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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희 집이 그다지 좋지 않아요."

의류공장에서 만난 23살 리우펑순(劉豐順) 씨와의 인터뷰 장소를 집으로 정한 이유는 공장 휴식 시간 1시간 30분 안에 식사까지 끝마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달 월세 700위안(약 14만 원), 네 식구의 보금자리는 방 하나에 거실 하나, 작은 부엌과 화장실, 창고가 전부였습니다.

리우 씨는 2주 가까이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관세 전쟁 피해자입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 리우 씨의 상황은 이곳 '쉬인촌'에서는 특별히 나쁜 것도,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닙니다.

쉬인촌에서는 피라미드 아래로 내려갈수록 불안이 더욱 커집니다.

점심 식사 중인 리우펑순 씨.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일하고 중간에 1시간 30분을 쉬는데, 그렇게 일하고도 월급이 밀렸다.

■사업 전략 고민하는 '쉬인'…"동남아로 생산 라인 이전"

일명 '쉬인촌'은 중국의 대표적인 수출 도시 광저우의 탕부둥촌(塘步東村) 일대를 가리킵니다.

탕부둥촌을 중심으로 반경 3km 안에 저가 의류를 생산하는 크고 작은 공장 1,000여 곳, 각종 부자재 업체, 노동자 기숙사·월세방과 저렴한 식당이 빽빽하게 모여 있습니다.

공장 대부분이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쉬인(SHEIN)'의 하청이나 공급 업체이기 때문에 '쉬인촌'이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쉬인'을 꼭짓점으로 피라미드처럼 형성된 이 쉬인촌의 생태계가 최근 흔들리고 있습니다. '관세 전쟁'을 시작한 미국이 중국발 소액 소포에 관세 부과를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생태계 정점에 위치한 쉬인은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물론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빠져나갈 구멍을 재빨리 찾고 있습니다.

상품을 세분화해 경쟁력 있는 품목은 가격을 올리기도 하고, 물품을 납품하는 공장에는 생산라인을 동남아로 이전하라고 요구하는 등 다양한 '출구'를 모색 중입니다.

반면 쉬인에 물건을 대는, '피라미드 아래' 공장들에게는 단순한 출구 전략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껏 다져온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산 라인을 옮기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쉬인촌에서는 쉽게 구했던 부자재를 동남아에서 구할 수 있을지, 또 생산성 높은 숙련공을 구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기 때문입니다.

가동이 멈춘 생산라인. 미국이 소액 소포에도 관세를 부과하면서 공장 타격이 현실화하고 있다.

■흔들리는 중소 공장들…주문 끊기고 가동 중단까지

쉬인촌에서 미국 수출 의류를 만드는 공장이라면 어디나 예외 없이 관세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있습니다.

바이어가 갑자기 붙은 관세를 나눠 감당하자고 요구하기도 하고, 아예 미국 수출길이 막히기도 합니다.

쉬인촌 외곽에서 만난 의류공장 대표 원즈팡 씨도 지난달 한때 미국으로부터의 주문이 끊겼습니다.

"무역이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 또 중국 물건을 수입하는 미국 회사 같은 중소기업들만 관세 전쟁의 희생양이 될 겁니다."


다행히 지금은 끊겼던 주문이 어느 정도 회복돼 '큰 영향은 없다'고 했지만, 상황이 장기화하는 건 부담입니다.

이윤이 낮은 저가 의류일수록 타격이 더 큽니다.

18년째 광저우에서 공장을 운영해 온 한 한국 교민은 전체 생산 물량의 40%를 차지하는 미국 수출분의 생산을 아예 중단했습니다.

사무실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나뉜 두 곳의 생산 라인 중 한 곳은 한 달째 가동이 멈춰 재봉 기계에 먼지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미국 수출길이 막히면 중국 내에서 팔거나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된다고 자신감을 보였지만, 막상 생산 업체 입장에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미국 스타일하고 중국 스타일하고 또 달라서 미국에서 팔던 것을 중국에서 팔려면 쉽지 않습니다."
"계절도 있고 유행도 있어서 지금 수출 못 한 것이 몇 달 뒤에 나간다는 것도 사실 어렵고 그냥 공장에서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공장마다 장기전을 각오하며 노심초사하는 상황. 하지만 더 불안한 건 피라미드 더 아래, 바로 노동자들입니다.

