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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 꿈꾸는 ‘GG세대’
신계숙 교수가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활짝 웃고 있다. 최영재 기자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죠. 인생 이모작도 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최기준(62)씨는 아침에 눈 뜨는 게 이렇게 기다려질 때가 없었다고 했다. 최근 2종 소형 면허 따기에 도전장을 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팔당 강변을 누비는 게 로망이었다는 그는 “30여 년 근무한 건설회사에서 퇴직한 뒤 무료한 삶의 연속이었는데, 가슴속 깊숙이 묻어뒀던 꿈이 되살아나면서 나도 모르게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씨의 롤모델은 ‘시니어 인플루언서’로 널리 알려진 신계숙 배화여대 교수다. 최씨는 “처음엔 ‘참 즐겁게 산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저런 열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더라”며 “안전하게 타겠다고 아내에게 서약서를 쓰고 나서야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한국 사회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운데 ‘GG세대(Grand Generation)’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GG세대는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 후에도 왕성하게 경제·사회·여가활동을 이어가는 55~74세의 시니어를 일컫는 용어로 ‘초고령화시대의 신주류’로 꼽힌다. 인구수도 1452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의 28.4%에 달하며 MZ세대보다도 200만 명가량 더 많다.

특히 이들 상당수는 평균적인 교육·생활 수준이 높고, 디지털 활용 능력이 뛰어나며, 새롭게 배우고 도전하려는 욕구 또한 크다는 점에서 이전 노인 세대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평가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학과 교수는 “GG세대는 이전 시니어들에 비해 자산 총량도 많고 신체 건강도 좋아 역사상 가장 부유한 세대로 불릴 정도”라며 “이들이 집에만 머물지 않고 친구·이웃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은 앞으로 한국 사회·경제 전반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나이 잊은 크리에이터·오토바이족 “삶의 주인공, 바로 나”
신계숙 교수가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활짝 웃고 있다. 최영재 기자
신계숙 교수는 중년 남성들의 로망이라는 할리데이비슨를 몰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 현지 주방에서 능숙하게 음식을 만들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족탕의 레시피를 배워 직접 요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신 교수의 팬이라는 주부 박진경(59)씨는 “신 교수가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에게 맛깔나는 밥상을 차려드리는 걸 보고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며 “나도 가족들에게 추억이 깃든 음식을 하나쯤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에 늦게나마 한식 조리사 자격을 취득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직접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식당에서 만난 신 교수는 “나도 나이가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지고 생활 반경도 점점 줄어드는 걸 실감했다”며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나 스스로에게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묻게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렇게 많은 분이 저의 도전을 좋아해 주실 줄은 전혀 몰랐다”며 “우리 사회의 중장년 세대도 용기를 내서 ‘내 마음의 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55~79세 경제활동, 5년 새 170만명 껑충
신 교수의 도전은 기타 레슨에서 시작됐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기타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학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신 교수는 “학원에 등록했는데 생각보다 잘 맞지 않더라. 6개월 만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며 “그런데 한번 도전해 보니 ‘새로 배우는 것도 별거 아니잖아? 그럼 오토바이도 타볼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신 교수는 이어 “내게도 90세가 넘은 은사님이자 롤모델이 계신다”며 “그 연세에도 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면 ‘나이는 결코 장벽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실감 나곤 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도전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첫발을 떼기가 힘들기 마련”이라며 “지금까지 쌓아온 삶의 경험에 또 다른 하나를 추가한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면 한결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이야말로 찬란한 나의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며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은퇴 후에도 새로운 직업과 취미에 도전장을 내밀며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GG세대는 날로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 조사 결과 직업을 갖고 있거나 여전히 구직 활동을 하는 55~79세 경제활동인구는 2019년 797만4000명에서 지난해 968만3000명으로 5년 새 170만 명(21.4%) 이상 증가했다.

한 은퇴자가 나이 드신 어르신 상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노인생활과학연구소]
수원시 영통구에 거주하는 정민숙(57)씨도 “골프장 캐디로 25년 일하다 그만둔 뒤 이젠 좀 쉬어야겠다 싶었는데 삶이 너무 외롭더라”며 “경험을 살려보자는 생각에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아이들과 노인분들에게 레슨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 앞으론 영상도 편집해 SNS에 올릴 생각”이라며 “꼭 유명해야만 인플루언서는 아니잖나. 나도 주변 사람들에겐 나름 인정받는 ‘동네 인플루언서’로 통한다”고 웃었다.

시니어 크리에이터 교육 사업을 진행하는 ‘미디어자몽’의 김건우 대표는 “최근 들어 30년 가까이 일해 온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은퇴 후에도 관련 콘텐트를 제작해 인기를 모으는 시니어들이 크게 늘고 있다”며 “특히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인생 이모작을 개척하려는 생각이 강해 젊은 층에 비해 돈을 벌려는 상업적 의도가 작고, 그러다 보니 동년배들도 큰 부담 없이 공감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시니어 인플루언서로 널리 알려진 박막례씨. [사진 유튜브 캡처]
유튜브 구독자만 115만 명에 달하는 박막례(78)씨도 대표적인 ‘시니어 크리에이터’ 중 한 명으로 세대를 넘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박씨 구독자라는 김성미(61)씨는 “한평생 일만 하고 가족만 바라보며 살면서도 소외받기 일쑤였던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을 대변한다는 느낌에 큰 위로를 받곤 한다”고 전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새롭게 노년기에 접어드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디지털 친숙도와 이해도가 높다 보니 인플루언서 활동에서도 젊은 세대 못지않은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며 “최근엔 미인대회나 모델 분야에도 적극 도전하는 등 GG세대 스스로 연령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짚었다.

패션쇼 무대에서 워킹 중인 시니어 모델들. [사진 제이엑터스]
김수애(65)씨도 지난해부터 시니어 모델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20여 년 간호사로 일하다 퇴직한 뒤 헬스를 시작했는데 몸이 조금씩 만들어지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며 “주위에서도 모델을 해보라고 권유하는데, 문득 고등학교 야유회 때 레이스를 잘라 만든 옷으로 모델 퍼포먼스를 했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살면서 내가 삶의 주인공이라고 느꼈던 순간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요즘은 무대에 서서 워킹을 연습할 때면 즐거운 마음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고 전했다.

시니어 모델 전문 업체인 ‘제이엑터스’의 정경훈 대표는 “실제 모델을 하려는 시니어 분들은 물론 자세 교정 등 건강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으려는 분들도 상당수”라며 “올곧은 자세로 워킹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도 밝고 당당해진다는 분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디지털 친숙해 경쟁력, 미인대회도 도전”
GG세대의 인생 이모작 도전이 크게 늘면서 이런 흐름에 맞게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보완·정비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잖다. 한동희 노인생활과학연구소장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연령의 벽과 편견이 높은 게 현실”이라며 “과거의 잣대로 시니어들을 대하면 최근 크게 달라진 GG세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갈등만 빚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도 “이젠 노인정이란 이름도 과감히 버리고 커뮤니티 라운지 등 젊은 세대와 시니어들이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는 ‘에이지 프렌들리’한 세대 통합적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GG세대 내에서의 양극화도 신경 써야 할 부분으로 꼽힌다. 조 교수는 “GG세대가 이전 시니어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긴 했지만 양극단의 차이는 오히려 더 커지고 있는 추세”라며 “연금 등 소외된 이들을 위한 사회적 대책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한 소장은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화사회를 겪은 일본에선 삶의 가치와 보람을 뜻하는 ‘이키가이’를 강조한다”며 “GG세대가 각자의 사정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 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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