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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영화 팬들이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개요는 경찰, 범죄자, 살인 청부업자 등이 돈 가방을 두고 벌이는 허무하고 기이한 추격물이지만, 이면의 메시지는 음울하다.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포착하는 현대 사회의 현실은 윤리가 붕괴하고 우연과 폭력, 맹목이 지배하는 황량한 세상이다.

영화 속 폭력의 화신, 안톤 시거가 상징하듯이 세상은 명분 없는 폭력과 혼돈으로 가득하다. 근거도 목적도 알 수 없는 부조리가 횡행하고 규범은 잊혔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삶의 지혜를 갖춘, 나이 든 이들(old men)은 이해할 수도 적응할 수도 없는 무질서의 세계가 펼쳐진다.

정치윤리 붕괴 무질서의 시대로
국민의힘, 계엄 이후 폭주 악순환
민주당, 목적과 수단의 혼돈 심화
중도 시민들은 마음 둘 곳이 없어

3주 앞으로 다가온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보여주는 현실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영화 속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를 빼닮았다. 폭력, 우연, 윤리 붕괴, 가치의 전복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현명한 이들과 중도 시민들은 숨쉬기조차 힘든 세계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의 불법 계엄에서 비롯된 조기 대선에 국민의힘은 정작 탄핵 반대론자인 김문수 후보를 내세웠다. 게다가 후보 경선이 끝나자마자 국민의힘 지도부는 김문수 후보와 당 밖 인사의 후보 단일화를 우악스럽게 종용했다. 결국엔 느닷없는 후보 취소와 취소의 번복으로 이어졌다. 폭력(계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건 책임 윤리의 붕괴, 무질서의 나락인가?

혼돈과 부조리의 늪에 빠진 것은 민주당도 마찬가지. 불과 몇 주 전 헌재의 대통령 탄핵 인용을 정의의 이름으로 칭송하던 민주당은 표정을 180도 바꾸었다. 민주당은 자당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담당했던 대법원장, 대법관들의 탄핵과 특검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민주주의가 망가진 헝가리, 폴란드에서나 들어봤던 권력 분립 무용론까지 한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2025년 한국 민주주의에 중도 시민을 위한 공간은 없다.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이곳에는 전투적 진영주의, 권력에 대한 숭배, 비타협적 힘의 과시만 있을 뿐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추락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두 가지 맥락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첫째는 12·3 비상계엄으로 초래된 혼돈의 가속화. 둘째는 2차 대전 이후 글로벌 질서의 중추를 이뤄왔던 미국 민주주의의 퇴조와 그에 따른 가치의 혼돈.

첫째, 12·3 비상계엄이 열어젖힌 대혼란의 양상부터 살펴보자. 사실 계엄 이전에도 한국 민주주의는 위태위태했지만, 그날 밤 민주정치를 무력으로 뒤집으려던 폭거는 혼돈을 새로운 차원으로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정치의 목적과 수단의 혼돈이 일상화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민주주의가 생사의 위협을 받게 되자 계엄 해제 과정에서 주도적 몫을 했던 민주당은 반(反)계엄의 명분으로 무엇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논리로 위험한 도약을 감행한다. 계엄 협조, 내란 방조 세력의 이름을 붙여 대통령 권한대행을 탄핵하고 그 권한대행의 대행도 탄핵하는 사태가 이어졌다. 계엄에서 촉발된 혼돈이 야당에도 옮겨붙은 셈이다.

민주당발 혼돈의 절정은 지난주였다. 계엄이란 폭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킨 민주당에 대한 위협은 곧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를 몇 주 앞두고 내려진 민주당 후보에 대한 유죄취지 파기환송은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대법원도 탄핵되어야 한다.” 명분과 수단이 뒤엉키고 대의와 당파적 조바심이 서로 꼬리를 물어버린 혼란과 혼돈의 세계.

규모는 훨씬 초라하고 구차하지만 국민의힘에서 벌어진 후보 교체, 단일화 소동 역시 혼돈의 극단을 보여준다. 국민의힘이 탄핵을 반대했던 김문수 후보를 선출한 것이 5월 3일.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한덕수 예비후보로 단일화하기 위한 당 지도부의 압박이 이어졌다. 김문수 후보의 버티기와 당 지도부의 일방적인 후보 취소, 그리고 다시 취소를 번복하는 모습은 무질서 그 자체다.

둘째, 혼돈의 세계를 재촉한 또다른 계기는 트럼프 시대 미국 민주주의의 퇴조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오랫동안 미국식 민주주의가 하나의 역할 모형인 시대를 거쳐왔다. 미국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법의 지배, 개인의 자유와 개방사회는 민주주의의 기준점으로 작용해 왔고, 미국 민주주의는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 민주국가의 모방, 즉 따라하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현상은 이러한 모방의 구조를 뒤집어 놓았다. 역할 모형으로서의 미국 민주주의는 법치와 개방성에서 내부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종종 중동부 유럽, 중남미의 권위주의 리더들을 찬양함으로써 가치의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정리하자면, 나라 안팎으로 무질서와 부조리의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중도를 위한 정치는 사라지고 없다. 중용의 지혜를 추구하려는 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남은 3주 동안 우리는 변화를 향한 속삭임이라도 들어볼 수 있을까?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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