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에 남긴 것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친 뒤 가족과 함께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미선 헌법재판관과 남편 오충진 변호사,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부인 이경아 씨. 신소영 기자 [email protected]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헌법재판소를 응원하겠습니다.”
6년의 임기를 마치는 날,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헌재에 남긴 마지막 말은 이랬다. 문 권한대행과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2019년 4월19일부터 2025년 4월18일까지 임기를 모두 마치고 18일 오전 퇴임했다.
이날 헌법재판소 대강당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문 권한대행은 심판정에서의 심각한 표정을 내려놓고 내내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문 권한대행은 퇴임사에서 8명의 동료 재판관과 헌재 파워테니스 동호회, 뚜동회(걷기 동호회), 아내, 형님, 동생, 교장선생님 등 고마운 사람들을 한 명씩 언급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재판관 구성의 다양화, 더 깊은 대화, 헌재 결정에 대한 존중 등 우리 사회가 더 나은 헌재를 만들기 위한 조언도 담았다.
문 권한대행에 이어 퇴임사를 한 이 재판관은 “헌법재판관으로 근무하면서 마음속에 무거운 저울이 하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재판관은 “매 사건마다 저울의 균형추를 제대로 맞추고 있는지 고민했고, 때로는 그 저울이 놓인 곳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근심하기도 했다”며 “그 저울의 무게로 마음이 짓눌려 힘든 날도 있었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헌법재판의 기능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지난 6년을 돌아봤다.
기본권 신장 위해 앞장선 6년…함께 한 ‘소수의견’도 여럿
문 권한대행은 1992년 부산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창원지법 부장판사, 진주지원장, 부산고법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 지역에서 오래 근무한 지역법관 출신이다. 2019년 4월 이 재판관과 함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명으로 헌법재판관에 취임해, 지난해 10월24일 이종석 전 헌재소장이 퇴임한 뒤부터 소장 권한대행을 맡았고, 두 달 뒤인 12월14일 접수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의 재판장을 맡아 파면 결정을 이끌었다.
1997년 서울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이미선 재판관은 서울지법 북부지원, 청주지법, 수원지법, 대전고법을 거쳐, 2019년 4월 역대 최연소 헌법재판관으로 부임했다. 2010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이 재판관은 당시 근로조 조장을 맡아 통상임금 사건 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노동사건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임기 동안 기본권의 실질적 보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고 백남기 농민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경찰의 직사 살수가 국민의 생명권과 집회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재판관 8대 1 의견으로 ‘위헌’ 결정(2020년 4월)을 내렸고,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대해서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2020년 10월)을 했다. 집회시위 자유와 관련해 대통령 관저 인근의 모든 집회를 전면 금지하는 것은 집회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단(2022년 12월)했고,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방송3법, 노란봉투법 입법 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의 결정(2023년 10월)을 내리기도 했다. 아시아 최초 ‘기후 소송’ 판단도 내렸다. 헌재는 지난해 8월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부실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탄소중립기본법 8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특히 두 재판관은 소수자의 기본권이나 국가책임 문제 등에 대해 진보적인 헌법 해석을 내놨다. 지난해 5월 헌재는 대체복무자의 복무장소를 교정시설(교도소·구치소)로 한정하고, 3년 동안 합숙하도록 규정한 현행 ‘대체역의 편입 및 복무 등에 관한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5대 4로 판결했는데, 문 권한대행과 이 재판관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지난 2020년 3월에는 국가배상 책임의 성립요건으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규정한 구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본문 중 ‘고의 또는 과실로’ 부분을 합헌이라고 결정했는데, 이때도 이들은 “청구인들의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임기 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이끌어…‘문형배 열풍’ 화제도
두 재판관은 임기 말인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을 시작으로 총 11건의 고위 공직자 탄핵심판 사건을 심리했다. 지난 4일엔 4개월에 걸친 심리 끝에 역대 두 번째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는 탄핵 선고를 했다.
만장일치 파면 선고를 이끈 재판장 문 권한대행에 대한 관심은 문 대행의 과거 행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가 어린 시절 김장하(81) 선생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장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 선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책 등이 인기를 끌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넷플릭스 인기 콘텐츠에 올랐고, 동명의 영화는 전국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문 권한대행의 ‘어록’도 화제가 됐다. 그는 2007년 카드 빚 때문에 자살하려고 숙박업소를 방화한 혐의로 구속된 30대에게 “‘자살’이라는 단어를 10번 외워 보라. 피고인이 읊은 ‘자살’이 우리에게는 ‘살자’로 들린다. 죽어야 할 이유를 살아야 할 이유로 새롭게 고쳐 생각해보라”고 말하며 집행유예형을 선고했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문 권한대행은 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된 20대 청년에게는 류시화 시인의 시집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환각물질 흡입으로 재판을 받는 20대 청년에게는 책 ‘마시멜로 이야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문 권한대행이 서평 등을 게시하는 개인 블로그도 화제가 돼, 누적 방문자수가 200만명을 넘었다.
이 재판관은 강원 화천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출신이 아닌 유일한 헌법 재판관이기도 했던 이 재판관은 노동법 전문가로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힘썼다. 윤석열 탄핵 사건에서는 정형식 재판관과 함께 사건의 쟁점 등을 정리하는 수명재판관을 맡았다. 재판 초기 그는 “계엄의 목적이 거대 야당에 경종을 울리고 부정 선거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정리하면 되는가. 이런 목적을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지적했고,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이 재판관은 탄핵 국면의 극심한 대립 속에 김용현 전 국방장관의 변호인단으로부터 직권남용죄로 고발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헌법을 준수하지 않고 무시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헌법의 규범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헌법재판소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헌법질서의 수호·유지에 전력을 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재판관의 마지막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