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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산 프랑스 여성 철학자
영성과 정치에 관한 말년 글 모음
유대-기독교 ‘전쟁의 신’ 숭배 규탄
신비주의 영성과 정치적 비전 결합
정치적 행동주의와 종교적 신비주의를 결합한 프랑스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 위키미디어 코먼스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시몬 베유 지음, 이종영 옮김 l 리시올 l 1만6000원

시몬 베유(1909~1943)는 서른네 해의 짧은 삶을 불꽃처럼 살다 간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다. 베유의 사상은 종교적 신비주의와 정치적 행동주의의 결합 속에서 영글었다는 점에서 통상의 사상들과 사뭇 다른 성격을 지녔다.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는 근년에 들어와 다시 조명받고 있는 베유의 사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글 모음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그러니까 베유의 삶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던 시기에 쓴 글들 가운데 종교와 신앙에 대한 베유의 통찰이 담긴 글 여섯 편이 묶였다. 이 글 속에서 베유의 영성적 사유는 당대 유럽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이어진다.

베유의 삶은 한편의 강렬한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1909년 파리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베유는 일찍부터 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19살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고등사범 교장이던 셀레스탱 부글레는 베유를 가리켜 “아나키스트와 수도승의 혼합”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미래의 베유를 그대로 예견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고등사범 3학년 때 베유는 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해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임용됐다. 철학 교사로 지내던 시기 내내 베유는 노동자 잡지에 글을 쓰고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다. 이런 이유로 ‘모스쿠테르’(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첩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베유는 소련식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고 다른 혁명의 길을 찾았다. 1934년에는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독일을 탈출한 사회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다. 스탈린의 러시아를 빠져나온 트로츠키가 파리의 베유 집에 머물기도 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아나키스트 부대에 합류해 군사작전에 참여했다가 큰 화상을 입기도 했다. 1938년 베유는 “그 어떤 인간 존재보다 더 밀접하고 더 확실하고 더 현실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는 신비체험을 했다. 이 체험은 베유의 정치적 실천에 종교적 색조를 입혔고 철학적 사유에 영성의 차원을 얹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된 뒤 베유는 남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1942년 뉴욕을 거쳐 런던의 프랑스 망명정부에 들어가 반나치 활동을 벌였다. 1943년 4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베유는 폐결핵을 앓다가 그해 8월 요양원에서 삶을 마쳤다.

이 책에 실린 베유의 글들은 영성과 정치가 결합해 이룬 독특한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책의 제목으로 쓰인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는 베유 자신의 종교관을 35가지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어서 책 전체의 중심을 이룬다. 이 글에서 베유는 기독교(가톨릭)에 다가가면서도 끝내 “교회 바깥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여기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신을 보는 베유의 명료한 관점이다. “신은 선하다. 신이 불의하고 잔혹한 끔찍한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건 신과 관련해 가장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의 선함과 신의 사랑을 죽음으로써 보여준 사람이다.

그러나 베유가 보기에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밝힌 그 진리를 배반해온 역사다. 베유는 그 역사의 근원에 유대교와 구약성서가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의 구약성서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선한 신’의 대척점에 있는 ‘권력의 신’을 숭배한다. 유대인의 신은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학살하는 ‘전쟁의 신’이다. 구약성서는 우상숭배를 가장 나쁜 죄로 지목하지만, 베유가 보기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고, 그런 민족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 신이야말로 우상이다. “히브리인들은 쇠붙이나 나무로 된 우상이 아니라 인종‧민족이라는 우상을 섬긴다.” 이 우상숭배가 기독교를 오염시켰다고 베유는 말한다. 기독교를 믿는 자만이 ‘선민’이라는 믿음이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베유는 여기에 또 하나의 ‘우상숭배’를 더한다. 기독교가 커 가는 데 모태 노릇을 한 로마 제국이다. 로마 제국은 황제라는 우상, 국가라는 우상을 숭배했는데 이 로마 제국의 우상숭배가 기독교를 전체주의적 국가 숭배로 이끌었다. 기독교에 침투한 이 두 가지 우상숭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사랑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기독교 우상숭배가 16세기 이후 침략주의‧제국주의와 함께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 다른 민족들의 고유한 신앙의 뿌리를 뽑았다. 베유는 권력과 국가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결과가 당대 유럽을 집어삼킨 히틀러의 나치즘이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기독교의 우상숭배가 낳은 자식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자신의 거대한 오류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가? 베유는 기독교 안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신비주의 신앙에 주목한다. 신비주의 전통이 이야기하는 신은 구약의 유대인이나 기독교 주류가 믿은 권력의 신의 정반대에 있는 신이다. 이 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계 곳곳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베유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힌두교의 크리슈나, 불교의 붓다, 도교의 도를 신비주의적 영성의 사례로 거론한다. 이 신비주의적 영성의 신앙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는, 무한히 선한 신에 대한 신앙이다. 영성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는다. 베유는 “영성을 완전하게 지닌 사람은 겉보기에 무신론자로 살고 죽더라도 성인”이라고 말한다.

이 신비주의적 영성은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 곧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한다. 베유는 ‘사랑의 광기’라는 말로 그 사랑의 성격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한다. 자신을 비우고 경계 없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그리스도야말로 ‘사랑의 광기’ 속에 산 사람이다. 사랑의 광기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함’이다. 그런 복종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베유는 말한다. 사랑에 복종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보편적 선의 실현을 향한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간다. 베유 자신의 푸른 화염과도 같은 삶이 영성과 정치가 하나 되는 그 경지를 증언한다.

정치적 행동주의와 종교적 신비주의를 결합한 프랑스 여성 철학자 시몬 베유. 위키미디어 코먼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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