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수사 중지 규정 없어
가해자는 처벌 못하더라도
국가기관의 피해 인정 필요
가해자는 처벌 못하더라도
국가기관의 피해 인정 필요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11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온·세상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사망한 지난달 31일은 피해자 측 기자회견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장 전 의원은 부산의 한 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하던 2015년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53)는 장 전 의원 사망 소식을 들은 아침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소 사건 당시에도 피해자를 대리했다. 유력 정치인이 성폭력 피소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5년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반복된 셈이다. 9년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용기 내 가해자를 고소한 피해자는 장 전 의원의 사망으로 의도치 않은 ‘죄책감’까지 떠안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김 변호사를 만나 인터뷰했다. 피해자가 장 전 의원을 고소한 뒤 언론과 하는 첫 인터뷰다. 그는 성폭력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받았던 피해자의 지난날과 장 전 의원의 사망으로 피해자가 겪게 된 이중의 고통을 설명했다. 진영논리에 따른 공격을 멈추고, 수사기관이 사건 실체를 밝혀야 한다고도 요구했다. 다음은 김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잘못했으면 절차 따라 처벌받는 것이 원칙… 피해자 또다시 고통”
-장 전 의원 사망 후 피해자는 어떤 상태인가.
“가족과 지원단체 등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다. 피해자는 첫날에는 화가 난다고 했다가, 다음날부터는 혼자 있으면 이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자꾸 든다고 했다. ‘이런 죄책감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나의 20대가 이 기억으로 얼룩져버렸는데, 범행도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해 버렸고 종결도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해 버렸다’고도 말했다. 피해자는 성폭력 사건 후 9년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제서야 비로소 좀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어렵게 용기를 내 고소를 했는데, 가해자는 조사 한 번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다.”
-피해자가 고소에 이르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피해자는 2022년 2월 상담 예약을 잡고 사무실에 처음 찾아왔다. 당시 장 전 의원은 현직 다선 의원이었고 ‘윤핵관’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당시 피해자는 고소를 적극 검토했으나 장 전 의원의 권력이 두렵다며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가 피해자가 지난해 하반기 다시 사무실로 찾아왔다. 여전히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로 보였다. 고민 끝에 고소를 결심했다. 준강간 공소시효도 올해 11월로 끝날 예정인 점도 고려했다. 사건 당시 피해자의 속옷 등에서 채취된 증거물에서 남성 DNA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 무렵 정보공개청구를 거쳐 확인했다. 피해자는 고소 후 3차례에 걸쳐 고소인 조사를 받았고, 피의자인 장 전 의원은 한 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다.”
-장 전 의원이 사망하기 전 수사 진척 상황이 어땠나.
“수사기관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대부분 확인했다. 피의자가 자신의 신체 증거물을 제출하거나, 제출하지 않으면 압수수색을 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있는 남성 DNA와 일치하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상태였다. 장 전 의원이 조사를 받으면서 변호사와 상의해 보고 (제출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다고 들었다.”
-대리하던 사건의 유력 정치인 가해자가 또다시 사망했다. 장 전 의원 사망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나.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정해진 절차를 지켜야 한다. 잘못을 하면 수사를 받고 기소가 되면 재판을 받고 최종적으로 혐의가 인정되면 처벌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으로 피고인의 인권도 최대한 보장한다. 장 전 의원은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한 공인이다. 공인이 법치주의 국가의 수사 절차를 따르지 않는 것을 저는 반칙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위가 피해자에게 어떤 추가적 고통을 주게 될지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그럴 수 없다.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판단했지만 감정적으로는 마음이 힘들다. ‘나한테 책임이 있나, 내가 그 사람을 궁지로 몰았나, 피의자들이 자꾸 사망하면 이제 앞으로 어떻게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하나’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의자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피해자나 대리인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 선택의 책임은 그에게서 찾아야 한다.
SNS에는 합의를 하지 왜 고소했냐는 비난도 있더라.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고소당한 뒤 겪게 될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것이 피해자 대리인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리인인 나의 역할은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것이 맞는지, 피해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확보할 수 있는 정황증거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피고, 피해자가 고소 이후 맞닥뜨려야 하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맞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부다.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했던 지난 활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담당하는 사건의 상대방이 사건을 진행하는 도중에 사망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격이고, 마음의 부담이 되는 일이다. 대리인인 제가 이럴진대 피해자는 어떻겠나.”
