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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3년, 우크라 접경 마을 르포]
빠르게 돌아가는 미·러 종전 협상시계
'보통 사람들 목소리' 직접 들어보니...
종전 논의 형식·내용에 '엇갈린 의견들'
지난 21일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 루블린주 헤움의 기차역에 정차돼 있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행 기차 앞에 우크라이나인 폴리나가 서 있다. 폴리나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아들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난민으로 살다가 지난해 다시 키이우로 돌아가 지낸다고 했다. 헤움(폴란드)=신은별 특파원


"음... 조금 혼란스러워요."

지난 21일(현지시간) 폴란드 루블린주(州) 헤움 기차역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 폴리나의 말이다. 헤움은 전쟁 탓에 항공편이 끊긴 우크라이나를 바깥과 이어주는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 마을이다. 러시아의 공격에서 살아남고자 고국을 떠난 이들, 난민으로서 타국살이를 끝내고 귀향하는 이들이 지나는 곳이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의 '복잡한 심경'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장소 중 하나다. 잠시 머뭇거리던 폴리나가 입을 뗐다. "기본적으로는 찬성합니다. '기분 좋은 찬성'은 물론 아니지만요."

기자가 건넨 질문은 이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결단'하에 급물살을 탄 미러 주도의 종전 협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성한다는 건 '뜻밖의 대답'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리의 등 뒤에서 이뤄진 합의, 우크라이나 참여 없이 타결된 평화 협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미러 양자 대화에 '결사반대'하고 있어서다.

도널드 트럼프(왼쪽부터)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 연합뉴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쟁이 끝나야 한다는 겁니다. 전쟁을 끝내겠다는 미러 정상의 대화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을까요. 지금 대화 속도로 보면 '금방 끝날 것 같다'는 기대마저 듭니다. 물론 트럼프의 그간 행동과 발언을 보면 우크라이나에 불리한 방향으로 협상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슬프고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딱 3년.
'우크라이나 보통 사람들' 목소리는 주로 젤렌스키를 통해 국경 너머로 전달되는 '공식 입장'과는 같지 않았다.
'승리해야 한다'거나 '굴욕 외교를 할 수 없다'는 간절함 내지 자존심이 '제발 전쟁을 끝내자'는 절박함을 덮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우방이었던 미국의 '변심' 탓에 반강제적으로 종전 협상을 접하게 된 우크라이나 사람들 심경을 온·오프라인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트럼프에 분노... 종전 협상엔 '엇갈린 반응'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 루블린주 헤움의 기차역 플랫폼 전경(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행 열차 외관, 열차 내 객실 및 복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우크라이나행 열차가 이곳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태우고 내린다. 헤움은 항공편이 끊긴 우크라이나를 바깥과 잇는 주요한 통로 중 하나다. 헤움(폴란드)=신은별 특파원


푸틴을 향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노는 트럼프로 번져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불가' '우크라이나 영토의 완전 탈환 불가' 등을 못 박은 채 푸틴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모두 푸틴이 종전 조건으로 요구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거주하는 언어학자 라리사(50)는 한국일보와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말했다. "푸틴은 침략자입니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고 있어요. 그런 자와 '대화'라니요. '양보'라니요. 그건 더 많은 전쟁과 살상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지는 겁니다."

법치 및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해 온
미국의 타락을 개탄
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러시아가 2014년 합병한 크림반도에서 탈출해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정착한 에르네스트 술래이마노는 "세계 질서 수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미국이 이제 대놓고 약자의 것을 빼앗고 약자를 궁지로 몰아넣는 데 앞장서다니 믿을 수 없다"며 "미러 간 종전 협상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페이지가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현재 바르샤바 내 러시아대사관 맞은편에서 크림반도를 뜻하는 '크림(KRYM)'이라는 상호의 음식점을 운영 중이다.

폴란드 루블린주 헤움 기차역에서 21일 만난 우크라이나인 타냐(43)가 번역기를 활용해 미국·러시아 주도의 종전 협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헤움(폴란드)=신은별 특파원


그러나
폴리나처럼 미러 협상을 긍정하는 목소리
도 결코 적지 않다. 과정에 문제가 있더라도 '종전' 결실을 맺는다면 지지할 수 있다는 취지다. 헤움에서 만난 타냐(43)가 열심히 번역기를 돌려 써 내려간 문장은 이랬다. "종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대화에 찬성합니다."

트럼프 요구·젤렌스키 정당성… 의견 '확' 갈려



종전 조건 등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 생각도 크게 엇갈렸다.
'종전 후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 대가로 우크라이나 내 희토류·광물의 상당한 지분을 달라'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평가
가 특히 그랬다. 군 복무 중이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A씨는 미국 요구를
"식민지화(
化)"
라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에 일방적으로 '퍼 주기'만 했다는 게 미국 입장인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무기를 소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전쟁 중 미국이 우방국에 무기를 팔아 챙긴 돈은 얼마고요. 이런 점은 고려하지 않은 채 엄청난 자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건 무기만 안 들었을 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하는 행동(침략·점령)과 똑같은 겁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종전 특사 키스 켈로그가 20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젤렌스키 집무실에서 만나고 있다. 키이우=AFP 연합뉴스


하지만
미국 요구가 일견 합당하다는 반응
도 있었다. 키이우에 사는 카타리나는 "지난 3년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투입했던 자원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도 대가를 받아야겠다고 나선 미 정부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구가 과할 경우엔 조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도 부연했다.

'젤렌스키가 국가 정상으로서 정당성을 갖고 있느냐'
에 대한 판단도 저마다 달랐다. 지난해 5월로 공식 임기가 종료된 젤렌스키는 전쟁에 따른 계엄령 탓에 대선을 연기했고, 대통령직을 계속 맡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군인 예브헤니(25)는 "젤렌스키는 '불법'으로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법에 근거해' 역할을 수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국민들이 전장에 있고 (난민으로) 해외를 떠도는데 선거를 어떻게 치르나"라고 반문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여론조사기관 '키이우국제사회연구소(KIIS)'가 4~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젤렌스키의 신뢰도는 57%로 여전히 높았다(불신 37%).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면 임기가 종료된 상태"라는 합법성 부족 지적은 물론, "지도자가 바뀌어야 전쟁이라는 현상이 변경될 공간도 생기는 것 아니겠나"라는 정치적 사퇴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상당했다.

20일 폴란드 바르샤바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 다니엘(18·오른쪽)이 자신의 누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후 우크라이나를 떠나 폴란드에 정착한 그는 "종전 협상 등 뉴스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바르샤바=신은별 특파원


'항전 의지' 여전해도... 무관심 증가



기나긴 전쟁에 지쳤지만
항전 의지
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브헤니는 "2014년 돈바스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의 소극적 대응과 타협이 결국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을 불러왔다고 믿는다"며 "끊임없이 침략과 점령을 반복해 온 러시아와 얼렁뚱땅 화해하면 전쟁은 머지않아 또 일어날 것이고 우크라이나는 언젠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실시된 KIIS 여론조사에서도 '필요한 만큼 전쟁을 견딜 수 있다', 즉 섣불리 물러나지 않겠다고 답한 이는 57%나 됐다.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어도 여전히 절반 이상이다.

그러나 오랜 싸움에 따른 피로감은 국가적 위기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
로도 이어졌다. 전쟁 직후 폴란드에 정착한 다니엘(18)은 '미러 간 종전 협상' '트럼프의 희토류 요구' 등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모두 다 관심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심정은 이랬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되든 중요하지 않아요.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새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해요.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각국의 지원' 같은 뉴스가 우리에겐 더 중요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3년. 그래픽=송정근 기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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