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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급식’ 인원 급감… “단속 두려워”
급습 소문에 두문불출… “귀향 유인책”
실적 다그치는 트럼프… ‘난민’도 배격
8일 중남미 라틴계 불법 체류자가 많이 모여 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 거리 급식 현장에서 한국계 자원봉사자가 빈민들에게 식료품이 포함된 구호품 꾸러미를 나눠 주고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8일 오전 9시쯤(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북부 컬모어. 일용직 인력 시장이 서는 세븐일레븐 편의점 옆 공터에 수십 명이 모였다. “펜스 건너편에 중남미 라틴계 이주민이 많이 살아요.” 한국계 김재억 선교사는 매주 토요일 아침 이곳에 ‘푸드 뱅크(거리 급식소)’를 차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식료품과 옷가지 등을 나눠 준다.

미국에 개신교 선교단체 ‘굿스푼’을 세우고 빈민 구호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21년째다. 처음에는 인근인 수도 워싱턴의 흑인 노숙인을 도왔지만 이내 라틴계 극빈층의 신산한 삶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남미에서 10년간 활동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음식이 떨어져서”



미국 내 라틴계 빈민 대다수는 허락이나 권리 없이 사는 처지다. 사상 최대 규모 불법 체류자 추방을 공약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이들에겐 재앙이었다. 지난달 20일 취임 후 3주간 변화는 상전벽해다. “2001년 9·11 테러 뒤 이민자들에게 가혹해진 미국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정권 4년은 태평성대였다”고 김 선교사는 말했다.

8일 생필품을 받으러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 거리 급식소를 찾은 중남미 라틴계 빈민들이 김재억 굿스푼 대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겨울은 이들에게 모진 시기다. 일자리가 드물어지는 탓이다. 사람들이 좀체 집을 짓지도, 잔디를 깎지도 않는다. 음식을 살 돈이 없다. 자원봉사자들로 꾸려진 김 선교사팀은 구호품 비닐봉지에 쌀, 빵, 라면, 과자, 양파·양상추, 감자, 토마토, 캔커피 등 식료품을 주로 넣었다. 아이·어른 옷과 장난감, 꽃도 나눠 줬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전에는 평균 180명이 모였다고 한다. 반면에 이날 생필품 꾸러미를 받아 간 이는 80명 안팎이었다. 그래도 평소의 3분의 1에 그쳤던 지난주보다는 약간이나마 늘었다.

“숙녀 먼저!” 김 선교사는 여성을 앞줄에 세웠다. 많을 땐 3분의 2가 아이를 업거나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젊은 중남미 출신 여성이었다고 한다. 대개 20대 초반만 돼도 아이가 둘이나 셋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빠가 없기 일쑤다. 임신·수유 기간 떠나 버리는 남자가 수두룩해서다.

애 키우는 젊은 이주민 여성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청소다. 5시간 일하면 80달러(약 11만6,000원) 정도를 번다. 20~30달러는 아이를 봐준 다른 여성 몫이다. 불법 체류자 단속 강화는 가뜩이나 벌이가 빠듯한 이들의 발을 묶었다. 토요일마다 받아 오는 식료품이 더 절실해졌다.

8일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 거리 급식 현장에서 엘살바도르 출신 78세 여성 돌로레스 로메로가 라면을 먹고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하지만 푸드 뱅크라고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들이닥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유모차를 끌고 왔을 경우 아무래도 재빨리 도망치기 어렵다. 최근 인원 급감에는 이런 이유가 컸으리라는 게 김 선교사 추측이다. 이날 그의 설교는 간단했다. 때가 때인 만큼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지켜야 할 ‘10계명’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 △공공 장소에서 음주하지 말라 △마약을 멀리하라 △자진 납세하라 등만 강조했다.