피해자 대리인인데 “김재련 뭐하냐” 공격… “정치적 유불리로 피해자 이용”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11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온·세상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는 박 전 시장 성폭력 사건 피해자 대리 후 갖은 공격에 시달렸다. 김 변호사가 피해자를 꼬드겨 박 전 시장을 고소했다거나, 특정 정치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성범죄 사건을 기획했다는 음모론이 나왔다. 장 전 의원이 피소당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박원순 사건에 앞장섰던 김재련과 여성단체는 왜 장제원 사건에 침묵하느냐”는,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비난이 이어졌다. 김 변호사가 장 전 의원 사건 피해자의 법률대리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대 진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 전 의원은 피소 사실이 보도되자 ‘갑작스러운 고소 제기 뒤에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피해자의 고소에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지금 김재련은 뭐 하냐’는 내용의 악성 댓글을 혹시 보았나.
“페이스북 메신저로도 욕설이 많이 왔다. ‘또 시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장제원이 이런 행동을 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여성단체는 뭐 하냐, 김재련은 뭐 하냐’라고 한다. 이들은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안위를 걱정하거나 권력을 이용해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한 가해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진영논리로 사고가 세팅되어 있다. 언제든지 위력 성폭력 피해자를 자신들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양측 모두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사건을 소모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민주당이 장 전 의원 사건에 대해 더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박 전 시장 사건 당시 2차 가해를 했던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민의힘은 박 전 시장 사건 때 민주당에 강하게 조치를 요구했지만 본인 당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반성이 없다. 박 전 시장 사건 때는 보수 성향 유력 언론사에서 기사를 많이 썼는데, 이번 사건에서 그 언론사는 기사를 거의 싣지 않았다. 언론도 성향에 따라 위력 성폭력 사건을 악용하는 셈이다. 가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유리한지,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유리한지 철저한 진영논리로만 접근하고 있다. 유감스럽고 씁쓸하다.”
-성폭력 사건을 진영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피해자와 우리 공동체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나.
“장 전 의원 사건의 피해자가 처음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 반복해서 했던 질문이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다시 직장은 얻었는지, 일은 하고 있는지.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는 이제 좀 괜찮아졌는지. 다시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그들이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피해자는 그간 위력 성폭력 피해자들이 어떤 2차 가해에 시달리는지 다 알고 있었고, 본인도 그들처럼 이름이 드러나고 가족들까지 공격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권력형 성범죄의 본질은 진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에 있다. 그럼에도 진영논리에 따라 피해자를 응원하기도 하고 공격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런 행태가 계속된다면 정치인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양쪽 진영 중 어느 한 측으로부터는 공격당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를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데, 특정 진영의 2차 가해들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피해자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권력을 이용한 성착취 범죄는 언제든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 이미 발생한 사건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 어느 한쪽 진영으로부터는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면, 어떤 피해자가 용기 내서 고소를 할 수 있겠나.”
-정치인들이 이번에도 장 전 의원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고인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고인을 애도할 수는 있다. 언론의 질문을 받았을 때 고인과의 생전의 추억이나 고인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언급을 할 때는 ‘수사절차를 따르지 않아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등의 언급이 선행되는 것이 공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지자체장은 ‘이런 모욕을 견디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취지로 말했던데, 그 말이 오히려 더 모욕적으로 들렸다. 그 분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장 전 의원이 사망하자 페이스북에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 수도 있었으련만 모욕과 수모를 견딘다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라고 썼다.)
“수사기관 사건 실체 밝히고, 대중들도 피해자 상처 가늠해봤으면”
피해자는 9년 만에 용기를 내 장 전 의원을 고소했지만, 가해자를 기소해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수사기관에 의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기도 어려워졌다. 경찰은 14일 장 전 의원 사건을 종결하고, 피의자 사망으로 수사 진행이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한다는 내용의 통지를 고소인 측에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피해자를 지원해왔던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등은 “수사기관이 피의자 사망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한다면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며 수사 결과를 공개하라고 요구해왔다. 피해자도 단체를 통해 “가해자의 도피성 죽음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수사가 중단되면 피해자는 어떤 추가 피해를 입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사기관이 범죄 혐의에 대한 실체적 판단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피해 회복에 있어서 차이가 크다. 박 전 시장 사건 때도 경찰에 휴대전화를 포렌식해서 복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복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박 전 시장이 사망했다는 이유로 중지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는 지금까지도 피해자가 아니라는 취지의 공격을 받고 있다.
수사기관에서 관련 증거자료 및 피해자 진술 등을 종합해 혐의 유무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피해자 권리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공소권 없음’ 규정은 피의자 사망 시 최종적으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망한 즉시 수사를 중지하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 수사기관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 진행 상황이나 수사 결과를 브리핑하는 경우가 있다. 수사 중 피의자가 사망한 경우도 그런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피해자의 회복과 재발 방지에 기여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정치인들이 더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진영 논리로 피해자 공격에 앞장서는 사람들을 향해 정당 관계자들로부터 ‘멈추라’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나와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가해자 유족이 고인을 대신해 피해자에게 유감을 표명해주고, 피해자는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피해자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유족들도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회복적 절차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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