건 서한의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50% 가까이가 헌재를 믿지 못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헌재가 신뢰 회복과 공정성 확보가 시급함을 보여준다," "적지 않은 국민이 몇몇 재판관이 소속했던 단체와 과거 행적을 거론하며 헌법 가치와 질서를 구현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이 헌법과 법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한다는 비판이 있다."

이 서한에는 지난달 10일 인권위원 6인 찬성으로 의결된 '윤 대통령 방어권 보장' 안건의 찬성 측 의견만 포함됐고, 반대 의견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안 위원장은 회의 시작 직후 방청인으로 참석한 기자들에게, 간리에 문제를 제기한 시민단체의 주장과 반대 의견은 큰 차이가 없고 간리에서도 해당 안건의 다수 의견에 대한 답을 요구한 거였으며, 시간이 촉박해 반대 의견을 번역해 보내는 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남규선 상임위원은 "'윤 방어권 보장' 결정으로 인권위 독립성 훼손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 답변하란 거지 다수 의견만 알려달라고 한 바 없다," "위원장님은 헌재에 공정을 요구하시면서 다수 의견만 보내셨다. 그건 공정한 건가," "윤 대통령의 변호인과 다름없는 주장을 펼치는 게 인권위원장의 임무인가"라고 비판했습니다.

원민경 비상임위원 또한 해당 서한을 읽어보지 못했다며 전문을 위원들에게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고, "반대 의견도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하나하나 숙고해서 정리한 것이다. 위원장님 단독으로 빼셔선 안 된다. 반대 의견도 번역해서 보내시라"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용직 비상임위원도 소수 의견까지 보내는 게 맞다고 의견을 보태면서, 안 위원장은 결국 반대 의견과 보충 의견까지 번역해 간리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서한에는 "법원 등 국가기관의 공정성과 적법성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자살하고, 일부 시민들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법원 청사 내로 난입하여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70명이 구속되는 등 인권문제가 발생했다"는 내용도 있는데, 앞서 남규선·원민경·소라미 위원은 '윤 방어권 안건' 반대 의견에 "(법원 등의) 공정성을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국가기관의 신뢰성을 훼손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며, 의견이 다른 국민들 간의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또 다른 폭력 사태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 "관계 없는 온갖 이슈"·"시급하지 않다"…건건이 뒤로 밀리는 인권 안건

오늘 상임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은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대한민국 제20·21·22차 정부보고서 심의 관련 국가인권위원회 독립보고서(안)의 건' 1건이었습니다. 외교부가 작성한 인종차별철폐협약 이행 상황에 관한 정부보고서를 다음 달에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서 심의하는데, 이에 관해 별도로 제출할 인권위 독립보고서를 검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권위는 정부가 국제적 기준에 맞춰 국내 인권 상황 개선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해, 인권위법에 따라 국제인권조약의 이행에 관해 권고하거나 의견을 표명합니다.

하지만 안건은 의결되지 못했습니다. 보고서 안에는 우리나라 정부를 향한 '인종차별 금지 법제화 권고,' '이주아동 출생등록 법제화 권고,' '여권 압수 등 인신매매 예방 제도화 권고' 등의 내용이 담겼는데, 이에 관해 위원들이 합의하지 못해서입니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먼저 "인종차별과 아무 관계가 없는 온갖 이슈를 다 담았다"며 "보고서 내용에 관해 소관 정부 부서에서 치열하게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서 가는데, 뜻대로 안 된다고 UN을 향해 '우리 정부가 이렇게 말을 안 들었으니 이런 것들을 권고해 주세요'라고 제안하는 방식이 취할 태도가 맞느냐"고 비판했고, 이후 '원안대로 의결해야 한다,' '정부보고서보다 못한 보고서를 내선 안 된다'는 반박이 잇따랐습니다. 인권위는 모레(6일)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안건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권위의 보고서 제출 기한은 이번 달 31일입니다. 한 인권위 관계자는 시한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국내 인권 상황에 대한 감시 역할을 못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국제적 망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인권위는 지난달 27일 상임위원회에서도 3개 안건을 상정했지만 하나도 의결하지 못했습니다. 각각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위한 정책권고의 건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대한 의견표명의 건 △2025년 인권상황 실태조사 과제 채택의 건이었습니다.

당시 김용원 위원은 이 안건들에 대해 '시급하지 않다'며 '윤 방어권 보장' 안건 상정에 항의했던 내부 직원·시민단체에 대한 수사 의뢰와 자신의 지시에 불응한 직원 징계 등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즉각 관철되지 않자 "회의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며 퇴장해 회의 정족수가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을 위한 권고 안건은, 미등록 이주아동 2천여 명에 대한 법무부의 한시적 구제 대책이 이번 달에 끝나면서 법무부에서도 인권위 권고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군에서 강제 전역되고 숨진 고(故) 변희수 하사의 이름을 건 '변희수재단' 설립 또한 미뤄지고 있습니다. '변희수재단 준비위원회'는 지난해 5월 인권위에 산하 비영리법인 설립 허가 신청 서류를 제출했지만 9달 만인 지난달 20일에야 상임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됐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자료 갱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재상정됐고, 변 하사의 4주기였던 지난달 27일 상임위원회에도 상정되지 않았습니다.

모레(6일) 열리는 인권위 상임위원회에는 안건 6건이 상정될 예정입니다. 그중 5건이 과거 회의에 상정됐다가 의결되지 못한 안건으로, 그중엔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권 보장, 장애인복지법 시행규칙, 변희수재단 설립 관련 건도 포함됐습니다.

■ '정쟁 중심'에 선 인권위…안창호 위원장도 가세

지난달 '윤 방어권 보장' 안건과 '계엄 연루 장군 보석 허가 검토' 안건이 의결되면서 인권위 내부에서도 윤 대통령 탄핵 사태와 관련해 '정쟁의 중심'에 섰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간 대외적 발언을 자제하던 안창호 위원장도 오늘은 작심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간리에 보낸 서한에 담긴 주장이 윤 대통령의 주장과 똑같지 않느냐는 기자 물음엔 "사과가 빨간데, 대통령이 빨갛다고 (말했다고) 해서 우리는 빨갛다고 말하면 안 되나"라며 "난 진실을 말했고, 국민의 인권을 위해서 한 이야기"라고 반박했습니다.

다만 안 위원장은 "대통령 말이 100% 사실이라고 보나", "변호인단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나"라는 기자 물음엔 잠시 침묵하다가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요 안건이 상정되는 날이 아닌데도 인권위 회의에 매번 기자들이 몰리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 인권위 관계자는 말했습니다. 인권위의 역할은 법이나 제도가 돌보지 못하는 소외된 곳을 비추며, 국가기관보다 "반 발 앞서가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지금 인권위는 어느 방향으로 반 발 앞서가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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