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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공군 단기사병 이재춘씨, 시민군 활동
기동타격대로 끝까지 도청 지켜…탈영죄로 옥고
12·3 불법계엄 보며 “성공 못하리라 직감”
5·18 당시 방위병으로 복무하다 탈영해 시민군으로 활동한 이재춘씨가 광주 서구 5·18 자유공원에 재현해 놓은 영창 앞에 서 있다. 정효진 기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 조장으로 활동했던 이재춘씨(66)는 몇해 전 목소리를 잃었다. 2021년 9월 후두암으로 수술을 받으면서다. 암 발병을 두고 병원 의사들은 “투옥생활 등 수십 년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2022년 4월 재수술을 받은 후 그는 ‘인공 음성 발성기’ 없이는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겨우 근육이 남은 식도에 발성기를 대면 낯선 기계음이 목소리를 대신한다. 이씨는 “목소리가 남아있을 때 5·18 진상규명 활동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지난 9일 광주 남구 방림동에서 만난 이씨가 목에 발성기를 댔다. 그는 “5·18때 시민들의 편에서 총을 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그때 광주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비극이 되풀이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불법 계엄령으로 무고한 시민 학살이 자행되던 5월의 그날, 광주에 살았던 이씨는 당시 군인이었다. 5·18 당시 시민군 편에 섰던 ‘유일한’ 군인이기도 하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건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군인들이 국회본청 진입을 시도하자 시민들과 국회 직원 등이 격렬히 막아서고 있다. 성동훈 기자


그가 정권의 무도한 불법 계엄을 다시 목도한 건 44년만인 지난해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일으킨 ‘12·3 불법계엄’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선고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의 국회 통제 등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군인들이 지난해 불법 계엄을 ‘소극적 임무 수행’으로 막아내기 44년 전, 이씨는 부대를 이탈해 시민들과 함께 불법 계엄에 맞섰다. ‘1980년의 광주가 2024년의 대한민국을 구했다’라는 말은 우연이 아니다.

이씨는 “5·18때처럼 국회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장병들이 단 한발의 총탄이라도 발사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면서 “계엄군들이 시민 편에 섰다는 게 너무 다행이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윤석열의 내란(불법 계엄)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직감했다”고 했다. 내란의 위기에서 5·18이 대한민국을 다시 옳은 곳으로 이끌었다고 믿는 이씨는 “군인들도 시민들도 그날 밤 광주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10·26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그 해 21살이었던 이씨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1980년 4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입대,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광주비행장(현 공군 제1전투비행단)에 있는 공군 제3252부대 야전 정비대대에 배치됐다.

방위병은 현역과 달리 집에서 출퇴근하고 복무기간도 짧았다. 직업을 갖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신분은 민간인이 아닌 ‘군인’이었다. 현역 군인과 마찬가지로 군법을 적용받았다.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저녁에는 광주 충장로의 음악다방 DJ로 일했던 이씨가 처음부터 5·18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부대 방위병들에게는 “퇴근 이후 절대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휩쓸리지 마라”는 지시가 여러 차례 내려왔다.

이씨가 일했던 충장로는 전남도청과 금남로와 가까웠다. 그는 “M16소총을 매고 곤봉을 든 공수부대원들은 계엄군을 피해 충장로 골목으로 흩어진 학생들을 끝까지 쫓아가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렸다”며 “군인들의 눈은 뻘겋게 충혈돼 있었다”고 떠올렸다.

계엄군 무차별 폭력에 시민군 합류 결심

“저들은 국민을 보호하는 군인이 아니다.”

이씨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부대로 출근하지 않고 무등극장 인근에서 화염병을 만들던 대학생들을 돕다 공수부대에 붙잡혔다. 끌려간 곳은 전남도청 뒤편에 있던 전남도경찰국 앞이었다.

50여명도 넘는 시민들이 경찰 감시 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 시간 뒤 금남로 쪽에서 총소리가 여러 차례 들려왔다. 도청 상공에서는 군용 헬기들이 바쁘게 날아다녔다. 경찰들이 갑자기 시민들을 두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공수부대원들도 도청에서 나갔다.

이씨는 “그날이 (계엄군 집단발포가 있었던)5월21일 이었던 것 같다”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참히 사살된 시신들을 보고 ‘계엄군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 전남도청에 남아 저항하던 시민군을 체포해 연행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광주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은 지 얼마 안 돼 총기 사용법에 능숙했던 이씨도 총을 들었다. 이씨와 동료들은 처음에는 치안과 행정이 마비된 광주 곳곳을 순찰하는 기동순찰대를 맡았다.

