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된 ‘셀 아메리카’…파월 미 연준 의장 해임 시사에 엎친 데 덮쳐
트럼프 입장 번복에 진정됐지만…보호무역주의 지속 때는 재발 우려
트럼프 입장 번복에 진정됐지만…보호무역주의 지속 때는 재발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9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뒤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주간경향] “환생이란 것이 있다면 나는 대통령이나 교황이나 4할 타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채권시장으로 환생하고 싶다. 모든 사람에게 겁을 줄 수 있으니까.”
30여 년 전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캠프에서 수석전략가로 활약한 제임스 카빌은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한 경제정책이 무산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선거 슬로건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중산층 세금 완화’ 정책을 펴다 ‘미국 국채 수익률(금리) 상승’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1993년 말부터 1994년 말까지 미국 장기 국채의 수익률은 5.25%에서 8.1%까지 올랐다.
국채는 정부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정부가 써야 할 돈이 세수보다 많을 때 그 차액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한다. 미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는 떼일 염려가 없는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여겨져 찾는 이가 많다.
하지만 이미 엄청나게 불어난 재정적자 상황에서 클린턴 행정부가 중산층 감세까지 추진하자 시장에서는 국가의 재정관리 능력에 의문을 품고 국채 매입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국채 수요가 줄면서 국채 가격은 내려가고, 반대로 수익률이 높아진 것이다. 특히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의 상승은 주택담보대출 등 실물금리 상승으로 이어져 경제 전반의 부담이 커질 우려가 있었다. 결국 클린턴 행정부는 중산층 세금 감면이라는 공약을 포기했다.
트럼프의 아킬레스건 ‘국채’
제임스 카빌의 말은 2025년 4월 트럼프 시대에 또다시 증명됐다. 한국, 중국, 일본 등 80여 개국을 상대로 ‘상호관세’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상호관세 발효일인 4월 9일(현지시간)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장중 4.5%까지 급등하자 중국을 제외하고 상호관세를 90일 유예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나는 채권시장을 보고 있었다. 채권시장은 매우 까다롭다”고 말했다.
미 국채는 짧게는 하루짜리부터 길게는 30년까지 만기가 정해져 있다. 예컨대 액면가 100달러, 액면금리 2%인 10년물 국채를 보유한 투자자는 미 재무부로부터 6개월마다 1달러씩 이자를 받고, 10년 만기 때 100달러를 받는다.
이런 국채는 시장에서 언제든 사고팔 수 있는데 수요와 공급에 따라 현재의 시장 가격이 결정된다. 액면가 100달러인 이 10년물 국채가 현재 시장에서 40달러에 팔린다면 수익률은 약 13% 수준이지만, 수요가 줄어 가격이 30달러로 폭락하면 수익률이 17%로 상승한다. 반대로 공급이 달려 국채 가격이 50달러가 되면 수익률은 10% 전후가 된다. 흔히 ‘국채 가격과 금리는 반대 방향’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금리는 수익률을 뜻한다.
경제가 불확실하고 침체가 예상되면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인 주식 대신 안전자산인 국채, 특히 세계 최강국이자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의 국채에 돈을 넣는다. 미국 주가가 하락할 때 미국 장기 국채 수익률이 오르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4월 9일은 달랐다. 상호관세 규모가 상당히 컸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졌다. 경기 침체로 인한 세수 감소 가능성과 감세정책에 대한 우려가 맞물리면서 재정적자 문제가 부각됐고, 이에 미 채권 수요가 줄었다. 미국은 이미 부채한도(36조1000억달러)에 도달한 상황으로, 재무부 계좌(TGA) 잔고는 거의 바닥났고, 내야 할 기금 등을 늦추는 등의 특별조치로 버티는 중이다. 한국은행 뉴욕사무소는 4월 10일 보고서에서 “시장에서는 7월 전후로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예상한다”고 월가 분위기를 전했다.
헤지펀드들이 국채 현물과 선물의 가격 차이를 노리고 레버리지를 일으켜 거래(베이시스 트레이드)를 하다가 국채 현물 가격이 하락하면서 국채를 판 것도 미 채권 수익률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현금 확보를 위해 국채를 판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미 국채의 상당량을 쥔 외국 기관 등 해외 투자자들이 미 국채를 팔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 투자자들이 미 채권을 팔면 자국 통화로 바꾸면서 약달러 현상이 벌어지는데 실제로 최근 미 국채 수익률 상승과 달러 약세 현상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이에 일본의 기관들이 미국 채권을 팔아치웠고, 이중 상당수가 미 국채로 추정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은 국채를 외국인 투자자들이 사주는 데 매우 의존하고 있다. 미국 내 은행이나 투자자들은 발행되는 모든 국채를 다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서 “미국이 동맹국들을 멀어지게 하거나, 외국인 투자자들이 미국에 투자하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미국에도, 국채시장에도 타격이 된다”고 전했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4월 16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시카고 경제클럽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이날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물가 상승을 초래하고 성장세를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AFP 연합뉴스
트럼프 시대 ‘뉴노멀’ 된 ‘셀 USA’
미국 주가가 떨어지고, 국채 가격도 떨어지고, 달러 가치도 떨어지는 ‘트리플 약세’가 트럼프 2기 첫해 뉴노멀이 됐다. 해외 투자자들은 미국 자산을 팔고 독일 국채 등 해외 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른바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현상이다.
특히 트럼프가 4월 21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계정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향해 “‘미스터 투 레이트(Mr. Too Late)’이자, 중대 실패자(major loser)가 금리를 내리지 않으면 경기 둔화가 있을 수 있다”며 파월 의장의 해임 가능성을 거론하자 달러 가치, 주가, 국채가 또다시 동반 하락했다. 법으로 정해진 의장 임기와 연준 독립성을 우습게 여기는 트럼프의 발언에 시장 참가자들이 미국 자산을 파는 등의 방식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셀 아메리카 거래가 활발해졌다”(월스트리트저널)는 지적까지 나왔다.
시장의 ‘발작’에 부랴부랴 트럼프가 해임 입장을 번복하고,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미·중 무역전쟁이 지속 불가능하며 양국 간의 무역 제한 조치가 조만간 해소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발작을 잠시 잠재웠다. 하지만 시장은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정책 기조가 완화되지 않는 한 여전히 ‘셀 아메리카’ 우려가 남아 있다고 판단한다.
염승환 LS증권 이사는 “트럼프의 말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면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셀 아메리카는 한두 가지 요인만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트럼프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이제 남아 있지 않다는 게 가장 크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필패할 수밖에 없으니 올해 하반기부터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등) 기조가 조금 바뀌지 않겠나. 올해 3분기까지는 ‘셀 아메리카’ 현상이 이어질 수는 있지만, 초장기로 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한편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 기조는 미국이 패권국의 지위를 잃어가는 흐름에서 나온 것으로 미국 달러화와 미국의 지위가 계속 흔들릴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광석 한양대 겸임교수는 “이미 미국은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동맹국을 강력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며 “단기간에 그 지위가 뒤집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는 미국과 달러의 지위 그리고 미국 자산은 안전하다는 가정들이 깨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