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플라멩코 6개월차의 발표회
| 조승리서른아홉 살의 재롱잔치, 내 설익은 몸짓에도 터져 나오는 관객석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눈앞의 어둠을 모두 밀어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김상민기자
플라멩코를 배운 지 6개월이 흘렀다. 강사님이 학원 원생들과 봄에 소극장 발표회를 열 거란 계획을 전했다. 나는 겨우 두 곡 진도를 나간 참이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강사님이 말했다.
“당신 두 곡 준비됐잖아요. 무대 올릴 거예요.”
날벼락이었다.
“제가요? 왜요? 정말요?”
점점 목소리도, 내 눈도 커졌다. 강사님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말투로 춤을 배웠으니 당연히 무대에 서는 게 뭐 그리 놀랄 일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한발 빼며 자신 없다고 사양했다. 속으로는 재밌을 것 같다고 여기며 숫기 없는 학생을 연기했다.
“그런 얼굴로 마음에 없는 소리 할래요? 80석이니까 관객이나 모아봐요. 표는 무료로 뿌릴 테니 소극장 대관비나 보태요.”
강사님은 관객석이 채워지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다. 나는 30석은 내 손님이 올 거니 제일 좋은 자리를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80석 소극장 무대에
손은 차갑고 무릎은 ‘달달’
관객석엔 내가 초대한
동료들·은사님…나는 눈을 마주치듯
그들을 돌아봤다
기특한 표정을 짓고 있을
얼굴들이 떠올랐다
박자·스텝이 꼬였지만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그날부터 나의 서른아홉 살 재롱잔치 프로젝트가 실행됐다. 발표회까지는 석 달이 남아있었다. 우선 건성으로 대충 배우던 플라멩코에 진심을 실었다. 일주일에 한 번 받던 레슨을 두 번으로 늘리고 의상을 갖췄다. 바자회에서 산 낡은 플라멩코 구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새 구두를 주문했다. 국내에는 플라멩코 구두를 제작하는 숍이 없어 해외 주문을 해야 했다. 발표회 날까지 두 달 넘는 시간이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새 신발을 신고 싶어서 비싼 항공 배송을 선택했다.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플라멩코를 주제로 멋들어진 시도 한 편 지었다. 내가 초대한 손님들을 위해 답례품도 예약했다. 과하게 신나 하자 활동 지원사가 어렸을 때도 재롱잔치나 학예회를 하면 이리 좋아했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유년기에 겪었을 이벤트였을 텐데 도무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학부모들 사이를 두리번대며 오지 않을 엄마를 찾았던 서글픈 감정만 떠올랐다.
발표회 날이 가까워질수록 강사님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학원이 주최하는 발표회가 처음이었고 책임감이 막중해지는 모양이었다. 레슨 시간에 진도를 나가는 대신 리허설을 했다. 플라멩코 가수인 칸테가 내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는 연습이었다. 칸테가 내가 출 무대의 탱고 음악에 맞춰 노래를 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스텝을 생각하며 춤을 췄다. 한참 연습을 하는데 강사님이 리허설을 정지시켰다. 내게 자꾸 스피커 방향으로 몸이 돌아간다며 박수 소리로 정면 위치를 잡아주었다.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나는 최대한 정면을 염두에 두고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다시 몸이 소리 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리허설이 다시 중단되고 칸테와 강사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했다. 나는 심각해진 분위기에도 혼자 빙글대며 강사님에게 말했다.
“제 관객들은 멋진 공연 같은 건 기대도 없을걸요. 그냥 내가 신나서 뛰어다니는 걸 원할 거예요. 내 뒤통수만 봐도 좋아할 사람들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사님은 위로가 되지 않는지 완벽한 무대를 만들고 말 거라고 부루퉁하게 내뱉었다. 결국 칸테가 마이크를 내려놓고 관객석 정면에 서기로 했다. 나는 칸테의 목소리로 방향을 잡으면 됐다.
3월의 마지막 날. 대학로는 주말답게 붐볐다. 공연장 대기실 분위기는 살벌했다. 화가 난 강사님이 전화로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며 싸워댔다. 무대에 오르는 원생들은 대기실에서 화장과 의상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나는 꼴찌로 도착해 오늘 무대를 도와줄 프로 플라멩코 무용수들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에 꽃장식을 올렸다.
