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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 출간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좋은 권력이란 뭔가’를 놓고 시작되었다. 노무현 정부(2003~2008)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에 이어 정책기획위원장을 2년6개월가량 지낸 그는 최근 한겨레 연재물(‘이정우의 참여정부 천일야화’)에 150쪽 분량을 새로 보태 책 ‘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한겨레출판)을 펴냈다.

“연재 막바지에 브라이언 클라스 영국 런던대 교수의 ‘교육방송’ 강의를 듣고 무릎을 쳤어요. 동서고금의 권력자를 깊이 파고든 권력 연구의 권위자인 그가 내린 결론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좋은 권력자라는 것입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최악의 권력이고요.”

그는 클라스의 견해에 기대어 “노무현은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노무현의 가장 큰 장점은 솔직함과 무욕입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 그만두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대통령할 자격이 있느냐’는 노 대통령의 말을 여러 번 들었어요. 제가 후임 정책실장(박봉흠)에게 인수인계하면서 딱 하나 부탁했어요. 대통령이 언제 춘추관을 찾아 돌발 사표를 던질지 모르니, 주의해달라는 거였죠.”

전날 대구에서 열린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는 그는 역대 대통령 중 최악은 이승만과 박정희라고 했다. “클라스 교수에 의하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나르시시즘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즘 그리고 사이코패스 성향이 나쁜 권력의 특징인데요. 둘은 다 갖췄죠.”

‘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 표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소득분배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청와대 재직 기간 참여정부의 경제 사회 정책 토대를 쌓는 데 주력했다. 성장과 동시에 분배 개선도 꾀하는 정책 마련에 힘썼고 중장기 국가 청사진을 그릴 대통령 직속 국정과제위원회도 총괄했다. 부동산 투기 억제책인 종합부동산세(종부세) 도입도 그가 주도했다. 정책실장을 내놓고 민간인 신분인 정책기획위원장이 된 뒤에도 정책특보 자격으로 수석회의 등 청와대 대부분 회의에 참석했다.

책에는 노무현 고위 정책 참모로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이 담겼다. 인수위 시절부터 쓴 대학노트 10권 분량 일기가 바탕이다. 하나의 정책이 나오기까지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각 부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내신 중시 대입 개혁안’이 좌초되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 한 예이다. 2004년 10월25일 총리(이해찬) 공관에서 2008년도 수능 9등급 중 1등급 폭을 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수능 성적 우수자를 최대한 많이 뽑으려는 세칭 명문대는 1등급 폭 최소화를 원했고 입시에서 내신 비중을 확대하려는 청와대는 폭을 넓히려 했다. 회의에서 교육부 쪽 참석자는 모두 4%를 주장했고 총리도 동조했다. 반면 청와대 참석자 중 문재인 시민사회수석은 7%를, 필자는 참석자 중 유일하게 11%를 주장했다. 그는 이 회의 직후 안병영 교육부 장관이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하면서 결과적으로 1등급 폭은 교육부가 원하는 4%로 갔다고 회고했다.

그는 “교육 개혁의 좌초”를 청와대 시절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꼽았다. “노 대통령도 제 생각과 비슷했어요. 9등급이면 9분의 1씩 잘라 1등급을 정하면 될 일이지 왜 4%, 7%로 복잡하게 하느냐면서 이는 일류대에 봉사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죠. 제가 좀 더 노력해 대통령을 설득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에는 ‘인간 노무현’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도 풍부하다. 노 대통령이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장 보고에 “(성 위원장이) 일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칭찬한 것을 두고 “(내가) 배석한 무수히 많은 보고 중 정말 보기 드문 칭찬이었다”고 평한 대목이 그렇다. 참여정부 2년 기념 오찬에서 노 대통령이 “김우식 비서실장을 발탁한 이유는 열심히 메모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메모를 하면 품위는 없으나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는 전언은 ‘기록을 중시하는 노무현’의 한 단면이다.

이 교수에게 먼저 왜 노무현 대통령이 훌륭한지 그 근거를 알려달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장기 과제인 국가 어젠다를 제시하고 해법을 찾으려고 했어요. 최초의 ‘장기주의 대통령’이죠. 대통령 직속으로 국정과제위원회 12개를 만들어 정책 64개를 만들었어요. 저소득 노동자가 일을 많이 할수록 정부가 더 지원하는 근로장려세제(EITC)가 그중 하나죠. 관료한테 맡기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정책입니다.”

그는 윤석열과 노무현 청와대를 견주면서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개혁 청사진 부재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학자들과 토론도 자주 하면서 수십 개의 장기 과제를 제시했어요. 반면 윤 대통령은 학자들도 안 보고 정책도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접근해요. 은행 금리를 낮추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의대 정원을 토론도 없이 2천명 늘린 게 대표적이죠. 의대 증원은 방향은 옳지만 2천명이나 늘린 것은 누가 봐도 과도해요.”

