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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한국 노동 현실 쓰는 '월급사실주의 동인'
앤솔러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tvN 드라마 '미생'(2014)의 한 장면.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tvN 제공


'첫째,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둘째,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여기'를 쓴다. 셋째,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을 쓰고자 모인 작가들의 '월급사실주의 동인'은 이런 세 가지 원칙하에 굴러간다. 장강명 작가의 주도하에 2023년 기치를 올린 후 올해 세 번째 앤솔러지를 내놓았다. 노동절(5월 1일)을 맞아 선보인 책의 제목은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김동식, 서수진, 예소연, 윤치규, 이은규, 조승리, 황모과, 황시운 등 이번에 새로 합류한 8명의 작가가 쓴 8편의 수록작은 진짜 현실에 발디딘 아주 평범한 우리 이야기다.

"판타지 NO"… 발품 팔아 쓴 먹고사는 문제



책 제목은 베스트셀러 수필집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쓴 조승리 작가의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15세 때 시력을 잃은 조 작가는 저시력 시각장애인인 '나'의 노동 현장을 핍진하게 썼다. 엘리베이터 버튼의 숫자를 읽으려면 눈을 버튼 가까이 붙여야 하는 '나'는 백화점 지하 3층 골방에 처박혀 일한다. 백화점 직원 복지를 위한 계약직 안마사가 그의 직업.

먼지 한 톨 없이 번쩍이는 백화점, 손님에겐 한없이 친절한 직원들에 대한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직원들은 "지하에 내려오면 숨겨뒀던 진짜 인격을 그대로 내보"이며 돌변한다. "어이! 안마는 어디다 신청해야 받을 수 있나"라는 협력업체 소속 남성 배송기사의 불순한 위협부터 '나'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며 "이거 보여? 손가락 몇 개인지 알겄어?"라며 황당한 희롱을 하는 미화 할머니까지. '나'는 숨 쉬듯 당하는 모욕에 울분을 삼킨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김동식 외 7명 지음·문학동네 발행·256쪽·1만6,800원


무엇보다 서늘한 현실은, 죽자고 주물러봤자 월급 한 푼 늘기는커녕 2년 후면 바꿔치기 당할 소모품이라는 것. '이런 데'에서 정성과 열정을 다해 일하는 건 미련한 짓이다.

존엄 지키며 일다운 일 찾을 수 있을까



"부진님, 회사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건 과한 욕구죠." 회사가 날 왜 이런 취급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하는 '부진'에게 건네는 동료 '리안'의 조언은 이렇다. 황모과 작가의 '둘이라면 유니온' 속 주인공 부진은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일본에서 현지 테크 기업에 취업해 한국 기업과의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그럴 듯한 프로젝트명과 달리 그의 실제 업무는 AI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다. AI가 걸러내지 못하는 포르노가 아닌 척하는 포르노를 일일이 필터링하거나 챗봇 자동 응답 서비스에 직접 답변을 다는 식. 일을 하다 종종 슬퍼진다는 부진에게 리안은 말한다. "나는 슬프지 않으려 애써요. 프로 직장러니까."

직업적 존엄성과 자기효능감을 지키려 분투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노동자들의 슬픈 초상이다. 호주 최대 슈퍼마켓 체인에서 매니저 자리를 노리며 휴일 근무까지 자청하지만 결국 근태가 엉망이던 원주민 남성에게 승진 기회를 빼앗긴 파트타임 노동자 '주미'.(서수진 '올바른 크리스마스') 또 입사 동기 중 가장 뛰어났지만 육아휴직을 두 번 연장한 뒤 결국 퇴직을 택한 '지선', 지선의 몫까지 떠맡아 고군분투한 끝에 정규직 전환을 이뤄냈지만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된 후배들과는 섞일 수 없는 '선미'까지.(윤치규 '일괄 비일괄')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첫 번째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와 지난해 출간된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문학동네 제공


그럼에도 이들은 일다운 일을 꿈꾼다. 황시운 작가의 '일일업무 보고서'에는 하반신이 마비된 중증장애인으로 재택근무하는 '세진'이 나온다. 매일 4시간씩 업무용으로 개설된 비공개 카페에 기사를 스크랩해 올리고, 일일업무 보고서를 보내는 게 그의 일. 하지만 게시글 조회 수는 언제나 '0'이고, 업무 보고 메일 역시 늘 '읽지 않음' 상태이다. 장애인의무고용률을 어겼을 때 따르는 분담금을 내지 않기 위해 이들을 고용하고도 쓸데없는 일을 시키는 회사의 꼼수 탓이다. 세진은 "어디에라도 쓸모가 있는 일"이 하고 싶다.

직장 내 괴롭힘을 겪고 구직을 포기한 '쉬었음' 청년(김동식 '쌀먹: 키보드 농사꾼'), 벌점에 생계가 달린 플랫폼 돌봄 노동자(예소연 '아무 사이'), 실적과 직업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방송 노동자(이은규 '기획은 좋으나')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 이야기가 책에 담겼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점심시간 식당가에서 나와 어깨를 부딪힌 누군가의 이야기다. 절망과 체념만 있을 법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 뜻밖의 위로를 안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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