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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 고운세상 대표 인터뷰
지난달 25일 로레알과의 인수계약을 잘 마무리한 이주호 고운세상코스메틱 대표를 만났다. 신뢰를 보내준 여러 어른을 만나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좋은 경영자가 된 경험을 들었다. 김현동 기자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 누구나 평소엔 인생 진리로 받아들이는 격언일 텐데, 막상 실패나 역경을 맞닥뜨리면 금언 아닌 허언처럼 대한다. 이 말 믿고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내기보다, 재기 어려운 사회를 탓하며 주저앉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매우 경직된 우리 노동시장에선 무슨 이유에서든 경력 단절이나 실패 이력이 있으면 재취업이 쉽지 않기에, 실패자로 낙인찍힐까 봐 아예 처음부터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은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혼자 잘난 줄 알던 '간장 종지'
못난 존재 되고서야 타인 이해
'묻지 마 신뢰' 받고 또 줬더니
직원·경영자·기업 모두 크더라
그런데 여기 한국에선 드물게 무모한 도전을 마다 않고, 바닥보다 더 아래 지하까지 추락했는데도 툴툴 털고 일어나 결국 다시 치고 올라온 사람이 있다. 그것도 혼자만 살겠다고 아등바등 남 밟고 올라선 게 아니라 함께 밀고 당기며 직원들과 다 같이 성장한 인물이라 더 특별하다. 군 장병 '역조공템' 달팽이 크림과 닥터지 브랜드로 유명한 화장품회사 고운세상코스메틱 이주호(52) 대표 얘기다.

그가 합류한 지 10여 년 만에 100억원 안 되던 매출이 3000억원을 바라볼 만큼 급성장했다. 직원 출산율은 2.7명(2022년)으로 껑충 뛰었다. 또 스위스 미그로스 그룹(2018)에 이어 최근 프랑스 로레알이 인수하는 과정에서 창업자도 아닌 월급 사장인 이 대표에게 계속 경영을 맡길 만큼 시장도 인정한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폭력 아버지와 가출했던 어머니 등 어릴 적 가정환경도 불우했지만,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더한 끔찍한 실패가 있었다. 회사 경영 전략 짜던 스타 팀장에서 하루아침에 생산라인에서 나사 조이는 공장 노동자로 좌천됐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 열악한 자회사로 한 번 더 밀려났다 해고됐다. 불과 11개월 만의 급전직하 지옥행이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무너졌다. 그때 닥터지 창업자인 피부과 의사 안건영 고운세상 원장 전화 한 통이 그를 살렸다. 아니, 이 대표 인생뿐만 아니라 닥터지 조직 전체의 운명까지 바꿔버렸다. 지난달 25일 직접 들은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인생 이야기를 이 대표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유아독존 " "간장 종지 같은 놈. " " 첫 직장 대림 때 상사 김장진 상무님이 나를 꾸짖으며 했던 말이다. 분수나 역량 모르고 혼자 잘난 줄 알던 내 그릇이 딱 간장 종지만 했던 걸 그땐 나만 몰랐다.

입사 5년 차. IMF 외환위기 직후라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호기롭게 박차고 나왔다. 외환 업무 등 시키는 일만 하기엔 좀이 쑤셨다. 구직 사이트에서 빠르게 성장하며 상장 준비 중이던 회사를 찾아 먼저 문을 두드렸다. LG디스플레이 출신이 만든 장비업체 DMS였다. 창업자가 면접 때 "연대 경영 대기업 출신이 왜 수원의 작은 회사에 왔느냐"기에 "이 회사 CEO 하러 왔다"고 답했다. 그저 호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난 내 존재 가치를 입증해 누구보다 빨리 높은 곳에 올라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이메일 아이디도 '스타'였을까.

