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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관 전 도레이첨단소재 회장 승진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인사에서 물먹은 때가 더 많았다. 차장·부장 승진이 입사 동기들보다 길게는 5년이나 늦었다. 그는 “인사카드가 지저분했다”고 표현했다. 현장 관리를 주로 맡으면서 견책·감봉 같은 징계가 생겨서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월급쟁이 역사’를 새로 썼다.

지난달 1일 은퇴한 이영관(78) 전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은 1973년 제일합섬에 입사해 52년간 근무했다. 새한(97년)→도레이새한(99년)→도레이첨단소재(2010년)로 간판이 바뀌었을 뿐 같은 회사였다. 52년 중 26년은 대표이사 사장, 회장 등 최고경영자(CEO)로 활약했다. 지금까지 받은 월급이 618차례. 주요 대기업 CEO 중에 최장수다. 그런데 정작 그는 “월급쟁이라는 표현이 가장 듣기 싫다”고 했다. 무슨 사연일까. 두 차례 만남과 전화로 이 전 회장을 인터뷰했다.


Q : 이번에 은퇴한 사연이 궁금하다.

A :
“나이 일흔이 되던 2017년 일본 본사에 사의를 밝혔다. ‘한국에서는 일흔 넘어 직장에 다니면 노욕(老慾)이라 흉본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디 아프냐’고 묻더라. 회사도 성장하고 몸도 멀쩡한데 왜 그러느냐는 거였다. 75세 때도 같은 얘기를 했더니 ‘코로나19 상황에서 이러느냐’며 사직을 만류했다. 지난해 4월 김영섭 사장이 새로 선임됐다. 이때 ‘신임 사장이 소신을 펼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1년 더 남아서 김 사장을 지원해 달라’는 조건을 달아 그만두게 됐다.”
인사 물먹었던 직장인 신화 현장 관리 때 징계 많아 승진 밀려
직장생활 52년, CEO도 26년간 역임
일흔에 사표 냈더니 “어디 아프냐”

미련은 없었나.
A :
“미련? 없다. 지난 1년간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52년이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시대극(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기업인 버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바쁘게 일하느라 스트레스받을 시간도 없었다.”
직장생활이 어떻게 영화 같을 수 있나.
A :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짜 그렇다. 최장수 ‘월급쟁이’지만 월급쟁이 소리가 가장 듣기 싫었다. 마음은 언제나 오너경영인이었다. 주인의식이 나를 이끈 원동력이다. ‘내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결정할까’ 생각하고 일에 착수하면 우선 개인 성과가 높다. 이렇게 평생 ‘내가 내 일의 주인’이라는 자세로 일했다. 나아가서 동료를 독려하고, 본사를 더 강력하게 설득할 수도 있었다. 이런 선순환 덕분에 롱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618차례나 월급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월급은.
A :
“아무래도 첫 월급이다. 공과금 빼고 2만7000원쯤 됐다. 부모님께 속옷을 사드리고, 당시 애인이던 아내에게 18K 실가락지를 선물했다. 아내는 그걸 20년 넘게 끼고 다녔다.”
이력을 보면 고속 승진은 아니던데.
A :
“(웃으며) 아니다. 1994년 이사보로 승진한 이후 매년 한 단계씩 승진해 1999년에 대표이사가 됐다. 사실 현장 간부 때는 좌절이 많았다. 한순간의 안전사고로 동료 두 명을 잃고 사표를 낸 적도 있다.”
어떤 일이었나.
A :
“당시 필름에 까만 이물이 묻어 나오는 일이 생겼다.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부하 직원 한 명이 중합관(여러 화학물질이 섞여 반응하는 장치) 안으로 들어갔다. 산소가 부족하니까 바로 쓰러졌다. 그를 구하려고 후배가 뛰어 들어갔고, 두 사람이 한순간에 변을 당했다. 화학공장은 한순간도 방심해선 안 된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동생처럼 아끼던 이들을 보내고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서울사무소에서 사장이 내려오더니 ‘그 후배들 몫까지 더 열심히 해서 회사를 더 좋게 만들어라’는 숙제를 주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더 독하게 일했다.”
이영관 전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이 서울 마곡에 있는 연구개발센터 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전민규 기자
도레이첨단소재는 세계적인 화학·소재 업체인 일본 도레이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1972년 삼성이 도레이·미쓰이와 합작해 제일합섬으로 출범했고, 이후 새한그룹으로 분리됐다가 외환위기 와중에 도레이에 인수됐다. 같은 회사에 다녔지만, 그의 명함이 세 번 바뀐 이유다. 그가 대표로 취임한 이듬해에 4325억원이었던 매출은 2023년 2조7341억원으로 증가했다. 외형이 7배로 커진 셈이다. 사업 영역도 필름·섬유 중심에서 정보기술(IT) 소재, 탄소섬유, 필터, 아라미드 등 고부가가치 분야로 확장했다.

