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부터 도날드 트럼프까지, 역대 대통령의 취임식 성경 구절
지도자가 선택한 성경말씀, 그 이유와 의미
지도자가 선택한 성경말씀, 그 이유와 의미
2021년 워싱턴D.C. 美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취임선서하는 바이든 대통령(왼쪽 사진)과 2013년 부통령 취임선서 당시 등장한 성경. AP, EPA연합뉴스
미국 대통령 취임식 장면에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성경이다. 국민 앞에 통치 신념과 지켜갈 가치를 선언하는 새 대통령이 성경을 펼쳐 들거나 성경에 손을 얹는다. 나아가 취임 선서를 하는 대통령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도 늘 관심 대상이다. 한국에서도 성경을 읽은 대통령들이 있다. 현실 정치 권력을 잡은 대통령은 어떤 이유로, 어떤 성경 말씀을 읽고 전했을까.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왜 성경을 펼칠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한 전통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1789년 취임하면서 창세기 49장 22~25절을 인용해 신앙을 강조하며 선서한 것이 시작이다. 그는 선서 말미에 “하나님 도와주소서(So Help me GOD)”라는 기도를 덧붙였다. 김영한 기독교학술원 원장은 “미국 대통령들이 취임식에서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은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 기념우표. 위키피디아
이후 대통령들은 각자의 신앙적 배경을 반영한 성경을 선택해 취임식 전통을 이어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할머니가 물려준 성경을 사용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어머니가 선물한 성경 위에 손을 얹었다. 지미 카터와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성경을 펼쳐놓고 선서를 하며 미국 건국의 정신을 기렸다.
성경 선서가 헌법상 필수 사항이 아님에도 이어진 것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자에게 성경이 길잡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예제 폐지를 이끈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첫 취임식에선 성경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취임식 때 마태복음 7장 1절과 18장 7절을 통해 국민 통합과 정의를 강조했다. 최연소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야고보서 1장 22~25절을 낭독하며 지도자의 역할을 다짐했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로 이사야 2장 4절을, 대법원장 출신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지혜를 구하는 열왕기상 3장 9~11절을 선택했다.
대통령이 선택한 성경 구절, ‘리더십 코드’가 되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 위치한 러시모어 국립 기념공원의 일부인 미국 대통령 얼굴 바위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어둠의 시대를 맡았던 대통령들은 성경에서 희망과 회복의 메시지를 찾았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네 번의 취임식에서 사랑과 희망을 담은 고린도전서 13장을 사용했다. 닉슨 사임 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제럴드 포드는 잠언 3장 5~6절을 인용해 국민에게 신뢰와 회복을 호소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갈라디아서 6장 8절과 이사야 58장 12절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도덕적 책임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두 번째 취임식에서 이사야 40장 31절을 낭독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인내를 강조했다.
가장 자주 인용된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겸손한 태도를 강조한 역대하 7장 14절(“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며…”)이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로널드 레이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이 이 말씀을 선택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로 신앙을 정치 철학의 중심에 뒀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겸손과 정의, 자비의 가치를 전하는 미가서 6장 8절을 인용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성경 대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통해 연합을 강조했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취임식에서 시편 133편 1절을 인용했지만, 지난 20일에 있었던 두 번째 취임식에서는 성경을 언급하지 않았다.
취임식마다 등장한 성경 구절, 그 의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달 20일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 중앙홀에서 성경책 두 권을 든 부인 멜라니아 여사, 장녀 이방카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AP뉴시스
조평세 1776연구소 대표는 “성경번역본의 다양성과 의역의 가능성을 이유로 미국 대통령 취임사에서 성경 구절이 인용된 횟수를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역대 대통령 대다수가 성경을 알고 있었으며, 그 메시지를 취임사에 반영하고 의식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미국의 45명의 대통령 중 단 두 명(존 퀸시 애덤스, 프랭클린 피어스)만이 성경이 아닌 법전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며 “대통령이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지도자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지만, 미국의 정치 체제는 ‘하나님 아래(under God)’에 있다는 사실을 구현한 체제”라고 덧붙였다. 현재 미국에서 과반의 국민이 여전히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규정하는 만큼, 정치인들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대중 영합적인 요소도 있다. 그러나 조 대표는 “그보다 본질적으로 미국의 지도자들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대통령들도 성경을 인용했다
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했던 서울 중구 중앙청 건물의 모습. 국가기록원
한국에서도 공식적으로 성경을 언급한 대통령들이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은 헌법 위에 성경을 올려놓고 선서하며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선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아모스 5장 24절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태복음 25장 40절을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소개했다.
김철영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상임대표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기독교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하며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적 전통의 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헌장 제7조에는 ‘대한민국은 신의 주권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명시돼 있다”며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인 공화, 평등, 자유는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승만 박사, 도산 안창호 선생, 김규식 선생, 백범 김구 선생 등 주요 건국 지도자들도 기독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김 대표는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세워진 나라지만, 대한민국은 다원주의 사회, 다종교 국가로 특정 종교가 국가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없다”며 “따라서 미국처럼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거나 공식적으로 기도하는 전통을 이어가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많은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언급하는 것은 한국교회를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기독교 정신이 인류 공동체의 공동선을 지탱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