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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폐업 등 사유 아니면 이직 못해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임금 삭감
사실상 최저임금 수준 돈만 받아
이득 보는 건 원청과 브로커들뿐
“갈 곳이 없어졌어요.”

지난 15일 울산광역시 북구 울산이주민센터에서 만난 스리랑카인 무디다 마노즈(45)는 이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그는 2023년 12월 입국해 HD현대중공업에 1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조선 용접공으로 일반기능인력 비자(E-7-3)를 받고 3년까지는 일할 수 있다고 해서 한국에 왔지만 1년 반 만에 갈 곳을 잃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1년 더 계약을 연장했지만 같이 일하던 동료가 2월 말 사직원을 제출했고, 팀장님이 “너도 다른 곳으로 가려면 가”라고 해서 이직서에 사인했다. 그의 사직은 ‘자발적 퇴사’로 처리됐다. 다른 회사로 이직이 가능한 줄 알았지만 E-7-3 비자는 회사의 휴·폐업 등 사유가 아니면 이직이 불가능해 새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 그의 사직이 8번의 결재를 거쳐 확정되는 동안 누구도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인 압둘 라티프(45)는 2023년 입국해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와 2년을 계약했다. 회사는 6개월 후 문을 닫았고, 2024년 2월 다른 하청업체로 옮겼다. 또다시 업체 사장은 다른 곳에서 일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압둘은 “필요한 서류를 다 줄 수 있냐”고 물었고 사장은 ‘이직 동의서’를 써줬다. 그러나 출입국관리소에 확인해 보니 ‘이직 동의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서류였다. E7 비자는 사업장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무디다 마노즈(왼쪽), 방글라데시 국적 이주노동자 압둘 라티프가 지난 15일 울산광역시 북구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체류허가 신청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25.04.15. 정효진 기자


270만원이라 했지만 실제 받은 건 ‘최저임금’
식대·기숙사비 등 ‘외국인 생활지원비’ 공제

두 사람은 2011년 E9 비자로 한국에 와서 일했던 적이 있고, 한국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다시 한국에 와서 돈을 벌고 싶어서 용접 일을 배웠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조차 불투명했다. 압둘은 한 달에 27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해서 방글라데시의 대행업체에 비자 비용만 2000만원을 주고 한국에 들어왔다. 막상 와 보니 실제 손에 쥐는 월급은 206만원이었다. 압둘이 사인한 근로계약서에는 250만원이라고 돼 있었지만 식대와 기숙사비 등 ‘외국인 생활지원비’를 공제한 금액을 받았다.

‘외국인 생활지원비’는 조선업 노동 현장의 대표적 모순 중 하나였다. 최초 E7 비자로 조선업계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국민총소득(GNI)의 80% 수준의 임금을 보장받았다. 그러자 지난해부터 하청노동자들의 임금과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이 큰 차이가 없게 됐다. 회사는 ‘외국인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임금을 깎아서 대응했다. 마노즈 역시 지난해 270여만원을 받아야 했지만, 회사는 생활지원비 명목으로 통상임금의 20%인 50여만원을 공제했다. 세금 등을 떼면 사실상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이다.

2년 전부터 HD현대중공업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를 무료로 제공한다. 협력업체, 직영 노동자 모두 무료로 먹는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만 걷는 생활지원비가 ‘체불임금’이라고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다. 노동부는 법무부 규정 들어 통상임금의 20% 선에서는 공제할 수 있다며 “문제없다”는 답을 내놨다. 노조는 지난해 10월 다시 “근로기준법상 국적 차별”이라는 진정을 넣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라티프는 회사를 그만둔 후 사장이 이면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한국에 오래 있었던 방글라데시 친구가 출입국·외국인 사무소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서류에는 압둘의 급여가 270만원으로 보고돼 있었던 것이다. 근로계약 위반으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자 회사가 노동부에 제출한 근로계약서는 또 달랐다. 그에게는 3가지의 근로계약서가 있었던 셈이다.