“품질 개선, 1년 안에 못 하면 옷 벗겠다”
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경험은 몰입이다. 1980년대 중반 제일합섬이 폴리에스터 필름(비디오테이프) 사업에 진출했을 때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간신히 필름을 개발했지만 품질이 문제였다. 비디오 화면이 흐려지거나 얇은 선이 생기는 ‘드롭아웃(dropout)’ 현상을 잡는 데 애먹었다.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며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초급 간부였던 그는 “1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옷을 벗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곧바로 부서원 전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다. “비디오테이프 수입액이 연간 4500만 달러다. 이걸 국산화하는 게 ‘공돌이’들이 나라를 위해 할 일이다.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일에 매진하겠다.” 대부분 공업계 고교와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였던 부서원들의 분위기가 일순간 비장감이 흐르는 듯했다.

‘폭싹 속았수다’ 기업인 버전 첫 월급 2만7000원, 아내에 실반지
2년 반 동안 집에선 옷만 갈아입어
88올림픽 열린지 모르고 필름 연구

이 회사가 생산한 폴리에스터 필름, 합성수지, 폴리에스터 원사로 제작된 건물 지붕, 항공기, 의류 사진과 이형필름. [사진 도레이첨단소재]
총 56회의 테스트를 거친 끝에 인공 탄산칼슘 배합량을 조절해 극적으로 품질을 개선했다. 그 덕분에 일본의 대표적 기업인 소니·마쓰시타 등에 수출해 이 분야 세계 1위에 올랐다. “(웃으며) 그래도 옷 갈아입으러 2~3일에 한 번은 집에 다녀왔어요. 그때가 1986년 초부터 2년 반인데, 정말 88서울올림픽이 열렸는지도 몰랐어요. 당시 유행가도 몰라요. 돌이켜보면 ‘행복한 블랙아웃’이었어요.”


Q : 그러다 일본 도레이가 새 주인이 됐다.

A :
“구미 3공장 역할이 컸다. 내가 공장 건설 책임자였는데, 자동화와 쾌적함에 역점을 뒀다. 화장실을 신라호텔 수준으로 꾸미자고 제안했다. 공장을 짓는 데 평당 150만원, 대리석 깔린 화장실은 750만원 견적이 나왔지만 그대로 집행했다. 화장실이 자기 집 안방처럼 깨끗해지니 정리정돈이 잘 됐다. 결함 없는 합격품 비율, 즉 수율(收率)이 올라갔다. 일본 도레이 관계자들이 인수 타진을 위한 실사를 와서 보더니 ‘꿈의 공장’이라며 감탄했다. 이때 5억 달러(당시 환율로 약 60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해 외자 기업으로 바뀌었다.”

Q : 민간 기업이든, 공조직이든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일까.

A :
“기술 지식이나 시장에 대한 식견은 기본이다. 빨리 처리해 곧바로 성과를 내야 할 일과 천천히 진행해 중장기적으로 방향을 바꿔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사람이나, 돈이나 자원이라는 게 한정돼 있다. 그래서 밸런스(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이게 선견력(先見力)이다. 내가 지금 이끌고 있는 이 사업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십은 곧 책임감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리더는 조직이나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모럴(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그 조직이 탄탄하다.”
“대충해도 되는 건 없어. 인재도 마찬가지”
이영관 전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오른쪽)이 1985년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으로부터 폴리에스터 필름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삼성그룹 기술상을 받고 있다. [사진 도레이첨단소재]
코로나19 당시 ‘마스크 대란’을 극복한 숨은 공신이다.
A :
“위생재 생산라인을 마스크 라인으로 긴급 개조했다. 당시 하루에 13t을 생산했는데 이는 마스크 650만 장 분량이었다. 위생재 때보다 마진을 1원도 더 붙이지 않았다.”
후회되는 경영 판단은 없었나.
A :
“10여 년 전 매물로 나왔던 코웨이 인수전에 뛰어들지 못한 것도 두고두고 아쉽다. (코웨이의 주력인 정수기용) 필터도 팔 수 있었겠지만, 고객을 직접 만날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오너였다면 더 과감하게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했을 것이다.”
스킨십 경영이 남달랐는데.
A :
“직원이 1000명 미만일 때는 거의 모든 임직원의 이름을 외우고 다녔다(※현재는 2200여 명). 구미공장 사택에 오래 살았는데 집 안에 술과 안주 떨어질 날이 없었다. 경조사, 특히 애사는 꼭 챙기려 노력했다. 출장이 있을 때는 아내가 대신 빈소를 찾아갔다.”

Q : 한국 기업들이 소재 분야에 유달리 약한 이유는.

A :
“대나무 품종 중에 맹종죽(孟宗竹)이 있다. 씨앗을 심으면 5년간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그러다 한순간에 15m가 자란다. 대충 해도 되는 건 하나도 없다. 기초가 중요하다. 소재산업도 그렇고, 인재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은퇴하면서 한국도레이과학진흥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A :
“과학 발전에 힘을 보태기 위해 2018년 재단을 만들었다. 매년 화학·재료 분야 최고의 연구자를 선정하는데, 수상자 중에 과학 분야 노벨상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즐겁게 살 것인가에 신경쓰고 있다. 일본 해안가 여행, 구미에서 1년 살기 같은 버킷 리스트를 차근차근 실천할 예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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