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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도둑맞은 선거, 늪에 빠진 그들
"트럼프가 구원해줄 것이란 환상 커…사실과 달라"
진보 겨냥 '친북' → '친중' 공격 전환
애니 챈 후원 받아 KCPAC 지지한 美 극우 인사
국내 언론 인용 통해 확대 재생산

편집자주

부정선거 음모론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수많은 검찰 수사와 대법원 판결로 이미 검증이 끝났는데도 극우 진영은 각종 의혹을 신봉하며 시민사회와 정치권을 파고 들었다. 한국일보는 한미 양국에서 영향력을 키우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이들의 행태와 그 배후로 지목된 백만장자 재미동포 애니 챈의 행적을 추적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일대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지지자들이 손팻말,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최측근인 (맷) 슐랩 미국보수주의연합(ACU) 공동의장과 만났다."

지난달 10일 국내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내용이다. 기사가 나가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석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 윤 대통령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썩였다.
이들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와 서울서부지법, 헌법재판소 앞에서 'STOP THE STEAL'(부정선거를 멈춰라)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2021년 트럼프 대통령 지지세력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외친 구호다.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하는 전광훈 목사도 마찬가지다. 그가 거리 연설을 할 때마다 옆에는 '영어 통역사'가 있다. 국내 보수 지지층을 상대로 주장을 늘어놓는데 왜 굳이 통역이 필요할까. 미국을 향해서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 속에는 '미국에 호소하면 부정선거와
윤 대통령 탄핵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
이 담겨 있는 것이다.

'종전선언 반대' → '부정선거 반대'

윤석열 대통령의 일반접견이 허용된 지난달 31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한 대통령 지지자가 STOP THE STEAL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최주연 기자


한국보수주의연합(KCPAC)과 미국보수주의연합(ACU)의 접점은
'부정선거'
다. 광장에 선 시민들이 'STOP THE STEAL'이 새겨진 손팻말을 드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부정선거론자들의 관심을 끌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그 중심에 선 재미동포 애니 챈은 당초
부정선거보다는 문재인 정부의 '종전선언'을 저지하는
데 공
을 들였다. 한 외교 당국자는 "KCPAC은 2021년 뉴욕 타임스퀘어에 '종전선언 반대 광고'를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총회 방문 계기에 띄우며 정치 공세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국회 가결 이후 CPAC-KCPAC 담론 형성 구조. 그래픽=이지원 기자


반면 부정선거는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전부터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선거 조작을 할 수 있다며 패배시 불복 의사를 비쳐왔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엔 '부정선거 조사기구'까지 만들었다. 때문에 한국이 제시한
'중국에 의한 선거공작'이라는 프레임
은 미국 극우 보수집단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마침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에서 운영 중인 공자학원을 헤집으며 중국의 영향력 확대 공작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트럼프의 대선 패배 이후엔 미국에서도 부정선거론이 더욱 크게 확산했다.

국내 보수 집단이 진보 집단을 비난할 때 사용하던
'친북·종북' 프레임이 '친중·종중' 프레임으로 변질된 것도 같은 맥락
으로 볼 수 있다. KCPAC 대표를 맡고 있는 박주현 변호사는 2020년 KCPAC-CPAC(보수정치행동회의) 한국 선거 관련 세미나에서
"중국이 위조여권 1만8,000여 개를 동원해 개표에 관여한 정황이 있다"
는 취지로 중국 배후설을 주장했다. 한미 양국에서 퍼진 부정선거론은 '1·6 미 의회 폭동'과 '1·19 서부지법 폭동'라는 초유의 사태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윤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KCPAC은 반중 프레임을 내걸고 대미외교 작업에 나섰다. 맷 슐랩 ACU 공동의장은 아르헨티나와 일본 등 CPAC 자매단체를 독려하기 위한 해외순방에서 한국을 함께 찾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탄핵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된 윤 대통령과 만났다. KCPAC 임원들은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과 무도회에 참석해 트럼프 지지집단을 향해 윤 대통령 탄핵이 부당하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본보는 슐랩 의장의 메일 계정을 확보해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했으나,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국정원장 만나 부정선거 브리핑했다"

