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귀차니즘으로 본 커피의 3단계
| 정연주커피를 좋아한다. 마감을 하나 넘기면 또 새로운 마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상 속에서 커피는 보통 각성제이자 동료다. 부족한 수면에 멍해지는 뒷머리를 탕탕 두들겨 깨우듯이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을 쥐고 들이켜면 실제 신체에 찾아오는 효과와는 상관없이 출근 준비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부터 업무 시작!
실제 효과와는 상관이 없는 이유는 딱히 커피를 마신다고 잠을 설치는 체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주변 사람들이 카페인 민감성을 호소하며 열두 시가 지나면 디카페인을 찾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가는데도 커피를 마신다고 잠이 깨지는 않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셔도 수면의 질은 랜덤이다. 말하자면 커피를 마신다고 정신이 멀쩡해지지도 않고, 커피를 안 마셨다고 잘 자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일을 할 때 책상에 커피를 올려두는 것은 토템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컴퓨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성황이다. 커피님, 끝내주는 원고를 쓸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하지만 캠핑장에 도착하는 순간 커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억지로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키는 대신 자연의 소음에 ‘자연스럽게’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켜면 잠이 더 올 듯, 말 듯 멍하니 편안한 아침이 시작된다. 잠을 억지로 깨울 필요도 없고, 느릿느릿 움직여서 아침을 차리고 종일 느긋하게 늘어져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캠핑카의 문을 열고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정신없이 이 일 저 일을 쳐내던 주중의 나는 어디로 갔나 싶게 한없이 여유로워진다.
그런 캠핑장에서의 커피를 말로 표현하자면, ‘귀찮은 존재’가 된다. 도심에서는 한 블록마다 프랜차이즈 카페, 저가 커피, 개인 카페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길을 걷다가 마음만 먹으면 1분 만에 커피 한 잔을 손에 쥘 수 있다. 가끔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게에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대로변에 노출된 키오스크를 톡톡 두드리고 카드만 꽂으면 무슨 드라이브 스루를 지나가는 차가 된 것처럼 커피가 눈앞에 쑥 등장한다. 여기서 내 노력이라고는 잘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캠핑장에서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것도 눈앞에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은 예외가 있어서 마트나 카페가 가까운 캠핑장도 있지만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뭐 하나 빠뜨리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 주문하면 나오는 것이 커피인 줄 알다가 지금 내 커피는 어디 있지 멍하니 생각하다 보면 세상에 이보다 더 귀찮은 것이 없다.
1단계 : 최고로 귀찮아 믹스 커피!자매품으론 과립 분말커피도
최고로 귀찮을 때 최저점에서 타협하는 1단계 커피는 믹스 커피다.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달콤한 믹스 커피는 언제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사람이 가끔 기운을 훅 끌어올려야 할 때 아이스 바닐라 라테를 주문하는 것처럼 특식에 가깝다. 맛있고 가끔 마시면 좋아하지만 ‘커피’라고 했을 때 떠올리지는 않는 메뉴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최저한의 타협안은 과립 분말 커피다. 어릴 적에 엄마가 찬장에서 자글자글한 갈색 과립이 잔뜩 든 유리병을 꺼내 물에 타서 마시면 이게 대체 무슨 맛인가 생각했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말로 피곤하고 귀찮을 때도 커피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마시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그래서 캠핑짐 안에는 과립 블랙커피, 달콤한 믹스 커피, 찬물에도 잘 녹는 아이스 전용 믹스 커피 스틱이 모두 마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비상용 커피다.
2단계 : 움직일 순 있어 드립백!물만 끓이면 최대한의 결과물
어느 정도 움직일 생각이 들 때 꺼내는 것은 귀찮음 2단계의 커피, 드립백이다. 아주 예전에는 일본 여행을 가서 꼭 사 오곤 했는데, 어느덧 우리나라에서도 각양각색의 브랜드에서 원두와 더불어 생산하기 시작해 매우 즐거운 제품 중 하나다. 봉지를 뜯으면 한 봉에 한 컵의 커피를 내릴 수 있는 만큼의 원두커피 가루를 채운 드립백이 들어 있다. 봉지의 안내에 따라 뜯고 조립해서 머그잔 위에 잘 얹기만 하면 뜨거운 물을 부어서 드립 커피를 내릴 수 있다.
