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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일대 고추밭. 뒤편 산은 산불로 검게 그을렸다. /김민정 기자

전쟁터 같았어요. 농기계는 다 타버렸고, 농민들은 멍하니 밭만 보고 있었죠.


지난달 23일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서 만난 김종진 농촌진흥청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 농기계교육팀장은 지난 4월 복구 현장에 처음 투입됐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지난 3월 말 시작돼 경북을 휩쓴 ‘역대 최악’의 대형 산불은 10만헥타르(ha)에 달하는 국토를 태웠다. 서울 면적의 1.6배 규모다. 34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잔해만 남은 농가와 과수원은 ‘영농 재개’라는 말조차 낯설 만큼 황폐했다.

단촌면을 둘러싼 산등성이에는 나뭇잎을 잃은 나무들이 가시처럼 앙상하게 박혀 있었다. 밭머리에는 불에 녹아내린 경운기 다섯 대가 엉켜 있었고, 까맣게 탄 비료 포대는 바닥에 잿더미처럼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 고랑은 반듯하게 이어졌고 두둑 위에는 고추 모종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우리가 밭을 갈고 고랑을 내자 농민들 얼굴이 바뀌었어요. 그때부터 농사가 다시 시작됐다고 느꼈죠.” 전국 각지에서 모인 복구단이 땅을 가르고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자, 멈춰 있던 밭에도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농업기계 응급복구단이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의 경사진 밭에서 두둑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농촌진흥청 제공

188명의 ‘어벤져스’, 222농가에 생업 재개 밑거름
산불로 지정된 특별재난지역 8곳 중 안동·의성·청송·영양 등 4개 지역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농업기계 어벤져스’가 복구 작업에 나섰다. 이들의 공식 명칭은 ‘농업기계 응급복구단’이지만, 신속하게 투입돼 척박한 밭을 일구는 모습이 영화 속 슈퍼히어로 같다는 뜻에서 현장에선 ‘어벤져스’란 별명이 붙었다.

현장에는 농진청과 각 도 농업기술원, 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활동하는 농업기계 안전전문관 188명과 트랙터, 관리기, 로터리, 휴립기 등 총 162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작업 규모는 5개 시·군 222농가, 484필지, 총 117.6헥타르에 달했다. 농기계 수리도 54건 이뤄졌다.

지원은 지난 4월 7일부터 25일까지 이어졌다. 농작업은 밭을 갈고 두둑을 세운 뒤 비닐을 씌우고 고추 모종을 심는 순서로 진행됐다. 안동과 영양에는 각 3일, 청송은 4일, 의성에는 5일간 작업이 집중됐다. 하루 평균 30~40명의 전문 인력이 현장에 상주하며 고추 정식을 위한 밭 만들기, 벌목·파쇄, 농기계 수리 등을 도맡았다.

류시국(63) 구계리 이장은 “고추는 4월 말이나 5월 초에 심어야 하는데 그 시기에 딱 맞춰 와서 도와줬다”며 “모종 품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단 심는 게 급했다. 도와준 분들 없었으면 올해 농사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밭에 펼쳐진 고추 모종은 제각기 키가 달랐고, 줄 간격이나 두둑 모양도 농가마다 달랐다. 모종은 경남 함안에서 긴급 수급됐다. 류 이장은 “함안 모종인데 키는 작아도 고추가 벌써 열렸더라. 그게 뭐가 중요하나. 심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라고 했다. 이 일대는 평균 연령이 높아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고추를 주로 재배한다.

일부 농가는 고랑 간격이나 두둑 형태를 여러 차례 수정해달라고 요청했고, 복구단은 그때마다 조정에 나섰다. 이청희 경상북도농업기술원 농업기계팀장은 “다섯 번까지 다시 작업해 드린 적도 있다. 고령 농가가 많아 최대한 요구에 맞춰야 했다”고 말했다.

복구단은 2019년 강원도 산불 피해 당시 처음 꾸려진 ‘농업기계 응급복구단’이 모태다. 이후 전남 곡성·전북 남원 수해(2020), 경북 울진 산불(2022), 충남 논산 침수(2024) 등 전국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복구 현장에 투입됐다.

이번 경북 산불 대응에서도 각 도 단위로 전문 인력을 배치하고 장비를 집결시키는 ‘도 단위 기동팀’ 편제가 이뤄졌다. 농진청은 사전 집합 교육을 통해 장비 운영 방식과 지역별 작목 특성을 공유하고, 복구 중에 발생하는 장비 고장에 대비해 수리지원팀도 함께 파견했다.

지난달 23일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모아둔 산불로 타버린 농기계들. /김민정 기자

13시간 걸리던 정식, 2시간 만에 끝… 기계화로 바뀐 복구 현장
이번 복구는 농진청이 개발한 농기계의 첫 현장 실증 무대이기도 했다. 기존에는 사람이 손으로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고추·배추 겸용 정식기와 흙올림식 휴립피복기 등이 투입됐다.

정식기는 연약한 모종을 상하지 않게 자동으로 심는 기계다. 기존에는 고추 10아르(1000㎡)당 12.8시간, 배추는 13.9시간이 걸리던 작업이 2시간 이내로 단축됐다. 노동력은 6~7배 절감된다.

흙올림식 휴립피복기는 고랑을 만들고, 관수용 호스를 설치한 뒤 ‘멀칭’이라 불리는 비닐 덮기 작업까지 한 번에 처리하는 장비다. 멀칭은 잡초 발생을 억제하고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밭에 비닐을 씌우는 작업이다.

농진청은 올해 고추·배추 주산지를 중심으로 이들 장비의 현장 실증과 연시회를 확대하고, 정식기 활용을 위한 육묘판 등 연계 자재 보급도 추진할 계획이다. 조용빈 농진청 농업공학부장은 “기계화는 농촌의 일손 부족을 넘어 지속 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핵심 전략”이라며 “장비 단순 보급이 아닌, 기술·인력·재배 체계가 결합된 통합 패키지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농진청은 경북 산불 피해 지역에 고추 모종 117만 주, 벼·콩·깨·기장 등 밭작물 종자 21톤을 무상 공급했고, 과수 묘목 지원도 검토 중이다. 권재한 농진청장은 “농민이 다시 농사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농진청의 역할”이라며 “기술과 장비, 전문 인력이 현장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계속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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