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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투쟁’ 고 정순규씨 아들 정석채씨 인터뷰
경동건설 산재사고 사망자 고 정순규씨의 아들 석채씨가 지난 6월 25일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주간경향]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불과 먼지’라는 단편소설을 썼던 이창동 영화감독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 소설을 썼을 때는 뭔가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흔적이 없다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거든. 사람의 죽음에는 남이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죽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 5·18의 죽음이 그렇죠. 하지만 어떤 죽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놀랍지 않아요? 나는 놀라웠어요. 인간의 삶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2007년 3월, 씨네21 ‘끈질긴 이야기꾼의 도돌이표, 영화감독 이창동’)

우리는 어떤 죽음은 오래도록 얘기하지만 어떤 죽음엔 침묵한다. 2019년 10월 건설현장 산재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정석채씨(39)는 이런 차별에 몸서리치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 1년여간은 그 누구도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의 아버지 고 정순규씨는 부산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 임시가설물(비계)에서 추락사했다. 사망에 이른 사실관계에 대해 사측인 경동건설과 하청업체는 고인 책임을 주장했는데 초동조사에 이 입장이 일부 반영됐다. 이어진 재판에서 사측은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유죄 판단(업무상과실치사죄·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을 받았지만, 형량은 집행유예와 벌금형으로 가벼웠다.

아들 석채씨는 아버지 시신의 상태로 미루어볼 때 사측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재조사를 위해 처절하게 싸웠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적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측 관계자는 고인 장례식장에서 폭행·감금·협박 피해를 입었다며 유족을 고소한 뒤 “사건을 종결하면 고소를 취하해주겠다는 압박까지 했다”고 한다.

“사회적 관심 받지 못했던 처절한 싸움··· 청년 노동자였다면 분위기 달랐을 것. 중년 노동자의 죽음도 똑같이 억울하다는 것 말하고 싶어. 다큐 영화로라도 이 억울함 끝내 알릴 것.”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국가(OECD) 최상위권인 ‘산재국가 한국’.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산재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특히 석채씨처럼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한 유족들의 싸움은 더욱 처절하다. 지난 6월 25일 경향신문사에서 석채씨를 만나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 지난 5년에 관해 들었다.

-아버지인 고 정순규씨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보나.

“사측은 사고 직후부터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재해자 과실로 인한 사망으로 몰아갔다. 아버지가 임시가설물(비계)에 부착된 사다리를 위험하게 이용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주장이었다. 첫 단추인 노동청의 재해조사에 사측 주장이 그대로 반영됐고, 노동청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재해조사대로 기소했다. 당시 경찰 판단은 달랐다. 경찰은 아버지가 비계 위에서 작업하던 중에 옹벽과 비계 틈 사이로 여러 차례 튕기면서 추락했을 것으로 봤다. 시신에 수많은 골절이 있었고, 작업복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경찰 추정이 맞았다고 본다.”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 선고는 뒤집히지 않았다.

“사고현장이 사라진 상태에서 노동청 재해조사 결과를 뒤집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저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셨던 아버지 동료가 계셨는데 정작 수사기관에선 말씀을 바꾸셨다.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 벌금 2000만원에 끝나버렸다. 설사 실수가 있었더라도 죽지는 않게 안전조치를 해놓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최근 하청업체 소장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했고, 소장에게는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피해자 과실로 몰아가는 사측 행태를 어떻게든 밝혀내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재판기록에서 아버지가 당시 현장의 안전관리 담당자였다는 사측 제출 서류를 봤다. 아버지가 안전관리자였기 때문에 안전조치 미비에 대해 아버지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제가 아는 아버지 필체가 아니었다. 필적 감정을 의뢰해 위조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하청업체만 약식기소했는데, 원청인 경동건설의 개입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건설현장 산재사망에서 사측이 ‘피해자 과실’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 2019년 4월 경기도 수원의 한 건설현장 엘리베이터에서 추락사한 청년노동자 고 김태규씨의 사건에서도 사측은 고인이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만 김씨의 사건에선 재판부가 사측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전수칙 위반 등을 엄중하게 따져, 사측 관계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고 정순규씨의 사건 항소심을 담당했던 이주희 변호사는 “건설현장의 산재는 녹화 영상도 없고, 그 순간을 정확히 목격한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는 특성이 있다”면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을 따르는 형사법정에선 사고경위 부정확성이 사측의 책임을 덜어주는 결과로 종종 이어져 답답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산재사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고 정순규님의 사건은 사회적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 초기 공론화가 이뤄져 사망 원인만 바로잡았어도 사측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년이 흘러 2020년 가을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다뤄주면서 ‘중대재해 없는 세상만들기 부산 운동본부’와 천주교의 도움을 받게 됐다. 솔직히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분위기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중년 건설노동자의 산재사망도 똑같이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 같은 유가족의 얘기도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

-사측이 유족을 되레 고소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틀 뒤 빈소에 하청업체 관계자 두 사람만 찾아왔다. 유족과 친지, 지인들이 ‘왜 경동건설은 오지 않고 너희만 오느냐’며 화를 냈다. 누군가는 그들 멱살을 잡기도 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청업체가 유족을 감금·폭행·협박으로 고소했다. 그러고는 ‘고소 취하해줄 테니 여기서 끝내자’라고 제안하더라. 나중에 수사기관이 ‘혐의없음’으로 종결하자, 항고해 제 친구 두 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아버지 사망 직후엔 ‘술 먹고 일하다 그렇게 됐다’는 등의 명예훼손성 댓글이 붙었고(구급대가 혈중알코올농도를 측정했지만,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도 관련 기사에 저를 조롱하는 댓글들이 붙는다. ‘정석채 XX, 네가 돈이 끝까지 필요 없는지 두고 보자’ 하는 식이다.”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선 형사 처벌이 완료됐다. 그럼에도 산재 관련 집회 등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제발 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저희같이 관심 못 받는 산재 유족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올해 1월 서울 마포구의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70세의 고 문유식님이다. 안전수칙을 어긴, 매우 위험한 비계였는데 저희 때와 마찬가지로 사측이 고인 과실을 주장하며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역시 다들 별 관심이 없다. 저라도 돕고 싶어서 얼마 전 기자회견 자리를 만들었다.”

-유명 연예인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다 생업을 접고 싸워왔다. 앞으로 계획은.

“계속 말하고 쓰지 않으면 잊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 다큐영화를 준비 중이다. 최근 한 단편영화제에 시나리오를 출품했다가 기획상도 받은 만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에겐 저만의 투쟁이 아직 남아 있다. 영화 <다음 소희>, <한공주>를 보고 같이 분노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난 것처럼, 언젠가 제 영화도 산재 피해자들에게 그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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