다만 시에라 컵 등 캠핑용 컵은 모양과 크기에 따라서 드립백을 안정적으로 얹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를 위해서 철사를 꼬아 만든 형태의 드립백 거치대를 인터넷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다. 이동식 커피 그라인더가 없지만 드립 커피 및 아이스 커피 등을 손쉽게 마시고 싶다면 가장 추천하는 형태다. 물만 끓이면 마실 수 있는 최대한의 아웃풋을 끌어내 주는 커피다.
3단계 : 의욕이 넘쳐나 커피 그라인더! 원두·드립퍼·필터에 긴 코 주전자까지 ‘귀찮을 수 있는’ 여유
귀찮다고 말할 수 있는 여유
가장 난도가 높은 최고로 귀찮은 커피를 마실 각오가 되었을 때, 의욕은 넘치고 커피 향은 제대로 맡고 싶을 때 꺼내는 것이 커피 그라인더다. 사실 전문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주의라 핸드드립 커피를 직접 내리는 것은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캠핑에서 커피다운 커피를 마시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내 실력에 이 정도면 적당하지 싶은 수동 그라인더를 해외 직구로 10만원 후반대에 구입했는데, 일단 다른 커피를 만들 때보다 괜히 조금 멋있는 것 같고 커피 원두를 갈 때부터 향이 좋다는 점에 우선 만족하고 있다.
이 드립 커피를 내릴 때 가장 난도가 높은 부분이 일단 커피 그라인더와 커피 원두, 드립퍼와 커피 필터를 한 가지도 빠짐없이 잘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캠핑장에 도착해서 폴딩박스를 뒤지다가 ‘아 맞다!’ 하고 외치는 것이 일인 사람에게는 이 관문이 제일 높다. 원두를 냉동실에 보관한 채로 두고 오거나 쓰고 나서 말려둔 드립퍼가 주방 카운터에 덩그러니 놓인 채로 나 왜 두고 갔냐는 듯이 귀가한 우리를 쳐다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체 왜 생각만 하면 커피가 눈앞에 딱 나타나지 않는 것이야. 주전자에 물을 꼴꼴 붓고 구이바다에 올려 끓기를 기다리며 나뭇잎 사이로 슬슬 눈을 찌르기 시작하는 햇빛을 잠깐 감상한다. 아, 찾기 귀찮은데 저번에 사서 어딘가에 잘 넣어 놓은 믹스 커피는 어디에 있지. 너무 잘 넣어 놔서 기억도 안 나네. 손에 잡히는 그라인더와 아이스박스에 잘 담아 온 엄선한 카페의 원두를 꺼내 드르륵드르륵 간다. 이미 향기로운 커피 향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냥 주전자째로 부으면 느낌이 안 살겠지. 길고 가느다란 주둥이가 특징인 손바닥만 한 핸드드립용 주전자를 찾아 주전자로 끓인 물을 붓는다. 행여나 예쁜 주둥이가 똑 부러질까 싶어서 캠핑짐 가운데에서도 다른 짐에 잘 치이지 않는 곳을 찾아 고이고이 모시고 다니는 주전자다. 상전이 따로 없네 생각하며 드립퍼에 물을 살살 부으면 막 갈아낸 원두커피가 빵처럼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며 커피가 아래로 똑똑 떨어진다.
커피 한 잔 마시기 참 어렵다, 중얼거리며 한 모금 마신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느릿하던 움직임이 더 느긋하게 퍼진다. 신기한 일이다. 주중에는 쉼 없이 달리던 나를 지치지 않게 해주는 코치 같은 동료였던 커피가 주말 캠핑장에서는 느긋한 휴식을 더 향기롭고 편안하게 해 주는 존재가 된다. 테이크아웃 텀블러 대신 귀찮다고 불평하며 귀찮게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한 모금으로 실감하고 이 순간을 만끽한다. 일단 한번 시작하면 그 귀찮은 과정까지 즐기게 되는 것이 굳이 집을 두고 나와서 자는 캠핑의 매력과 꼭 닮았다고 하겠다.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