무대에서 쾅쾅쾅 발 구르는 소리가 났다. 춤 리허설이 아니라 강사님이 화가 나서 뛰어다니는 소리였다. 대기실에 들어온 강사님이 씩씩대며 상황을 설명했다. 대관한 소극장 시설이 계약과 달리 형편없다는 것이다. 마이크에는 에코가 들어가지 않고 무선 마이크들은 몽땅 고장이라 했다. 게다가 조명까지 말썽이라 원하는 조도 조절이 불가하단다. 그녀의 속상한 마음이 무척 공감됐다. 나 역시 계획과 어긋나 심통 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달 전에 주문했던 플라멩코 구두는 결국 도착하지 않았다. 분명 오후 5시 발표회 시작이라 당부했는데 초대한 관객들이 늦는다는 메시지를 속속 보내왔다.
좌충우돌 끝에 마지막 본 리허설이 시작됐다. 나는 캄캄한 관객석 방향을 바라보고 억지로 웃음을 끌어내며 춤을 췄다. 리허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선지 관객석은 고요했다. 내가 추는 플라멩코 음악은 2분가량 되는데 배울 때는 그리도 긴 시간이더니 막상 무대에 서자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강사님이 발표회 시작을 알렸다. 무대에 오를 한 명 한 명이 소개됐다. 내 탱고는 세 번째 순서였다. 칸테의 손을 잡고 무대 중심으로 나갔다. 긴장된 마음으로 스텝이 틀려도 당황하지 말고 그냥 웃어버리자는 각오를 마음속에 새겼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두 무릎이 달달 떨렸다. 칸테가 노래를 시작했고 나는 치맛자락을 흔들며 춤을 췄다. 머릿속이 하얗게 연소됐다. 칸테의 노래가 멀어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마지막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난 것은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 소리 때문이었다. 순간 억지로 짓던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설픈 춤을 흐느적댄 내 모습이 웃기고 이런 춤을 보러 오라 초대장을 돌린 내 뻔뻔함이 웃음보를 간질였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집 나갔던 부끄러움이 뒤늦게 찾아왔다. 관객석도 내 얼굴만큼이나 달아올랐다. 내가 준비한 다음 곡은 스페인에서 플라멩코 축제를 할 때 추는 기본 무도곡이었고 총 4절 중 내가 2절과 3절을 솔로로 맡았다.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로 나가 음악에 맞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나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 순서를 기다렸다. 10대 아이들이 1절을 추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아이들의 안내를 받고 무대 중심에 섰다. 속으로 박자를 세며 기본자세를 취했다. 발 구르는 소리와 박수 소리가 한층 더 격렬해졌다. 음악에 맞춰 춤을 시작했다. 관객석에서는 내 눈먼 동료들과 친구들, 장애인 학교를 함께 졸업한 부모 같은 언니 부부. 글을 가르쳐주신 은사님과 내 책을 출판해준 편집자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듯 관객석을 돌아봤다. 눈이 부셨다. 내 안에서 시작된 빛이 눈앞의 어둠을 밀어냈다. 웃음이 났다. 무대 구석에서 내가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까 조마조마하는 강사님의 마음이 보였다. 관객석에 앉아 기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박자를 틀리고 스텝을 빼먹었다. 그래도 나는 즐겁고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내가 올레를 외치자 장대비 같은 박수와 환호가 공연장을 흔들었다. 그리고 꽃다발 세례가 이어졌다. 나는 받아든 꽃다발이 너무 많아서 연신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받아들고를 반복했다. 친한 동료가 커다란 꽃다발을 내게 안기며 “춤은 제일 못 추던데 주인공이 되어 창피하진 않냐”고 놀려댔다. 나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만하면 잘했지 뭘 기대하고 왔냐”며 하하 웃었다.
한참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데 부모나 다름없는 장애인 학교 동기 언니가 꽃다발만 주고 얼른 몸을 빼려 했다. 나는 언니의 팔을 잡고 사진을 찍자고 잡아끌었다. 그러자 언니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내가 옆에 있어도 창피하지 않겠니? 화장도 제대로 못했다. 네 손님 많이 오셨는데 네가 체면 상할까 봐 그런다. 미용실이라도 다녀올 걸 그랬다.”
언니는 늘 궂은 일은 내 앞을 막고 섰다가 좋은 일이 생기면 슬쩍 물러나 있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내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언니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고 은사님과 다른 손님들께 인사를 시켰다.
그날 받은 꽃다발을 정리하다 보니 세 상자나 됐다. 서른아홉 내 뒤늦은 재롱잔치는 마음속 남아있던 작은 서글픔을 털어내며 성황리에 끝이 났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