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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니언] ‘연예인 공인론’이라는 허상
배우 김새론씨 관련 기사 헤드라인. 민주언론시민연합 제공


“도덕적·윤리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연예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이 실정법을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법 위반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내밀한 사적 생활을 무분별하게 공개하는 것은 언론이 범하는 또 다른 위법행위라 할 것이다.”

엊그제 쓰인 것 같은 이 문구는 2004년 ‘한국방송학보’에 실린 논문 ‘연예인의 인격권 침해 유형과 언론 소송에 있어서 공적 지위의 특성에 관한 연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승선 목원대 교수(현 충남대 교수)는 이 논문에서 법원 판례에 비춰볼 때 연예인의 내밀한 사적 행위는 공익성의 대상이 아니고 공인 취급을 받더라도 정치인과 같은 부류로 다뤄지고 있지 않다며 “단순히 일반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준의 연예인 관련 보도는 공공성을 인정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연예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인격권을 훼손하는 보도 행태는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등과 결합하여 악화하는 양상이다. 지난 2023년 12월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으로 무분별한 언론 보도에 대해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일었으나 약 14개월 만에 배우 김새론씨가 다시 세상을 등지면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17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배우 김새론씨의 빈소. 사진공동취재단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이 지난 21일 공개한 김새론씨 보도 관련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김씨의 음주운전 사실이 알려진 2022년 5월18일부터 사망 이후인 지난 19일까지 약 1000일간 5082건의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네이버뉴스 ‘언론사 편집판’ 구독자 200만 이상 언론사, ‘뉴스스탠드 스포츠·연예’ 카테고리 기준) 연예전문매체를 중심으로 김씨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추적·비난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내용을 엮어 제목 장사로 조회수를 유도하는 황색 언론의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났다고 민언련은 설명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김씨 관련 유튜버 이진호씨의 폭로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가 256건이다. 이진호씨는 김씨의 소셜미디어 사진이나 일상 소식을 전하며 ‘자숙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 ‘보여주기 행태다’ 등 비난을 이어왔다. 민언련은 “사이버불링을 비판해야 할 언론이 되레 이진호씨 발언을 따옴표로 보도하며 클릭 장사에 나서 논란을 부풀렸다”고 짚었다. 다수 언론은 김씨가 아르바이트 중이라는 카페까지 찾아가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관종’, ‘에스엔에스(SNS)병’, ‘어그로’ 같은 표현으로 ‘자숙하는 태도’를 지적하며 비난 여론을 부추겼다.

‘김새론도 다녀간 홀덤펍…일부에선 불법도박 행위 1004명 검거, 46억 몰수’(매일경제, 2024년 1월7일)처럼 김씨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건 기사에 이름을 넣거나, ‘“대운에 흉살…2025년 특히 조심”…고 김새론, 3년 전 사주풀이 소름’(뉴스1, 2월17일)처럼 김씨의 과거 사주 풀이 내용을 사후에 보도하는 사례도 있었다. 민언련은 “유튜버의 추측성 발언을 받아쓰며 논란을 증폭하고, 자극적이며 과장된 제목으로 클릭 수를 노렸던 언론이야말로 김씨 사망에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가해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2023년 12월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배우 이선균씨의 발인식이 열려 운구차가 병원을 나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email protected]

불과 1년여 전인 지난해 1월에는 경찰 마약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이선균씨를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경찰 수사와 함께 언론 보도의 ‘망신 주기’ 양태를 비판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당시 유현재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에 “‘사이버 레커’ 유튜버만 욕할 것이 아니라 언론도 똑같은 것 아니냐는 대중의 배신감이 있다. 사법적인 판단 전에 이미 언론이 이씨를 죽인 것”이라고 짚었다.

반복되는 연예인들의 죽음도, 언론 보도의 폐해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간 전문가들은 연예인에게 공인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이에 편승해 내밀한 사생활 폭로 보도를 국민의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온 언론의 관행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신순철 한동대 언론정보문화학부 교수는 ‘언론의 무분별한 속보성 경쟁과 연예인의 인격권’(언론중재 2006년 봄호)이라는 글에서 “언론은 취재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유명인(celebrity)과 공인(public figure)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도록 해 자신들의 취재에 용이하게 이용한다”며 “연예인 보도는 시민에게도 마치 연예인을 공인처럼 예의주시해야 할 것 같은 강박증을 갖게 한다”라고 설명했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역시 ‘알 권리로 포장된 관음증과 정보권력 부추기기’(신문과방송 2011년 6월호)에서 “언론은 ‘알 권리’를 구실로 대중의 쾌락욕와 권력욕을 부추기고 또 현실화한다”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가 아니라 대중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뉴스의 가치가 결정된다면 옐로저널리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적 관음증과 정보 권력의 욕구를 ‘알 권리’로 포장하도록 부추긴 주체는 결국 언론인 셈”이라고 썼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지난해 1월12일 열린 ‘고 이선균 배우의 죽음을 마주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요구 성명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이 생각에 잠겨있다. 김혜윤 기자 [email protected]

공인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표준국어대사전)이다. 연예 산업의 생리상 연예인의 사생활이 일부 공적 성격을 가지며, 다수 한국인이 연예인을 공인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5월 한국리서치 조사를 보면 응답자 71%가 ‘연예인은 공인’이라고 답했다. 다만 연예인의 사생활에 가까운 정보들을 알 권리로 인식하는 비율은 부동산 거래 14%, 연애 11%, 전화·카톡 내용 3%, 일상적 만남 4% 등으로 낮았다. 전문가들 역시 언론이 연예인에게 공직자 수준의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거나 프라이버시·인격권 침해를 알 권리로 합리화하는 일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하는 선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의 책임을 강조하며 신순철 교수는 앞서 인용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분명히 짚어야 할 사항은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지만, 언론사는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점이다. 연예인들에게 공인다운 도덕심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지만, 언론사에 ‘공기’다운 도덕심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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