애니 챈 한국보수주의연합(KCPAC) 회장이 2022년 1월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신년 하례회에 참석해 윤석열 당시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KCPAC 홈페이지 캡처


KCPAC 인사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인과 국가기관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국가정보원장을 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의 부정선거 의혹들을 직접 브리핑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박 변호사는 최근 본보와의 통화에서 "
(2023년 10월 국정원, 선관위 보안점검 직후 김규현
전 원장을 만나) 부정선거 의혹과 관련해 브리핑을 했었다"며 "김 전 원장도 (2020년 총선이)
부정선거인지 안다"
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QR코드 전산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의 얼개에 관해 설명했느냐'는 질문에도 "네"라고 답했다. 국내 부정선거 주장 확산을 주도하는 단체인 KCPAC 대표가 국정원장과 접촉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어디에서 △정확하게 무슨 내용을 브리핑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답을 피했다.
박 변호사는 대법원에 선거무효소송을 수십 건 제기하는 등
부정선거 의혹에 불을 지펴온 대표적인 인물
이다.

박 변호사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 수장이 부정선거 의혹을 신뢰했을 가능성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국정원은 2023년 선관위 보안 점검
당시 북한의 사이버 공격 시도와 관련한 보안점검이라고 밝혔지만 이를
빌미로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증거를 포착·수집하려고 한 것 아니냐
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해 본보는 수차례 김 전 원장에게 박 변호사와의 접촉 여부를 질의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국정원은 "입장을 낼 사안이 아닌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애니 챈, CPAC 가장 큰 외국기관 후원자"

한국 보수주의연합(KCPAC)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회장·공동의장 및 간부 명단. KCPAC 홈페이지 캡처


애니 챈은 비상계엄과 탄핵안 가결 이후 윤 대통령 지지세력이 결집하는 과정에도 큰 역할을 했다.
KCPAC의 미국 사무소인 KCPAC USA의 대표 그랜트 뉴스햄과 이 단체 임원이자 미국
정치 평론가인 고든 창은 적극적으로 윤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고 국내 부정선거 의혹을 지지하는
목소리
를 내며 힘을 실었다.
일부 국내 언론은 이를 '미국 전문가'의 의견으로 포장해 보도
했다. 이런 확대 재생산 구조는 국내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윤석열 정부를 지지한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대북 강경 성향의
프레드 플라이츠 미국 우선정책연구소(AFPI)
부소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KCPAC이 출간한 책의 서문을 썼다. 플라이츠 부소장은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부정선거 주장 이유를 묻자 "
KCPAC 인사들이 한국에서 중국에 의한 부정선거가
발생하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
이라고 말했다. 본보의 추가 인터뷰 문의에는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고 답변을 피했다.

KCPAC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미국 CPAC 외국 협력기관 중에서는 챈 회장이 가장 많은 후원을 하고 있다"며 "CPAC에서 챈 회장의 지위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댄 슈나이더 등 CPAC 출신 인사들이 한국 부정선거론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다만 KCPAC이 ACU나 CPAC 관련 재단을 공식 후원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 미국 내 교육 또는 계몽 목적의 재단은 기부내역을 대외적으로 공개할 의무가 없다. 하지만 KCPAC이 한국 부정선거론자들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고, 국내 특정 정파의 인사들이 미국 내 연결고리를 형성하도록 지원해준 만큼 미 외국대리인등록(FARA)법을 위반했을 소지가 있다. 실제 챈은 미 수사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유혜영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FARA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KCPAC의 활동 내용 가운데 한국 정부나 한국의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를 위한 정치 활동이 얼마나 되는지 엄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기류는 아니
라는
입장이다. 미 워싱턴 소재 한 로비업체 인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진짜 핵심 측근은 이미 백악관과 정부 부처에 대거 중용돼 현직에 있다"며 "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정치에 관심이 없다"
고 말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 공화당 보수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CPAC은 보수주의 이익 집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으로 탄핵안이 가결돼 직무가 정지된 이후 이와 관련한
발언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로버트 피터스 연구위원과 허드슨 연구소의 패트릭 크로닌 아시아태평양 석좌는 최근 본보와 화상인터뷰에서
"한국에 (윤석열 정부가 아닌)
다른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트럼프 정부는 협력할 것"
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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