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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로 대중에 공개
천 화백 부정했지만... 감정협회·미술관 "진품"
26년 뒤 여러 기법 동원한 검찰도 진품 판단
유족, 국가 상대 1·2심 패소... '신군부' 연루설도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씨가 2017년 7월 20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천 화백의 '미인도' 위작 여부를 분석한 책 '천경자 코드' 출간 기자회견을 열고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 역점 사업인 '움직이는 미술관'의 전시 계획이 확정됐다. (중략) 천경자의 '미인도' 등 16점 등이 전시된다. (중략) 국립현대미술관은 많은 사람들이 수준 높은 미술작품과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복제품을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1990년 4월 17일 연합뉴스

발단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판매하던 5만 원짜리 포스터였다. 창백한 살결에 흰 꽃을 머리에 얹은 여성이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담긴 '미인도'의 복제본이었다. 원본이 이미 전년도에 전시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천경자 화백은 이렇게 발표했다.
"이것은 내 작품이 아니다."


한국 대표 화가와 국립현대미술관 간 초유의 위작 논란



천 화백은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창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1955년 31세 나이로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꽃과 여성을 주요 소재로 사용해 '꽃과 여인의 화가'라고 불렸으며, 생전 집필한 여러 수필집도 큰 인기를 끌어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원로 작가의 미공개 작품은 1990년 모습을 드러냈다
. 국립현대미술관이 10년 전부터 보관해왔다고 밝힌 해당 그림 구석엔 제작 시기가 1977년임을 나타내는 아라비아 숫자와 천 화백의 사인이 적혀있었다. 작품이 풍기는 전체적 인상과 구도는 1981년작 '장미와 연인'과 흡사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로 알려져 있으나 천 화백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한 작품. 한국일보 자료사진


천 화백은 단박에 위작이라고 못 박았다. 채색 수준 등이 현저히 떨어지는 데다가, 자신은 작품 연도를 한자로 적어 넣는데 미인도엔 숫자가 쓰여 있다고 했다. "내 그림 몇 개를 놓고 각 부분을 조합해 만든 것 같다"며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당시 국내 유일의 현대미술 감정기관이던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협회는 곧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작가 입장을 고려해 발표를 유보한다"고 밝혔다. 충격을 받은 천 화백은 "화단 풍토에 환멸을 느낀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논쟁이 계속되자 협회는 두 차례 더 회의를 연 뒤, 위원 7인
만장일치 의견으로 '진작 결정'
을 공식화했다. 국립현대미술관도 현미경 조사와 X선·적외선·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 감식 결과를 근거로 진품이 맞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천 화백은 결국 문제를 제기한 지 보름 만에 미국으로 출국했다.

유명 위조범의 자백과 번복... 수사 대상이 된 미인도

천경자 화백 유족 측 법률대리인들이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미인도 위작 논란과 관련한 고소장을 제출하기에 앞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잠잠해지는 듯했던 위작 시비는 1999년 다른 위조 사건으로 붙잡힌 권춘식이 "내가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하며 다시 불거졌다. 하지만 검찰은 미술품 위조 사건의 공소시효(3년)가 지났고, 동양화를 주로 베껴온 권씨가 천 화백 화풍을 감쪽같이 따라할 순 없다고 보고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이후 뇌출혈 후유증으로 투병하던 천 화백이 2015년 8월 별세하면서 미술계는 또 한 번 술렁였다. 권씨는 2016년 3월 돌연 "감형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번복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랑협회 고위 임원들의 회유 때문에 미인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한 것"이라며 말을 뒤집었다.

유족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 6명을 사자명예훼손, 허위공문서작성 등 혐의로 고소·고발
했다. 김선수 전 대법관, 박영수 전 특별검사,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오욱환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등이 무료 변론을 자청하며 유족 대리인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 국과수 vs 프랑스 감정회사 '엇갈린 감정 결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가 2016년 12월 19일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5개월간의
수사 끝에 나온 결론은 "진품이 맞다"는 것
이었다. 검찰은 "천 화백의 다른 작품 13점과 권씨의 모작 1점을 놓고 △대검찰청·국립과학수사연구소·KAIST의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감정(경험·직관에 의한 감정) △권씨 진술 △미술관의 미인도 소장 이력 등을 검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문점은 남았다. 수사 과정에서 유족 측 요청으로 감정을 수행한
프랑스의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미인도의 진품 가능성을 0.00002%로 계산
했다. 검찰은 이에 "같은 감정 방식을 적용하면 다른 작품의 진품 가능성도 4%대"라고 설명했지만, 뤼미에르사는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검찰이 결국 전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A씨만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고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하자 유족은 이에 불복해 재정신청을 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최종 기각됐고, A씨에 대해서도 법원은 "허위성에 대한 인식 내지 고의가 없었다"는 이유 등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은 민사소송으로 다시 한번 사법부 판단을 구했다. "미인도는 가짜가 맞는데도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감정인들을 압박하고 거짓 결과를 발표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법정에 나온 당시 감정인 2명은 "검사들이 진품으로 결론 내리고 싶어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민사 1·2심도 "검찰 진품 판단에 무리 없어"

문선호 작가가 1975년 천경자 화백의 모습을 담은 사진. 가나문화재단 제공


법원은 그러나 재차 유족의 청구를 물리쳤다. 2023년 나온 1심은 검찰이 5개월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미인도를 조사한 뒤
진품 결론을 내린 과정에 합리성이 결여되지 않았다고 판단
했다. 검사가 주어진 권한을 남용해 감정인들을 회유·압박하려 했다고 단정하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봤다.

항소심에선 안목감정 결과가 9년 만에 공개되며 파장이 일었다. 법원의 문서송부촉탁으로 확인된 감정결과서에는 "진작 의견이 우세했다"는 과거 검찰 수사 발표와 달리 감정인 9명 중 4명만 진작 의견을 낸 것으로 기록됐다. 나머지 3명은 위작, 2명은 판단 불명 의견이었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18일 "원칙적으로 작가 스스로 자기 작품의 범주를 결정함이 타당하고, 양측 의견 모두 타당한 부분이 있어 수사기관 판단과 달리 볼 여지도 존재한다"면서도, 검찰 처분이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유족 측은 상고하겠다
고 밝혔다.

일각선 '신군부 개입설' 제기... 대법 판단 나올까

김재규(왼쪽 두 번째)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2월 4일 육본계엄보통군법회의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35년째 이어지는 논란을 두고, 일각에선 그
출발점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한다. 당초 미인도는 김 전 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정부가 1979년 10·26 사태 이후 압수해 국립현대미술관에 넘겼다. 당시 신군부는 김 전 부장이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신군부가 김 전 부장에게 부패한 이미지를 씌우기 위해 미인도를 진품으로 몰아갔고, 검찰과 법원이 이에 동조한 것"이라는 '음모론'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유족 측 상고로 미인도가 다시 한번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경우,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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