압둘이 회사에 사인한 근로계약서. 월 통상임금이 25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울산 이주민센터 제공


압둘이 출입국·외국인 사무소에 정보공개청구해서 받은 근로계약서. 월 통상임금이 27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울산 이주민센터 제공


법무부, “내국인 보호” 위해 최저임금으로 하향
내국인 보호는커녕 하청노동자들 저임금 고착

법무부는 아예 지난 1일부터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을 변경해 이주노동자의 임금을 최저임금 수준으로 낮췄다. 법무부는 “환율 급등 시 내국인 임금보다 기준이 높아져 역차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며 “저임금 외국 인력 남용을 방지하면서 국내 기업의 외국 인력 활용을 과도하게 규제하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 임금 기준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2023년 1인당 GNI가 전년 대비 11.2%나 급등해 조정했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은 것은 하청노동자들의 저임금 고착화로 이어졌다. 김규진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정책기획실장은 “기간제 노동자, 원청 대기업에 속한 하청 노동자, 이주노동자 모두 최저임금으로 하향평준화되고 있다”며 “기업들이 인력이 부족하다고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부는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아서 조선업으로 신규 인력이 오지 않는다는 근본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숫자가 늘면서 현장에선 한국인 노동자들과의 소통 문제도 간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현대중공업에는 30개국 4300명 이상의 이주노동자가 현장에 투입돼 일하고 있지만 통역원은 충분치 않다. 현장에서 번역기를 통해 소통하기도 하지만 공정별로 아예 이주노동자들끼리만 팀으로 묶어 일하도록 하고 있다. 김 실장은 “자잘한 부상이 잦고 위험한 순간이나 돌발상황에 대처가 어렵다”며 “큰 사고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압둘 라티프가 지난 15일 울산광역시 북구 울산이주민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5.04.15. 정효진 기자


이득을 보는 측은 원청 대기업과 송출국 브로커뿐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본국 송출업체에 기술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1500만~3000만원의 비용을 내고 입국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이 교육은 큰 의미가 없다. 법무부가 E-7-3 비자 요건을 완화하면서 입국한 터라 숙련도가 높지 않은 상태로 취업하기 때문이다. 김 실장은 “어차피 다시 교육해야 하는데 E-7-3 비자는 교육을 받고 들어온다는 명분으로 이주노동자들에게 큰 빚을 지게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을 경찰이 잡아가는 나라니까
우리 문제도 해결할 방법 찾을 수 있겠죠?”

마노즈는 “E7 비자 받은 뒤로 만난 사람들은 다 나쁘다”고 했고, 압둘은 “다녔던 회사 중 지금 회사가 제일 안 좋다”고 했다. 압둘의 회사 사장은 일하다 철판이 떨어져 압둘이 발을 다쳤는데 “킥보드를 타다 다쳤다”고 거짓말하기도 했다. 마노즈는 “오늘이 스리랑카의 설날인데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지 못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배를 만들어서 외국에 파는 한국의 큰 회사라면서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무디다 마노즈가 지난 15일 울산광역시 북구 울산이주민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던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정효진 기자


일터를 잃은 이들에게 남은 방법은 D10(구직활동 비자)를 받은 뒤 다시 E7 비자를 받아 조선업에 취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E7 비자를 받으려면 조선사 사용자단체 ‘조선해양플랜트협회’ 추천서 등의 서류가 필요해 쉽지 않다. D10 비자 체류 기간은 보통 6개월이라 그 뒤엔 어떻게 해야 할지도 걱정이다. 마노즈는 말했다. “단속할까봐 무서워서 쉬는 날에는 집에만 있어요. 한국은 대통령이 잘못하면 경찰이 잡아가는 나라인데 우리 문제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겠죠?”

김현주 울산이주민센터장은 “인구 문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온 뒤 현장에서는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해도 ‘사람이 왔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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