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는 지금 떠나야 한다(Trump must go now).”

14일 오후 3시 미국 워싱턴 디시(D.C.) 백악관 북쪽 출입구 앞 라파예트 광장엔 무더운 날씨에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5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1㎞남짓 떨어진 로건 써클에서 한차례 집회를 연 뒤 행진해 이곳으로 오는 동안 참가자가 불어났다. 이날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반 트럼프 시위 ‘노 킹스’(No Kings) 집회 중 백악관 최근접 집회였지만 광장 대부분을 펜스로 막는 바람에 멀리서 백악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노 킹스’ 주최 쪽은 ‘충돌을 피하겠다’며 워싱턴 디시에서 공식 집회는 열지 않았다.


뉴저지주에 온 푸에르토리코 혈통 미국인 앤서니는 한겨레에 “멕시코인들이 평소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안다. 그들을 ‘원치 않는 사람들’로 낙인찍고 쫓아내는 건 모욕적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워싱턴에 거주하는 한 변호사는 “저녁에 열리는 군사 퍼레이드를 보호하려고 이렇게 많은 펜스를 세운 게 정말 이상하다. 군대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다. 대통령 취임식 날보다 워싱턴 전역에 펜스가 더 많이 설치됐다”고 말했다.

14일(현지시각)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가 백악관 북쪽 라파예트 광장에서 열렸다. 검은색 펜스로 광장 대부분에 시위대 접근을 막았다. 멀리 백악관이 보이고 있다.

미 육군 창설 250주년 맞이 대규모 열병식이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이날, 이에 맞서 필라델피아 10만명, 뉴욕 5만명, 로스앤젤레스 3만명 등 약 500만명이 미국 전역에서 열린 2000여개 시위에 참여했다.

주최 쪽은 1991년 이후 처음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하는 ‘트럼프식 권위주의’에 저항한다는 의미로 이날을 ‘노 킹스’(미국에 왕은 없다) 집회의 날로 기획했다고 밝혔다. 지난주부터 불법 이민자 단속 반발 시위가 미 전역에 확산하면서 집회 규모가 더욱 커졌다.

14일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노 킹스’ 집회. 주최 쪽이 제공한 지도. 

9일째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위에 참여한 56살 미셸 번은 찢어진 헌법 사본을 들고 “우리의 모든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며 “다른 행정부들도 추방은 했지만,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말했다. 시위는 주로 평화적으로 진행됐지만, 오후 들어 연방청사 인근에서 시위대와 군경 간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결국 경찰은 해산 명령을 내리고 고무탄, 최루탄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엔피알(NPR)에 따르면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휴대전화를 끄거나 소셜미디어 게시를 피했다. 사크라멘토 주민 알리 쇤버거는 “이 정권에 맞서 발언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다른 시위 참가자 보호를 위해 사진을 남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세인트루이스(미주리주), 그랜드 정션(콜로라도), 오스틴(텍사스) 등 중소도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워싱턴 디시에서 오후 6시30분부터 시작한 열병식 인근에도 시위대들이 왔지만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입장을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트럼프의 파시스트 군사 퍼레이드에 반대한다’, ‘이민세관단속국은 게슈타포다’ 등의 팻말을 흔들었다.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판매하는 상인을 향해 “나치 모자를 판매한다”고 야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릴랜드주에 거주하는 스테판은 한겨레에 “아무도 이 퍼레이드에 반대하지 않으면 트럼프는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14일(현지시각)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노 킹스’ 집회가 백악관 북쪽 라파예트 광장에서 열렸다. 

14일 워싱턴 디시에서 열린 열병식을 관람하기 위해 시민들이 수백미터 줄을 서 있다. 

이날은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생일 축하쇼’라는 비판이 많았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무대에 오르자 일부 관객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초청 가수 리 그린우드는 열병식 뒤 노래하면서 “대통령님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생일과 무관한 행사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링컨기념관에서 워싱턴모뉴먼트까지 콘스티투션 애비뉴를 따라 진행된 열병식에는 군인 약 6700명, 차량 150대, 항공기 50대, 말 34마리, 노새 2마리, 개 한 마리가 동원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축하 연설에서 “육군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강하게 한다”며 “오늘 밤 여러분은 모든 미국인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미 육군은 사악한 제국의 심장에 총검을 꽂고 악한 폭군들의 야망을 전차로 짓밟으며 후퇴하게 만들었다”며 “적들이 미국민을 위협하면 우리 군이 갈 것이고 그들은 완전하고 철저하게 몰락할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14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 열병식을 앞두고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에서 반(反)트럼프 시위가 열렸다. 한 시위 참가자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얼굴을 \'\'합성\'\'한 만화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열병식에는 독립전쟁부터 남북전쟁, 서부 개척 시대, 1·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테러와의 전쟁을 거쳐 현재 육군이 사용하는 군사장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력 전차인 에이브럼스 탱크, 스트라이커 장갑차, 브래들리 보병전투차량, 팔라딘 자주포 등 최신 장비도 등장했다. 블랙호크(UH-60)와 아파치(AH-64), 치누크(CH-47) 등 헬리콥터도 비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때도 열병식을 열기를 원했지만 참모들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방부는 열병식 비용을 최대 4500만달러(약 615억원)로 추산했다.

한겨레

김원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