계엄군 동태를 살피고 시내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였다. 5남매 중 장남인 이씨를 찾기 위해 할머니가 도청으로 찾아왔다. “금방 집에 가겠다”는 말로 돌려보냈다.

계엄군의 광주재진입작전(작전명 ‘상무충정작전’)을 앞둔 5월26일 오후 3시 도청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조직됐다. 기동타격대는 도청 사수와 광주시민 보호를 위한 결사대였다.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고 도청을 사수한다’ ‘계엄군과 대치할 때 절대 먼저 총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행동강령도 있었다.

이씨는 기동타격대 1조 조장을 맡아 도청에 남았다. 그는 “나중에 부대에 복귀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다”며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5월27일 오전 2시 특전사에서 선발된 특공조가 도청 담을 넘는 것을 봤지만 그는 총을 쏘지 않았다. 새벽녘이 되자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을 시작했다. 총격을 피해 도청 수위실 앞 버스 밑에 숨어있던 이씨는 결국 붙잡혀 포승줄에 묶였다. 시민들의 시신 앞에서 계엄군은 목청껏 승리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상무대로 끌려가 모진 매질…탈영죄로 5년 선고

상무대로 연행된 이씨는 전남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의 조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신분을 숨기고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5월30일에는 집에 편지도 썼다. “아버님 걱정이 많으시지요. 저는 계엄사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금일 내 조사가 끝나면 나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세요.”

군인 신분은 지문조회를 통해 금 새 탄로 났다. 조사관들은 “너는 군인인데 왜 시민군 활동을 했느냐”며 곡괭이 자루로 폭행했다. 모진 매질에 이씨의 척추는 뒤틀렸다. 훗날 이씨는 5·18피해자로 인정받아 중증 장애에 해당하는 ‘장애 8등급’ 판정을 받았다.

조사관들은 “군인의 ‘내란’은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라며 협박했다. 그는 당시 ‘내란’이 무슨 범죄인지도 몰랐다. 거기서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상무대에 붙잡혀 온 송기숙 교수를 만났다. 송 교수는 “너희까지 엮었구나.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는 중한 범죄”라며 안타까워했다.

1989년 육군본부가 국회 광주특위에 제출한 5·18기간 현역 군인 재판기록. 이재춘씨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내란실행과 군무이탈’로 처벌을 받은 유일한 군인이었다.


경향신문은 1989년 3월 육군본부가 국회 광주특위에 제출한 ‘광주사태 당시 방위병을 포함한 현역군인 재판기록’ 문건에서 이씨의 재판 기록을 발견했다. 5·18 기간 3명의 군인이 각종 범죄로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 한명이 이씨다. 이 재판문건이 공개되는 것 역시 최초다.

3명 중 상사 한 명은 폭행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2년, 다른 병사(방위병)는 살인으로 사형이 선고됐다. 공군 방위병 신분이던 이씨는 ‘내란실행과 군무이탈(탈영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5·18때 시민군으로 활동해 중형을 선고받은 유일한 군인이기도 하다.

투옥된 이씨는 이듬해 3월 3일에 형 집행 정지로 갑자기 풀려났다. 그날 서울 잠실체육관에서는 12대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씨의 취임식이 성대히 열렸다. 석방은 전씨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명분이었다.

“가장 어렵고 쉬운게 민주주의”

이씨는 5·18이후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집은 1층이다. 후두암 치료를 위한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을 해야 하지만 맨정신으로는 찍지 못해 입원 후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한다. 뒤틀린 척추는 후유증으로 남아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지난해 12월 3일 밤이 깊어질 무렵, 느닷없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이씨를 순식간에 44년 전으로 끌고 갔다. 집에서 TV를 보던 이씨는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가기 위해 짐부터 쌌다고 했다. 5·18의 트라우마다.

5·18 당시 광주 공군부대에서 복무하다 시민군으로 활동한 이재춘씨가 14일 광주 서구 5·18 자유공원 내 영창 내부에 서 있다. 정효진 기자


이씨의 아내 강숙경씨(71)는 “TV를 보던 남편이 대뜸 ‘윤석열이가 내란을 일으켰다. 내란이다’며 안절부절못했다”면서 “‘계엄군이 언제 잡으러 올지 모르니 빨리 도망쳐야 한다’ 면서 짐부터 챙겼다”고 했다.

‘내란’을 다시 맞닥뜨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씨가 다시 마주한 내란은 ‘공포’였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계엄군은 총을 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시민들은 한달음에 국회로 달려갔다.

이씨가 말했다. “그때 우리에게 무슨 대단한 큰 뜻이 있었던 게 아니다. 가장 어렵고도 쉬운 것이 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는 자기 욕심 부리지 않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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