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가 일대 원룸 월세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난 2월 19일 서울의 한 대학교 앞 알림판에 하숙 및 월세 관련 정보가 붙어 있다. 성동훈 기자
서울 서대문구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는 A씨(33)는 다음달 계약 갱신을 앞두고 집주인에게 당혹스러운 제안을 들었다. 지난 2년새 전세 보증금이 1억원 가량 올랐으니 기존 보증금 2억5000만원에 월세 20만원을 추가하는 반전세(보증부 월세) 계약을 새로 체결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A씨는 ‘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에 의해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있다. 월세 20만원 인상을 계산해보면, 임대료 인상율은 5%를 훌쩍 초과하기 때문이다. A씨는 그러나 앞으로 전셋값이 더 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월세를 내고 청구권 사용을 2년 뒤로 미루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최근 전세의 월세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집주인과 세입자간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연립·다세대 등 비아파트 시장뿐 아니라 아파트 임대차 시장에서도 월세 거래 비중이 커지고 있어서다. 특히 서울 아파트 시장은 입주물량 축소와 전세대출 규제 등의 영향으로 전세 매물이 거의 사라져 당분간 ‘반전세’ 또는 월세 거래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동시에 아파트 월세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 주거비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세의 월세화는 거스르기 힘든 상황이지만, 저소득층 월세 가구의 과도한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바우처 제공 등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반전세·월세 60% 넘어…희귀해지는 ‘전세’
18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2월 전국 임대차 거래 중 월세(보증부 월세 등 포함) 비중은 61.4%였다. 월세 비중이 처음으로 40%를 넘겼던 2015년 이후 10년 만에 60%를 돌파한 것이다. 올해 2월까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임차인 10명 중 6명 이상이 월세를 택했다.
임대차 시장이 월세 중심으로 재편되는 ‘전세의 월세화’는 2013년 이후 이어진 오래된 현상이지만, 최근의 월세화는 빌라 등 비아파트를 넘어 아파트 임대차 시장까지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강력하다.
국토부에 따르면 올해 2월까지 전국 아파트 임대차 거래건 중 월세 비중은 44.2%로 2023년 43.9%, 2024년 42.2%보다 상승했고, 서울 아파트로 한정하면 이 기간 월세 비중이 51.1%로 전세(48.9%)를 앞질렀다는 분석 결과(우리은행 WM영업전략부)도 있다.
거래유형별 매물을 봐도 서울에서 전세는 점차 희귀해지고 있다. 부동산 정보업체 아실에 따르면 18일 기준 서울의 전세 매물은 2만7977건으로 1년 전(3만750건)보다 9.1% 줄어들었다. 반면 월세 매물은 1만9983건으로 전년(1만8062건) 대비 10.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의 전세 매물이 희귀해진 것은 신규주택의 공급 부족, 전세대출 규제 확대, 토지거래허가제 확대 지정 등 여러 이유가 맞물리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또한 전세의 월세화가 더욱 빨리 진행된 건 금리 환경과 전세사기 여파도 컸다. 임대인의 경우 과거처럼 전세보증금 목돈을 받아 정기예금에 넣어둬서 얻는 이익보다 월세로 현금 흐름을 만드는 내는 게 더 이익이 된다. 임차인 역시 보증금 미반환 위험에 대비하거나, 목돈 마련에 대한 부담으로 월세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전세보증 한도 축소·조건부 전세대출 제한 등 대출 규제가 강화된 영향도 있었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수요가 맞물린 것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입주 물량은 줄어드는데 전세대출 금리는 떨어지면서 전세 수요 대비 공급이 적은 상황”이라며 “아파트 시장에서는 여전히 전세를 안고 매매하는 갭투자 수요가 남아 있기 때문에 국내 아파트 시장에서의 월세화는 사실상 변형된 전세인 반전세(준전세)로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월세, 주거비 부담 늘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부동산에 전세 및 월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한수빈 기자
문제는 월세로 전환하면 임차인 입장에서 매달 고정적으로 주거 비용이 나가 가처분 소득이 줄어드는 부담이 생긴다. 특히 저소득층의 부담은 더욱 커진다.
이미 아파트 월세가는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 2월 서울 아파트 월세지수는 전월 대비 0.6포인트 상승한 121.5로 KB부동산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15년 12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지수는 전용면적 95.86㎡ 이하 중형 아파트를 대상으로 조사한다.
통계청이 지난 2월 발표한 ‘2024년 4분기 가계동향조사’를 보면, 월세 등 실제 주거비는 1년전보다 12.9% 증가했다. 2020년 이후 5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 폭을 기록했다.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의 최신 자료(2023년 기준)인 월소득 대비 주택임대료 비율(RIR=중위월임대료/중위월가구소득)을 보면, 수도권의 경우 2023년 20.3%로 2020년(18.6%)보다 상승했다.
오는 6월 전세계약 만료를 앞둔 B씨는 “2년 전 보증금 수준으로는 지금 구할 수 있는 전셋집이 없다”면서 “월세로 돌리기엔 너무 비싸서 전세대출을 더 받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고령화와 1~2인 가구 증가 등 인구구조 변화를 고려하면 월세 선호 현상을 되돌리기는 힘들어 이에 맞춰 제도도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취약계층의 주거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층 월세 가구에 주택 바우처 지급 확대 등을 고려해볼만 하다.
전세보증보험 등의 제도적 지원을 축소하는 게 우선이라는 시각도 있다. 송인호 KDI 경제정보센터소장은소장은 “지금까지 전세제도가 유지된 것은 시장의 선택이 아닌 정부의 개입 때문”이라면서 “전세보증보험 등 전세제도 유지를 위해 쓰던 정부의 주거지원 예산을 이제는 취약계층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월세 중심으로 임대차 시장이 재편된다면 임차인의 가처분 소득이 크게 감소할 수 있다”면서 “월세 세액 공제 제도를 손질해 월세로 쓴 비용의 일부를 세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바우처 제도 등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