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상사 앞에서 지난해 10월11일 열린 제540회 금요행동에서 참가자가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일본기업은 배상을’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이 가해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추심금을 청구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대법원이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놓은 지 7년이 지나도록 기업이 책임을 회피하고, 정부가 ‘제3자 변제안’을 마련하자 이를 거부한 뒤 제기한 소송이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피해자 측이 직접 제기한 소송을 통해 강제동원 가해 기업이 배상금을 지급하는 첫 사례가 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51단독 이문세 판사는 고 정창희씨 유족이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손자기업인 ‘엠에이치파워시스템즈코리아(엠에이치파워)’의 자산을 추심하게 해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18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 오모씨(정씨 배우자)에게 1930여만원을, 나머지 원고들(정씨 자녀들)에게 각각 128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가집행할 수 있다”고 했다. 가집행이 선고되면 추후 피고 측이 항소 등 불복 절차를 밟아 판결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배상금을 임시로 강제집행할 수 있다.
정씨는 1944년 21세에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조선소로 끌려가 강제로 노역에 동원됐다. 한국에 돌아온 정씨는 2000년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에선 패소했으나 2012년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며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고 돌려보냈고, 소송은 파기환송심을 거쳐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로 마무리됐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 기업 대신 국내 재단이 조성한 기부금으로 배상금을 전달하는 ‘제3자 변제안’을 내놓았다.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의 직접 사과가 담긴 배상금을 받겠다”며 반대하다가 배상이 계속 지연되자 점차 제3자 변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번 소송 원고로 함께 참여했던 양금덕씨는 지난해 10월 변제안을 수용해 소송을 취하했다. 2018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승소한 피해자 15명 중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하고 있는 피해자는 정씨와 고 박해옥씨의 유족 뿐이다.
정씨의 유족은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을 배상금 성격으로 받고자 이번 소송을 제기했다. 미쓰비시중공업 몫의 엠에이치파워 채권을 유족 측에 전달해 강제동원에 따른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10차례 변론이 열리는 동안 유족 측은 두 회사 간 채권액을 특정하고 그 실체를 증명하는 데 주력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미쓰비시중공업이 받을 돈을 유족 측이 대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근시간 안에 직접 수령할 수 있고, 금전 채권이기 때문에 별도 경매 절차 없이 바로 지급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추심 소송을 통해 배상금을 받는 첫 사례가 된다. 앞서 지난해 2월 하타치조선의 공탁금 6000만원이 피해자들에게 전달된 적은 있다. 공탁금은 기업이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담보 성격으로 낸 것이다. 임 변호사는 “마지막까지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한 피해자들이 여러 법률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일본 기업으로부터 얼마의 배상금이라도 받아낼 것인지에 대한 갈림길에서 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으로부터 배상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