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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논썰’의 박용현 한겨레 논설위원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40일도 남기지 않은 시기에 유력 대선 후보의 형사 재판 판결을 선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 판사는 선고를 대선 이후로 미루기로 결정합니다. “판결을 선고할 경우 임박한 대선에 영향을 받거나 또는 영향을 끼칠 의도가 있다는 외관상 오해의 여지(비록 그런 오해가 부당한 것일지라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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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39일도 남기지 않은 시기(4월25일 기준)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상고심 재판에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우리나라 대법원 이야기는 물론 아닙니다. 지난해 미국 대선을 앞두고 뉴욕 맨해튼형사법원의 후안 머천 판사가 내린 결정입니다.

피고인은 도널드 트럼프. 트럼프는 성추문 입막음용 돈 관련 장부 조작 혐의로 이미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재명 후보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배심원단이 유무죄를 판단하고 유죄인 경우 판사가 별도로 재판을 열어 형량을 선고합니다. 이미 유죄로 결론 난 상태에서 판사는 합리적 이유 없이 형량 선고를 지체하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머천 판사는 대선 이후로 선고를 연기했습니다.


1. 미국 법원이 트럼프 선고를 대선 이후로 미룬 이유

선고 연기의 핵심 이유는 앞서 인용한 결정문에서 보듯 ‘판결 자체에 대한 신뢰 확보’였습니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머천 판사는 결정문에서 “선고 절차를 그대로 진행할 경우 대선을 41일도 남기지 않고 선고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상황”이라며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유리하게 하거나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선고를 했다는 그 어떤 기미조차 떨쳐버리기 위해 선고를 연기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개인적 사정이나 일정을 이유로 선고를 연기해주는 절차적 관행에 비춰 트럼프를 특별 취급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머천 판사는 “법원은 공정하고, 불편부당하며,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기관”이라며 “선고 연기는 가볍게 내린 결정이 아니며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결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 대법원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이재명 후보에 대한 선고를 내린다면 머천 판사가 지적한 대로 판결의 의도와 정치적 배경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절차적으로도 이례적입니다. 대법원장이 이 재판을 직권으로 전원합의체에 넘긴 것도 그렇고, 통상 한달에 한번 진행하는 전원합의체 회의를 일주일 새 벌써 두차례나 연 것도 관행과 다른 ‘속도전’입니다. 판결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6·3·3 원칙’을 지키기 위한 조처라는 해석도 나옵니다. 선거법 사건은 1심 6개월, 항소심 3개월, 상고심 3개월 안에 끝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규정(제270조)입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취임 뒤 이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사문화됐던 원칙을 유독 이재명 후보 재판에만 철저히 적용하려는 것은 이 후보만 특별 취급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이 원칙의 취지는 선거법을 위반해 당선된 경우 재판이 길어지면 나중에 당선무효형을 받더라도 해당 공직을 그만큼 오래 유지하게 되는 불합리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법원의 ‘선거범죄사건의 신속 처리 등에 관한 예규’에도 ‘당선 유·무효 관련’ 사건에 대해 재판 기간을 집중 관리하도록 규정돼 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이와 달리 ‘낙선’한 경우입니다. 사문화됐던 조항을 그 취지와도 맞지 않는 낙선자에게 유독 철저히 적용한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법부 신뢰의 관점에서 ‘6·3·3 원칙 지키기’와 ‘대선 직전 유력 후보에 대한 선고’ 가운데 어느 게 더 중한지 전혀 고민이 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대선 직전 유력 후보에 대한 선고’를 무리하게 강행하는 데 따른 정치적 파장과 사법부 신뢰 훼손은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여기에 비하면 ‘6·3·3 원칙’은 저차원적이고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6·3·3 원칙’의 비정상적 적용은 사법부 불신만 키울 뿐입니다.

무엇보다 선고가 내려지더라도 정치적 고려 없는 공정한 판결로 받아들여질리 없다는 게 중요합니다. 대법원이 사법부 불신이라는 깊은 수렁을 파는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법원이 대선 전 선고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2. 대법원이 마주한 묵직한 질문, ‘속도전’으로 답할 수 있나

시기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게 판결의 내용입니다. 이재명 후보 사건은 ‘선거라는 정치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를 얼마만큼 충분히 보장할 것인가’, ‘선택적 기소를 통한 검찰의 정치적 개입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등 여러 면에서 민주주의의 본질과 직결된 쟁점을 품고 있습니다.

선거 기간의 허위사실 공표를 일괄적으로 형사처벌하는 것은 선거 과정의 자유로운 토론을 위축시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허위사실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닙니다. 이를테면, 투표 날짜나 장소, 방식 등에 관해 거짓 사실로 유권자를 혼란에 빠뜨린다면 이는 선거의 내용이 아니라 선거 절차를 훼방하는 게 됩니다. 이런 허위사실 유포는 당연히 제재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거의 내용, 즉 후보자에 관한 정보나 정치적 주장은 훨씬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후보자의 학력, 경력, 재산 등 명확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허위 주장은 제재를 가하더라도 선거 활동이 위축될 위험성이 적습니다. 반면, 보기에 따라 허위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는 말, 진실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말을 처벌한다면 선거 활동은 대단히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말과 말이 부딪치는 게 선거인데 말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후보자가 한마디 한마디를 스스로 검열해야 한다면 자유로운 선거가 될 수 없고 유권자의 선택도 불완전해집니다.


