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게티이미지뱅크


흔히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1993년 유엔이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지정하고, 2004년 제정된 건강가정기본법에서 매년 5월을 가정의 달로 하기로 규정한 데서 유래하는 것 같다. 그 이름에 걸맞게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가정의 날, 부부의 날에 성년의 날까지 가족 관계에 관한 기념일이 총집결해 있다. 이렇게 5월을 가정의 달로 기리는 것은 가정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란 점과 함께 역설적으로 가족 사이의 사랑이 쉽지만은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가정은 무조건적인 사랑이 베풀어지는 곳임과 동시에 가장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신약성경에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가족 관계의 어려움을 말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말과 관련해 소설가 최인호의 유고집 '눈물'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안 보면 그만인 적, 나쁜 사람이 아니라 가족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물론 원수가 이 의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구절이 원수의 의미에 대해 주는 통찰이 있다.

보통 원수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말한다. 나에게 해를 끼침, 즉 '가해'가 원수가 되는 결정적 요소처럼 보이지만 위 구절은 원수가 가해 못지않게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다. 나에게 엄청난 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안 보면 그만일 사이라면 그는 가해자일지언정 원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원수는 나에게 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와의 관계나 관계의 영향력을 피할 수 없어 지속적 관계 속에서 피해와 고통을 증폭시키거나 상기시키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원수는 이웃 바깥과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중첩돼 이웃 가운데 있을 가능성이 크고 그 가운데 그 밀도가 가장 높은 것이 집안 식구일 것이다. 이같이 가족처럼 가해보다 관계의 의미가 더 부각되는 원수를 '웬수'라고 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중에 이러한 원수와 웬수의 차이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말이 있다. '원수는 안 만나야 하는 상대이고, 웬수는 안 만날 수가 없는 상대이다.'

'사랑은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 '아들에게'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처음 본 것은 20, 30대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위 구절에 잘 동의가 되지 않았다. 사랑이 그렇게 하찮고 사소한 것인가 하는 반발감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요즘에는 그런 반발감이 거의 들지 않는다. 빈말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속이 비어 있는 말, 공허한 말이므로 내면에 사랑이 충만하지 않는 한,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하찮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은 하찮거나 사소해 보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그 진정성이 담보되는 게 아닐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과의 일상적 관계에서부터 말이다. 그래야 가정이 지상의 천국은 못 될망정 원수의 산실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우재욱 변호사

한국일보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1982 김혜경, 이재명 손잡고 웃었다…2년 3개월 만에 나타난 곳은 랭크뉴스 2024.05.06
21981 의료계, ‘증원 근거’ 정부 압박…교수들 ‘일주일 휴진’ 거론도 랭크뉴스 2024.05.06
» »»»»» 사랑은 사소해 보이는 데서부터 [삶과 문화] 랭크뉴스 2024.05.05
21979 평화 시위하는 흑인 여성에 '원숭이 울음소리' 낸 美 대학생들…그들 손에는 '트럼프 깃발' 랭크뉴스 2024.05.05
21978 한라산 900㎜ 물폭탄 퍼부었다…비행기 결항에 제주 날벼락 랭크뉴스 2024.05.05
21977 “韓 여성에 민희진은 가부장제와 싸우는 영웅”… 英 언론 분석 랭크뉴스 2024.05.05
21976 [단독] 유아교육과 나왔다더니‥아이를 발로 휙휙 랭크뉴스 2024.05.05
21975 "한복 안맞자 직원이 뚱뚱하다고"…K관광 불만 '쇼핑 관련'이 최다 랭크뉴스 2024.05.05
21974 한라산 900㎜ 물폭탄 퍼부었다…결항 속출에 난리 난 제주 랭크뉴스 2024.05.05
21973 김진표 국회의장 '중립 불필요? 공부해보면 부끄러울 것" 랭크뉴스 2024.05.05
21972 김계환 사령관, 변호인 없이 15시간 조사받아, 2차소환 조율 랭크뉴스 2024.05.05
21971 이스라엘, ‘눈엣가시’ 알자지라 퇴출 결정…“선동매체 폐쇄한다” 랭크뉴스 2024.05.05
21970 미 LA서 경찰 총격에 한인 사망‥과잉 진압 논란 랭크뉴스 2024.05.05
21969 목숨 잃을 때마다 대책 나왔지만…스쿨존 지금은? [현장K] 랭크뉴스 2024.05.05
21968 장발에 광선검 든 이정재…"춤추듯 액션" 스타워즈 동료 극찬 랭크뉴스 2024.05.05
21967 “배우해도 되겠네”… 임영웅, 신곡 뮤비 ‘온기’ 선공개 랭크뉴스 2024.05.05
21966 김의장, '중립 불필요' 野 주장에 "공부해보면 부끄러울 것" 랭크뉴스 2024.05.05
21965 미성년 자녀 권리 강화하는 ‘정인이법’, 정쟁 속 또 폐기 위기 랭크뉴스 2024.05.05
21964 영국 언론 "가부장제와 싸우는 '민희진'… 한국 젊은 여성 사로잡다" 랭크뉴스 2024.05.05
21963 러, 우크라 동부서 확장…오체레티네도 장악 랭크뉴스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