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앨런 가버(앞줄 가운데) 총장이 지난해 5월 졸업생들과 셀카를 찍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하버드대 앨런 가버 총장은 지난달 말 인도 뭄바이로 출장 겸 휴가를 갈 예정이었지만 출발 직전 취소했다. 이 대학 학보사 하버드 크림슨에 따르면 가버 총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콜럼비아대에 4억달러(약 5520억원)의 보조금을 끊을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약 2주 뒤, 미국 연방정부 대 미국 대학 간의 전쟁은 트럼프 대 가버 총장의 갈등으로 표면화하고 있다.
반트럼프 노선을 명확히 걷고 있는 뉴욕타임스(NYT)뿐 아니라 비교적 객관적 매체들 역시 하버드대와 가버 총장에 주목하고 있다. 주간지 뉴요커는 "하버드는 왜 트럼프와 싸우기로 결심했나"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최고의 부유한 대학이 트럼프와 싸우는 까닭"이라는 분석기사를 냈다.
전쟁은 확전 일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하버드대는 웃음거리(joke)"라며 "명문대 리스트에서 빠져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도 올렸다. 미국 대학들의 재정 건전성의 핵심 요소인 면세 지위 역시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가버 총장은 단호하다. 뉴욕타임스(NYT) 17일자에 따르면 가버 총장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사립대가 무엇을 가르치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지 명령(dictate)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버드대와 전쟁을 벌이는 배경엔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가자지구 전쟁을 두고 미국 내 진보 진영 일부에선 "가자지구의 민간인까지 공격하는 이스라엘이 잘못이다"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들은 지난해 하버드대 등에서 시위와 집회를 열었다. 이를 트럼프 대통령 측이 문제삼은 것이다. 현재 하버드를 포함한 100개 이상의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이 친팔레스타인 시위 관련 조사를 받고 있다. 이중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 중 일부는 콜럼비아대 카트리나 암스트롱 당시 총장을 포함해 사임했다.
가버 총장은 그러나 물러날 기미가 없다. 가버 총장 본인은 유대인이지만, 반유대주의 주장이 캠퍼스에서 금지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유대주의를 용인해서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맥락이라는 게 NYT와 뉴요커 등의 분석이다.
그는 뼛속까지 학자다. 일리노이주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처음엔 경제학으로 학사부터 박사까지 받았고, 나중에 의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스탠퍼드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 소속 병원에서 임상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대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정치적 편향 논란은 지난해 4월 위 사진의 반이스라엘, 친팔레스타인 시위 등으로 불거졌다. AP=연합뉴스
가버 총장의 뚝심은 어디에서 나올까. 뉴욕매거진은 이렇게 정리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 하버드대는 그걸 안다." 제아무리 트럼프라고 해도 임기엔 끝이 있으며, 그가 돈을 무기로 벌이는 싸움에 모두가 수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요지다. 즉 도덕성의 우위와 함께 시간이 가버의 편이라는 것.
가버 총장은 지난해 미국 캠퍼스를 휩쓴 반유대주의 논란의 중심에서 하버드대 수장에 올랐다. 이 싸움이 낯설지 않다는 의미다. 그의 전임인 클로딘 게이 총장은 이 대학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총장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반유대주의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임했고, 관리자형인 가버가 임시 총장으로 낙점됐다. 그는 이어 정식 총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인도 출장을 언제 갈 수 있을까. 당분간은 어려울 듯 하지만 가버 총장의 뚝심은 봄을 지나서도 계속될 것으로 미국 매체들은 전망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하버드대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 앞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로이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