그는 노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 뭐냐는 질문에는 종부세 도입(2005년 1월)이라고 답했다. “노 대통령은 종부세를 도입해 부동산 투기를 막을 기초를 마련했어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온갖 부동산 부양 정책을 남발했음에도 부동산 시장이 10년간 안정세를 유지한 데는 종부세 도입과 같은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덕이 큽니다.”

종부세는 최근 고민정 등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폐지론’을 펼치면서 논란 중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먼저 종부세 폐지 운운해 억장이 무너집니다. 22대 국회가 초장부터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사실 문재인 대선 캠프 때도 종부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민심 이반이나 조세 저항을 걱정하면서요. 제가 당시 문 캠프 인사에게 항의했더니 ‘사고만 안 나면 된다’는 식이더군요. 이 기조가 집권 이후 계속되었어요. 저는 문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는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일을 겪고도 민주당은 아직 교훈을 얻지 못했어요. 이대로라면 민주당은 집권하기도 어렵고 집권해도 무용한 정부가 될 겁니다.”

그는 부동산 문제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면서 “보유세 강화, 양도세 개편, 토지공개념 선언, 공직자들에 대한 부동산 백지신탁제도의 도입”이라고 밝혔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30일 오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그는 책에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일한 나는 행운아”라고 썼다. 노 대통령에게 실망한 적은 없느냐고 하자 “삼성을 봐주려는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24조 개정안이 국무회의에 올라왔을 때(2005년 7월5일)”라는 답이 돌아왔다. “제가 국무회의 직전 노 대통령을 만나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하자 ‘지금 와서 왜 그러느냐. 통과 안 되면 난리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노 대통령은 삼성 문제만 나오면 위축되었어요. 삼성이 잘못되면 국민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고 걱정했죠. 그럴 때면 저는 재벌이 무너진다고 국민경제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답했죠.”

‘금산법 파동’ 직후 이 교수는 청와대를 떠날 결심을 굳히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단다. 그의 부친은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 영남대 교수 시절 경북 노동위 공익위원을 지내면서 노동자 편을 들어 삼성 주력사 제일모직에 불리한 결정을 자주 내렸다고 한다. “60년대 삼성이 영남대를 지배할 때 이병철 삼성 회장이 차남을 영남대로 보내면서 아버지를 자르라고 지시했다고 해요. 그런데 뜻밖에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져 삼성이 영남대에서 손을 떼면서 해임을 면하셨죠.”

그는 청와대 시절 보람 있었던 일로 종부세 도입과 근로장려세제 도입, 적극적 고용개선 정책 셋을 든 뒤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대통령과 끊임없이 역사 대화를 한 게 정책보다 더 중요했어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노 대통령 화제는 늘 역사였어요. 동서양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하거나 질문하는 일이 많았죠.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려고 노력한 점에서 당 태종과 비슷했죠.”

경제학자인 그의 서가에는 역사 책이 6천 권 이상 꽂혀있단다. “장서 1만 권 중 3분의 1이 경제, 3분의 2가 역사 책입니다. 20대 후반에 미국 학자 존 메릴이 쓴 ‘제주도의 반란’이라는 논문을 보면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때 제주4·3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었거든요.”

이번 책에는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꼭지가 있다. 한겨레 연재에는 없던 글이다. 그의 조부와 부친에 대한 흥미로운 회고가 실렸다.

‘해방 후 경북대에서 가르친 할아버지(이정규 교수) 집에 가면 신문지에 구멍이 뻥뻥 나 있었다. 이승만을 미워해 신문에 난 이승만 사진을 가위로 오려 냈다. 그 뒤 박정희 시대에는 박정희 사진을 오려 냈다. 아버지(이종하 교수)는 1960년 교원노조 운동이 활발할 때 고문 자격으로 강연, 글쓰기를 많이 했다. 내가 초등 5학년 때 담임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반드시 교원노조에 가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정우 군의 부친이 어제 강연에서 교원노조 미가입 교사에게는 내 자식 교육을 맡길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대구가 고향이고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에 아이비리그 박사인 그의 이력은 한국 보수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는 집안에서 정치 문제로 갈등을 겪은 일이 없다고 했다. “제가 5남매 중 막내인데요. 가족 모두 진보적인 시각을 가졌어요. 어머님도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노무현 지지자였어요. 집안에서는 화목했는데 동창 모임이나 사회에서 (정치 문제로) 갈등을 겪었죠.”

그는 청와대 시절에도 매년 책 100권을 읽었단다. 어떻게 가능했느냐고 묻자 그는 “30대에 속독학원을 서너달 다닌 덕분”이라고 답했다. “남들보다 두세배는 빨리 책을 읽습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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