선물은 복음과 함께 제공된다. 평상시에는 당연한 룰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모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국 생활 7년째인 과테말라 출신 알립 포예스(38·여)는 “(단속) 소문이 무성해 가급적 바깥에 나오지 않지만 음식이 떨어져 하릴없이 나왔다”고 했다. 온두라스에서 온 오르티스 세이다(39·여)는 “붙잡혀 내쫓길 것을 밤낮 염려해야 하는 현실이 두렵고 슬프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볼리비아를 떠난 마리아 갈라타스(50·여)는 아직 불법 체류 신분이 아니다. 그러나 반년 뒤 비자가 만료되면 자신과 남편, 아들도 이웃과 같은 신세가 된다. “남편도 나도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세 식구가 방에 갇혀 걱정만 한다”고 그는 털어놨다. 통상 2시간쯤 걸리는 선교와 급식은 이날 약 40분 만에 정리됐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일주일 치 양식을 챙긴 유모차 부대는 황망히 자리를 떴다. 김 선교사는 “불안해하는 게 보여 빨리 끝냈다”고 말했다.

배회하는 요원 유령

8일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에서 김재억(오른쪽 세 번째) 굿스푼 대표 선교사가 거리 급식소를 찾은 중남미 라틴계 이주민들과 대화하고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라틴계 이주민 커뮤니티를 지배하는 정서는 공포다. 불법 체류는 형사상 범죄가 아니다. 불법 입국도 경범죄일 뿐이다. 체포나 추방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문제의 발단은 범죄자가 아니어도 체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트럼프 백악관’의 위협이었다. 반(反)이민 공세는 예리해졌다. ICE에 체포 할당량이 하달됐고, 헌법상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동 부여되는 출생 시민권도 위태로워졌다.

성역(聖域) 해체도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트럼프 행정부는 ICE 요원의 학교·병원·교회 진입을 허용했다. 연방정부의 불법 이민자 단속에 협조하지 않는 ‘피난처(sanctuary)’ 지방자치단체도 제소했다.

이런 때 들리는 ICE 출동 소식은 체류 자격 없는 이주민들을 위축시키기 십상이다. 북버지니아 일원에서도 지난달 26일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이달 5일엔 1만 명 넘는 라틴계 불법 체류자가 거주하는 애넌데일 한 아파트 단지에서 ICE 급습 현장이 목격됐다. 불안은 헛소문을 낳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입소문에 올라탄 ICE 요원의 유령은 이제 곳곳을 배회한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한 목사는 지난달 30일 뉴욕타임스에 “사람들은 ICE를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여긴다”고 말했다.

8일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 거리 급식 현장에 유모차가 놓여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노림수라는 게 전문가 분석이다. 불법 이민자에게 무료 법률 지원을 제공하는 아미카이민자권리센터의 마이크 루켄스는 지난달 29일 BBC방송에 “백악관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스스로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절망에 빠진 이도 적지 않다. 애넌데일 여동생 집에 세 들어 사는 에디 로페스(62)는 볼리비아에서 하루 10달러(약 1만4,000원)씩 벌며 30여 년간 트럭을 운전해 모은 2만8,000달러(약 4,000만 원)를 이민 브로커에게 주고 작년 9월 멕시코에서 미국 텍사스주 남부 국경을 넘었다가 세관국경보호국(CBP) 경비대에 붙잡혔다. 미국에 정착한 누이의 보증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현재 전자발찌를 차고 이민 법원의 추방 재판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바이든 행정부였다면 몇 년 걸리는 재판 때까지 정주 기회를 만들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는 10일 “추방 두려움에 질식할 듯한 삶을 연장하고 있다”고 본보에 하소연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실적을 다그치고 있다고 미국 NBC방송이 8일 전했다. 톰 호먼 백악관 ‘국경 차르(총책임자)’가 ICE와 매일 전화 회의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 불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에 따르면 ICE는 당초 하루 추방 목표를 1,200~1,400명으로 설정했으나 하루 1,100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다.

8일 중남미 라틴계 불법 이주민들이 대거 모여 사는 미국 버지니아주 컬모어 주택가. 철제 울타리에 ‘어슬렁대지 말 것’이라고 쓰인 팻말이 붙어 있다. 컬모어=권경성 특파원


여론은 트럼프 대통령 편이다. 9일 공개된 미국 CBS뉴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59%가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지지했다.

추방 대상은 불법 체류자에 그치지 않는다. 이달 초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에 머무는 약 35만 명의 베네수엘라 국적자들에 대한 임시보호지위(TPS) 부여를 철회했다. 대부분 고국 박해를 피해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난민들이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 미주 담당 연구원 타일러 마티아스는 본보에 “망명 접근 차단은 이주 시도를 줄이는 대신 불필요한 위험 노출을 늘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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