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박찬욱 감독(가운데)는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 사진=연합뉴스
프랑스의 도시 칸(Cannes)은 한국 국민에게 매우 친근한 곳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칸 국제영화제’가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이다 보니 전 세계 사람들이 잘 알기도 하지만 K무비의 활약 덕분에 한국인들은 칸을 더욱 가깝고 반갑게 여긴다. 칸의 레드카펫을 밟은 영화인들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뿌듯해하기도 했으며 한국 영화와 감독, 배우의 수상 소식이 들려올 때면 축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5월 13~24일 개최되는 ‘제78회 칸 국제영화제’에선 K무비를 단 한 작품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국 장편 영화가 칸 영화제의 공식 부문과 비공식 부문에서 모두 초청받지 못한 것이다. 칸 초청작 0편 기록은 1999년 이후 무려 26년 만의 일이다. 칸에서 들려온 비보에 한국 영화 시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는 단순히 특정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으며 시장 자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심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영화제, 글로벌 시장에서 K무비가 지워지기 시작한 걸까. K컬처의 다양한 영역 가운데 한국 영화는 명실상부한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 주요 영화제를 휩쓴 것은 물론 오스카와 같은 글로벌 시상식에서도 수상의 영광을 안지 않았던가. K무비가 작품성과 상업성을 골고루 갖춘 뛰어난 영화임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느새 과거형으로 바뀌고 있다. 해외에서만 K무비가 지워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내 영화 시장의 어둠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길이 끊어진 것은 물론 최근엔 주요 기대작들마저 흥행에 실패하면서 K무비에 대한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2025년 1위 한국 영화 관객이 200만
칸 국제영화제에서 K무비의 최고 영광의 순간은 단연 2019년이라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당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이어 2020년엔 오스카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 100년사에 길이 남을 영예를 안았다. 2022년엔 칸에서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송강호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경쟁 부문에 오르지 않을 때도 매년 2~3편의 작품이 꾸준히 비경쟁 부문에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올해 0편이 된 배경으로 일각에선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와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후반 작업 중이라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하지만 올해에도 여러 감독들이 칸 진출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이 기록은 분명 커다란 경고음이라 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오스카, 골든글로브 등 주요 시상식에서 수상 소식을 알린 한국 영화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K무비의 올해 국내 성적표도 처참한 수준이다. 2025년 1월 이후 개봉한 한국 영화 가운데 관객 수 1위는 ‘히트맨2’로 254만 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에 ‘파묘’, ‘범죄도시4’와 같은 1000만 영화가 나온 것과도 대비된다. 게다가 1위 작품조차 관객 수가 200만대에 그쳤다는 점에서 시장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최근 개봉한 ‘승부’는 186만 명, ‘검은 수녀들’은 167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작품들 이외에 100만 관객을 넘은 한국 영화는 없다. 워너브라더스가 투자·배급한 미국 영화에 해당하지만 엄연히 한국을 대표하는 봉준호 감독이 만든 ‘미키 17’마저 국내 관객 수는 301만 명에 불과하다. 2025년 개봉작은 아니지만 지난해 연말에 개봉했던 ‘하얼빈’도 215만 명에 그쳤다. 그동안 한국 영화 시장은 부진을 거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작들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기대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 인기 배우의 작품들이 나와도 관객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 됐으니 말이다.
K무비가 다시 호명되려면
잘나가던 K무비에 제동이 걸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다른 나라와 비슷하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중심으로 급속히 시장이 재편된 것이다. OTT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관객들은 극장으로 쉽게 발길을 돌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한국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비슷하게 일어난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영화가 유독 국내외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가 올해 칸에 초청받지 못한 사이 그 빈자리를 일본 영화들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세계 시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K무비는 왜 이토록 큰 위기에 봉착한 걸까?
한국 관객들의 영화 사랑은 지극히 크고 깊은 편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 수는 2억2667만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자국 영화에 대한 소비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이후 100년이 넘도록 한국 관객들은 한국 영화를 꾸준히 감상하고 지지했다. 하지만 이처럼 안정적인 상태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대작을 위주로 거액의 투자금이 몰리면서 점차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신 과거 흥행작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 작품들이 많아졌다. 기존의 흥행 공식을 따라가는 안일한 태도가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코로나19 이후 갑작스럽게 시장이 위축되면서 과감한 도전을 더욱 망설이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 수는 2019년의 절반 수준인 1억2313만 명에 그쳤다.
영화 시장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간 규모의 영화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은 대작 또는 저예산 영화로 양극화되어 있다. 중예산 영화는 대략 300만~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10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할 대작에 비해 규모는 작아도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냈으며 적절한 실험성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예산 독립영화에 비해 상업성도 갖추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관객과 꾸준히 접점을 만들고 극장을 자주 찾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이젠 대규모 예산이 들어간 작품조차 관객 수 300만 명을 넘기기도 힘들어진 상황이 되어 버렸다. 본래 300만 이상을 타깃으로 했던 중급 영화들이 흥행 부담을 더욱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우려처럼 실제 중급 영화들의 관객 수도 덩달아 줄었다. 대작이 아니어도 입소문을 타고 꽤 큰 화력을 만들어낼 중급 규모의 화제작이 감소하자 한국 영화에 대한 국내외 관심은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악순환이 반복되며 중급 영화에 대한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2019년 실질 개봉작 중 순제작비 30억~100억원이 투입된 작품은 35편이었지만 2024년엔 26편으로 감소했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과 같은 50세 이상 거장들의 뒤를 이을 신인 감독의 부재도 K무비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한다. 시장 환경이 악화일로를 걷다보니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신인 감독들의 진입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신인 감독 발굴과 배출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이 절실한지만 여전히 역부족인 상황이다. 결국 대작-중예산 영화-저예산 독립영화가 모두 전방위로 무너지면서 K무비는 국내외에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투자 방안과 지원책이 시급히 마련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을 찾긴 어려울 것 같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등을 연출한 거장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100만 명이 내 작품을 봤다면 나는 그들이 100만 편의 다른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여러 관객의 관심을 받는 영화의 탄생, 이와 더불어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참신하고 다양한 영화의 탄생이 함께 이뤄져야만 건강한 영화 시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빨리 시장이 회복되어 전 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K무비가 다시 크게 호명되는 날이 찾아오길 바란다.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