더욱 큰 문제는 선거 이후 검찰이 자의적·선택적으로 기소할 수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검찰이 누구는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해 기소하고 누구는 허위사실이 아니라고 불기소하면 그만입니다. 검찰은 실제로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이재명 후보는 기소하고 윤석열 후보는 불기소했습니다.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누구는 유죄, 누구는 무죄가 될 수 있습니다. 선택적 기소로 인해 당선이 무효로 되거나 피선거권을 박탈당한다면, 유권자의 정치적 선택을 검찰과 법원이 좌우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후보자를 허위사실로 비판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오하이오주 선거법이 위헌 판결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법원은 판결문에서 “우리는 정치적 진실을 공권력이 결정하는 걸 원치 않는다. 공권력은 이런 권한으로 비판세력을 탄압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결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선거 때일수록 표현의 자유를 더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는 건 미국 연방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선거에서 허위 주장이 나오면 상대 후보가 반박하고 이를 유권자가 판단하는 게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관점입니다.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가져갔으면 이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해 판결로써 묵직한 대답을 내놔야 합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무죄 판결을 통해 이런 질문에 충분히 답하려 노력했다고 평가합니다. 몇마디 말을 확대·유추 해석해 유력 대선 주자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건 민주주의 과정의 왜곡입니다. 이 기소가 검찰이 검찰 출신 대통령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집요하게 벌인 투망식 수사의 결과였다는 점까지 더해보면, 민주주의의 파괴에 가깝습니다. 이런 기소와 재판을 허용해도 될 것인가. 대법원 전원합의체라면 이 중대한 질문에 대해 항소심 판결을 뛰어넘는 논리와 지혜를 판결에 담아내야 합니다.

지금처럼 속도전을 펼친다면 충분한 숙고를 통해 무게감 있는 판결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례적인 전원합의체 회부로 평지풍파를 일으켜놓고 고작 한두가지 꼬투리를 잡아 항소심을 파기환송한다면 대법원으로서 창피한 일입니다.

대법원이 대선 전 선고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3. 대선은 4428만명 참여한 배심재판, 판사는 결과 기다려야

사법부는 헌법상 3권 분립의 한축을 이루지만, 입법·행정부와 달리 선출되지 않은 권력입니다. 우리는 주권자인 시민이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원단 제도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사법부 권력은 주권자의 선택으로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과정을 철저히 존중해야 합니다. 주권자가 행하는 고도의 정치적 과정에 대해선 사법적 판단을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20일 오후 울산광역시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영남권 합동연설회에서 이재명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대선이 임박한 지금, 주권자들이 행정부 권력을 선택하기 위한 틀이 이미 짜여졌습니다. 그동안의 정치 과정을 통해 대통령 후보군이 형성됐습니다. 현재의 대선 구도 자체가 그동안 형성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형사적 문제를 안고 있는 후보의 경우 그동안의 재판 과정을 유권자들이 모두 지켜봤습니다. 유권자들은 여러 요소들로 각 후보들을 평가해왔고 사법적 문제도 그 일부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찌보면 대선 자체가 4428만명(22대 총선 기준)의 거대 배심원단이 참여하는 배심재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그 결과를 기다리고 존중해야 합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특정 후보의 재판 선고가 이뤄지는 것은 사법부가 주권자 위에 군림해 주권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법원이 대선 전 선고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번째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어떤 이유에선지 선고를 강행할 요량이라면, 최소한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전원합의체에서 다수결이 아닌 전원일치로 판결이 나와야 합니다. ‘일부 대법관’의 뜻으로 판결이 내려진다면 가뜩이나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법리적 정당성마저 허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최고 법관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리는데 과연 누가 그런 판결에 승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는 무덤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 파면 결정에서 전원일치 합의를 이끌어낸 것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트럼프 재판을 보겠습니다. 결국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뒤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형량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유죄이지만 형벌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선고였습니다. 머천 판사는 “모든 양형 요소들을 감안했으나 피고인이 대통령으로서 법적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이 다른 요소를 압도한다”고 밝혔습니다. 최대 징역 4년까지 처할 수 있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대통령직을 수행을 위해 형벌을 부과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민주적 권력형성 과정에 대한 존중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재명 후보는 현재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상태입니다. 트럼프 재판에서 미국 사법부가 보인 모습보다 더욱 사법적 자제가 이뤄져야 마땅합니다. 대선 이후 마무리되지 않은 재판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도 사법부가 헌법적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건 지금 당장은 사법부가 아닌 주권자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기획·출연 박용현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연출·편집 조소영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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