DMS 입사 직후 상장 심사 청구서 작업 중 전년도 재무제표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국내 굴지 회계법인 감사를 받아놓은 터라 경영진은 내 말을 안 믿었다. 종일 CFO와 입씨름하다 "이거 틀리면 너 자를 거야" 소리까지 들었다. 다행히 바로 다음 날 회계법인이 오류를 인정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분식한 셈이라 상장이 좌절됐다. 난 포기하지 않았다. 신입 1명 데리고 6개월 동안 매일 밤샘하다시피 하며 과거 4년 치 장부 재검토하고 재발 막는 시스템 만들어 코스닥 심사위원회에 찾아갔다. 그런 노력 덕에 이듬해인 2004년 10월 상장했다. 경영진들은 "회사 살렸다, 구했다"며 나를 금이야 옥이야 했다.
입사 때 150명이던 직원이 상장 즈음 1300명까지 늘 정도로 성장이 가팔랐다. 나도 기획 업무까지 하는 실세 재무회계팀장이 됐다. 그런데 2006년 말 다음 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2000억원 넘던 매출이 700억 원대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주말 임원 비상회의 결과 구조 조정이 결정됐다. 각 팀 인원 감축안을 보니 전부 신입사원이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 안건영 원장(오른쪽)과 함께한 이주호 대표. 안 원장은 어린 시절 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은 경험 덕에 오히려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의사가 됐다. [사진 이주호]
그땐 유능함 뿐 아니라 의협심도 나만의 전유물로 착각했다. "이게 회사냐. " 신뢰를 보낸 회사를 너무 쉽게 걷어찼다. 처음 여기 올 때처럼 구직 사이트 뒤져 상장 준비 중인 다른 회사에 갔다. 안건영 원장이 세운 병원경영회사(MSO )였다. 막상 가보니 여러 발목 잡는 요인 탓에 상장은 어려웠다. 이렇게 6개월 만에 안 원장과의 인연이 끝났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교만 필패 코스닥 심사 중이던 보안기술 업체 슈프리마에 다니던 어느 날 밤, 집 앞으로 DMS CFO가 찾아왔다. "큰일 났다, 빨리 와라." 당시 사회적 논란이었던 환 헤지 상품 '키코'로 큰 손실을 보자 SOS를 친 거였다. 상장 심사 청구서만 통과시킨 후 스톡옵션 포기하고 재입사했다. 인정받던 시절이 늘 그리웠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검토해보니, 60억원 물어주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환율 내려갈 때를 기다리자"고 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결국 3년 만에 손실은 1800억원까지 불고, 은행 상대 소송마저 최종 패소했다. CFO는 관뒀고, 난 생산팀 팀원으로 갔다. 임원회의 참석하는 스타 기획팀장에서 하루아침에 공장 조립라인 노동자가 된 거다. 육체노동은 의외로 견딜만했다. 문제는 고립감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중국 동포 노동자로 가득한 공장 기숙사에서 혼자 지냈는데, 세상에서 지워져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아 참기 어려웠다.
DMS 시절 임원 아닌 직원 중 유일하게 임원회의 참석한 스타 팀장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 노동자로 좌천성 발령이 났다. 공장 근무하던 시절 모습. [사진 이주호]
그렇게 8개월. 처음엔 "날 예뻐해 보호하려 보냈다"고 착각했다. 이쯤 했으면 됐다고 혼자 판단하곤, 사장님 찾아가 "본사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본사는커녕 "정신 못 차렸다"는 욕만 먹고 더 열악한 인천 계열사로 발령 났다. 회사에서 가장 못난 존재로 낙인찍힌 채 바닥에서 지하로 곤두박질쳐졌다.