이른바 ‘쉬인촌’이라고 불리는 광저우 탕부둥촌의 한 거리. 공장 노동자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일단 버티는 직원들…"2주 가까이 임금 체불"

다시 리우펑순 씨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리우 씨는 사실 끊겼던 주문이 회복됐다며 '큰 영향은 없다'고 했던 원 대표의 공장에서 일합니다. 그리고 2주 가까이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수출 물량을 만드는 공장은 물건을 해외로 보내고 전달된 것까지 확인한 후에 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이달 일한 돈을 다음 달에 받는 구조입니다.

리우 씨의 임금이 밀린 건, 지난달 공장에서 한 때 수출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관세 전쟁이 장기화하면, 해외 주문이 분명 크게 줄어들 것이고 실업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리우 씨 가족은 네 식구 모두 의류공장에서 일합니다.

숙련공인 부모님은 한 달에 약 1만 위안(200만 원)을 받고, 리우 씨는 8천 위안(160만 원) 정도를 받습니다.

공장이 흔들리면 바로 생활비를 줄여야 하고, 그런 상황이 길어지면 아예 직업을 바꿔 다른 기술을 익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리우 씨는 일자리가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임금 체불 문제가 곧 해결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쉬인촌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는 이런 위안마저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인력시장에서 일을 구하는 노동자들입니다.

부쩍 한산해진 쉬인촌 인력시장 모습. 이곳에서는 한 달 단위로 일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달 한달이 고비…'생존' 빨간불 인력시장

쉬인촌 인력시장의 빨간 구인 광고판 위에는 옷가지가 하나씩 걸려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옷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작업을 요구하는 건지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쉬인은 '패스트패션' 기업입니다. 소량의 옷을 주문해 시장 반응을 테스트한 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은 상품만 추가 주문하는 유연한 생산 방식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쉬인촌에서는 수시로 변화하는 주문 물량에 대응하기 위해 인력시장에서 한 달만 일할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작업 건수 당 임금을 계산해 지급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요즘 인력시장은 가장 시끌벅적해야 할 아침 8시에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한때는 사람을 구하지 못해 인력시장이 활기를 띠었지만, 이제는 고임금을 제시하는 공장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보통 블라우스나 치마 한 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성하는데 15위안(3천 원)에서 25위안(5천 원)을 수당으로 부르고, 비교적 단순한 재단 작업은 건당 0.3위안, 즉 우리 돈 60원 수준까지 임금이 내려갑니다.

인력시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선뜻 일자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쉬00 :
"대부분 공장이 제시하는 임금으로는 한 달에 6천 위안(116만 원) 밖에 벌지 못합니다. 비교적 단순한 마무리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아무 데나 들어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원하는 한 달 적정 임금선은 9천 위안 수준입니다.

작업 건수를 계산해 돈을 주는데, 매일 10시간씩 일할 때 하루 300위안을 버는 게 목표입니다.

구인 광고에 '천장 선풍기 있음', '기숙사 온수 공급' 같은 문구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 걸 생각하면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것 치고는 높지 않은 임금입니다.

쉬인촌의 한 공장 모습. 한창 작업 중인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쪽에는 천장 선풍기는커녕 불도 켜놓지 않았다.

이들은 지난달에 구한 한 달짜리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일단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관세 전쟁 속 쉬인촌 상황이 계속 악화하고 있는 만큼 불안을 감추지는 못했습니다.

A씨 :
"어떤 공장은 문 닫고 도망가요. 요즘 사장들 지출이 크다보니까 보수를 지급할 수가 없어서 문을 닫는 거예요."

쉬00 :
"수출 물량이 줄면 수출 의류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국내 판매 의류 공장으로 몰려들게 될 거예요. 사실 국내 의류는 일자리가 더 적기 때문에 결국 일이 없어질 겁니다."


쉬 씨는 지난달 한 달짜리 일자리를 구해 300위안을 내고 공장 기숙사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 생활비를 14위안(2,700원)만 쓰면서 그냥 배만 채운다고 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다음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관세 전쟁 여파가 사라질 때까지 한 달 또 한 달,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생활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거대 기업을 필두로 형성된 쉬인촌 생태계.

중국은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자신 있다', '버틸 수 있다'는 태도이지만,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서 불안은 이미 시작된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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