비로소 알았다. "날 다시 찾을 일 없겠구나. " 좌절감에 술 먹고 다음 날 출근 안 하기 일쑤였다. 3개월 만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다행히 날 아끼던 첫 상사 김장진 상무님이 손을 내밀었다. 파이프 업체 케이넷 관리 담당 사장이었는데, 상장 준비하라며 불렀다. 막상 가보니 여건이 안 됐다. 그러자 대뜸 "너 영어 좀 하지?"라며 해외 영업을 맡겼다. 기술 영업할 배경 지식이 전무한데, 기존 베테랑들은 "낙하산 왔다"며 전부 나갔다. 거래처 미팅 때마다 사장님 눈에서 날 향한 레이저가 나왔다. 인정 갈구하는 사람이 매일 무능만 절감했으니, 출근길은 딱 도살장 끌려가는 길이었다. 돈이 궁해 3년을 반 시체처럼 버텼지만 극도의 스트레스로 자존감이 추락했다. 공황 장애가 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태환이를 찾아갔다. 내 꾐으로 멀쩡한 최고 회계법인 나와 DMS로 옮겼다가 나락을 경험한 후 재기한 친구였다.
" "처음엔 네 원망 많이 했어. 그런데 과거는 미래에 의해 다시 쓰이더라. " " 힘든 시간조차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꿀 수 있다는 어렴풋한 희망이 보였다.
전화위복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안건영 원장 얘기다. 7년 전 고작 6개월 인연이 전부인데,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뭔가 찜찜하던 차에 투명한 회계 등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던 "이주호가 문득 떠올랐다"고 했다. 판교의 꽤 좋은 회사와 도장 찍기 직전이었는데, 고운세상 CFO로 갔다.

헤드헌터는 어이없어했다.
" "매출 2조 대기업에서 400억, 이젠 100억도 안 되는 회사? 당신 끝이에요. 막장이에요. " " 2014년 가자마자 해외영업팀장의 횡령을 밝혔지만 상황은 나빴다. 몇 안 되는 팀장은 세력 다툼, 사업 총괄 임원은 나갔다. 안 원장은 화장품 영업 경험이 전무한 내게 사업 전체를 맡겼다.
중학교 때 장학금 준 원장문화재단 원종목 이사장(앞쪽)과 함께한 이주호 대표. 매달 잡지를 보내줬는데 이 대표는 ″나를 지켜봐주고 응원하는 어른이 있어 좋다″고 생각했다. [사진 이주호]
이제껏 모든 불행은 밖에서 왔다며 세상에 화내고 운명을 원망했다. 그런데 안 원장 신뢰 덕분에 비로소 오랜 저주가 풀렸다. 학창 시절 장학금에다 잊지 않고 책 보내주며 응원한 원장재단 원종목 이사장님처럼 조건 없이 믿어 주는 어른이 또다시 일어설 힘을 줬다. 외부를 향한 비난 대신 책임을 내 몫으로 돌리자 문제를 직시할 힘이 생겼다. 마침 운 좋게 회사의 가장 못난 존재가 돼본 적도 있었다. 리더의 믿음, 인정 못 받는 사람들의 심정, 이 경험은 돈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했다.

사람을 비용(인건비) 아닌 자산으로 보는 회사, 나라면 그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해외 출장 1인 1실 정시 퇴근 원칙, 재택근무 야근 인정 등 300대 1 넘는 입사 경쟁률 만든 여러 제도는 다 이런 마음에서 나왔다. 코로나 때 군부대 면회와 장병 휴가 전면금지로 주 매출원인 PX 실적이 곤두박질쳤지만 단 1명 안 내보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 초기 온 나라가 확진자를 마치 죄인처럼 낙인찍을 땐 사내 첫 확진자에게 꽃을 보내 안심시키고, 복귀 첫날 같이 점심 먹었다.
지난 2023년 유튜브 '네고왕' 촬영 당시 개그우먼 홍현희(왼쪽)와 함께한 이주호 대표. 예상 두 배가 넘는 100만 건 이상의 주문이 몰렸지만,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10일 걸릴 일을 2시간만에 마무리해 위기를 퀀텀 점프 기회로 만들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어느 회사는 마우스 움직임 등으로 재택 직원을 감시한단다. 왜 제도를 성실한 직원이 아닌 가장 낮은 수준에 맞춰 설계하나. 인간은 존엄하게 행동하는 존재라는 전제로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회사도 이익이다. 내가 받은 묻지 마 신뢰를 직원들한테 그대로 보냈더니 엄청난 성장으로 돌아왔다. 2016년 드라마 '태양의 후예' PPL 사건, 2018년 올리브용 파워팩 행사, 그리고 2023년 유튜브 '네고왕' 행사 등 위기 때마다 전 직원 자원으로 퀀텀 점프를 한 건 신뢰의 기업문화가 바탕이 됐다.

커리어 막장은커녕 난 지금 과거를 다시 쓰고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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