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추궁 넘어 대통령 권한행사 기준 제시한 헌재 결정
선고 생중계 보며 마음 졸인 시민들 “권력 사유화 안돼”
선고 생중계 보며 마음 졸인 시민들 “권력 사유화 안돼”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2월 1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 등 위촉장 및 임명장 수여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주간경향]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은 12·3 비상계엄의 위헌·위법성을 확인하고 대통령직을 박탈해 헌법질서를 회복한 의미가 있다. 동시에 이 결정은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할 때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이는 계엄 이후 선출될 대통령의 자격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뜻하기도 한다.
헌재가 이번 결정에서 가장 강조한 점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주의다.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제2항)고 규정한다.
헌재는 “국가권력의 근원과 주체는 국민”이라며 “국민만이 국가의 정치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고, 국가권력은 특정 계급이나 집단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국회와의 대립에서 벗어날 의도만으로 계엄을 선포한 것은 개인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을 배신한 행위라는 의미다. 특히 헌재는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뿐 아니라 지지하지 않는 국민과도 ‘대화’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번 결정을 지켜본 시민들은 “다음 대통령은 반드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야당과 대화·타협했어야”
헌재가 선고한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을 살펴보면 “국민이 주권자”라는 대목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대통령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국가기관은 그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헌재는 국회가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민주국가를 실현하는 대표기관이라고 했다. 야당을 무시하는 것은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회의 ‘다원적 인적 구성’은 그 전제다. 다양한 정치적 이념과 가치관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존재할 수 있고, 공적 사안에 대해 각자의 대안과 해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는 정당이 국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보장하는 게 민주주의 절차다. 이 과정에서 정당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반박하면서 ‘논리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헌재는 야당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했다. 헌재는 “대통령이나 여당과 다른 정치적 이념과 가치관을 추구하는 야당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반드시 보장돼야 할 정당 활동에 속한다”고 했다.
지난 4월 4일 서울 종로구 안국역 인근에서 ‘윤석열 8 대 0 파면을 위한 끝장대회’ 참가자들이 헌법재판소 선고를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재원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여러 건의 탄핵소추를 제기하고, 법률안·예산안 심의를 통해 정부를 압박했더라도 이것이 계엄을 선포할 정도의 중대한 위기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헌재는 “(야당이) 헌법상 보장된 정당의 자유를 행사한 것”이라고 했다. “국정운영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됐다고 하더라도 이는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한국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는 경우 야당이 헌법 및 법률에 따라 국회에 부여된 정부에 대한 견제권을 최대한 행사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이 야당과의 갈등 해결방법으로 ‘대화’와 ‘타협’을 썼어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향후 대통령과 국회 구성이 바뀌고, 또 다른 갈등이 벌어졌을 때 계엄과 같은 폭력적 방식이 아니라 협치의 필요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헌재는 “민주국가의 국민 각자는 서로를 공동체의 대등한 동료로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믿는 만큼 타인의 의견에도 동등한 가치가 부여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헌재는 이어 “(윤 전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협치의 대상으로 존중했어야 한다”며 “국회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헌법 제7조 제1항은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규정한다. 헌재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의 범위를 초월해 국민전체에 대해 봉사함으로써 사회공동체를 통합시켜야 할 책무를 위반했다”고 짚었다.
만약 야당 때문에 국익이 저해되고 국정이 마비됐더라도 대통령이 쓸 수 있는 방법은 계엄 외에 여러 가지가 있었다는 게 헌재 판단이다. 대국민 담화, 국민투표 부의, 정당해산심판 청구, 형법과 공직선거법 등에 근거한 사법절차가 예로 제시됐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계엄을 선포했다. 결국 헌재는 윤 전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가 아님에도 “국회와의 대립 상황을 타개할 의도”만으로 계엄을 선포해 위헌·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의사를 겸허히 수용하지도 않았고,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도 없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포고령으로 국회와 지방의회 활동을 금지하고 법조인에 대한 위치 확인 지시에 관여한 것은 권력분립 원칙 위배로 인정됐다. 언론·출판과 집회 금지, 영장 없는 체포·구금 등의 포고령 내용은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린 것으로 인정됐다. 헌재는 대통령이 헌법을 수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지난 4월 8일 경기 과천시 중앙선관위원회에서 한 직원이 제21대 대통령선거가 56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문구를 벽에 붙이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다음 대통령, 광장 나온 약자 목소리 귀 기울이길”
기자가 취재한 여러 시민은 헌재가 이번 파면 결정에서 ‘시민’을 언급한 게 인상 깊었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헌재는 결정문에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결의안을 가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고 썼다. 윤 전 대통령이 “도대체 2시간짜리 내란이 있느냐”며 설령 법 위반이 있었더라도 중대하지 않다고 주장하자 헌재가 시민들의 저항을 거론하며 반박한 것이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때도 시민들이 대규모 촛불집회를 열고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지만, 헌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결정에서 이를 언급하진 않았다. 이번 헌재 결정 직후 시민들은 e북이나 전자파일로 결정문을 다운로드해 소장하거나 한 줄 한 줄 읽어봤다고 했다. 일부 시민들은 인상적인 문구를 필사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기도 했다.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만난 이아란씨(활동명·24)는 “탄핵심판은 법률적으로 다투는 절차지만 그 중심에 대한민국 시민이 있었다는 것이 이번 결정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통령이 결단해서 계엄이 풀린 게 아니라 시민이 나서서 싸워준 결과로 풀린 것이다. 시민을 탄압하기 위한 계엄이었고, 시민이 막아냈다는 의미가 인정된 게 중요하다”며 “대통령 하나가 바뀐다고 당장 세상이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이번 파면 결정은 세상을 새롭게 바꾸기 위한 시작”이라고 했다.
이씨는 헌재 결정을 보면서 다음 대통령은 ‘소통’을 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씨는 “지금까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 투쟁을 만든 주체들과의 소통과 협치, 거버넌스와 연결이 필요하다”며 “단순히 ‘말을 들어줬으니 끝’이 아니라 실제로 법률과 정책으로 반영하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탄핵 촉구 집회가 열린 광장엔 불법 계엄 문제뿐 아니라 노동,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등 여러 사회적 약자 관련 의제가 등장했다.
지난 4월 1일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십자각 일대에서 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헌재 결정을 ‘권력 사유화’에 대한 철퇴라고 보는 시민들도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이 가족 관련 비리 무마와 같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한 끝에 야당과 갈등을 빚고 불법 계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대통령은 자신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송여름씨(35)는 “(다음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무게를 확실히 아는 대통령, 국민이 준 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송씨는 “정치를 하면서 반대의견이나 야당과 부딪힐 수도 있는데 자기의 권력이 위협을 받았다고 해서 계엄을 일으켜서는 안 되지 않느냐”며 “(윤 전 대통령이) 가족 비리를 덮기 위해 사법기관을 이용하는 것에서 국민이 맡긴 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사용했다고 느꼈다”고 했다.
직장인 홍찬오씨(36)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국민과 사회를 위해서 기여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며 “다음 대통령은 자신보다 나라와 시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분골쇄신할 수 있는 희생정신과 책임감, 사명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받거나 배제당하지 않고 누려야 할 자기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고 했다.
앞으로는 ‘법 기술자’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40대 직장인 이모씨는 윤 전 대통령이 계엄과 여러 의혹에 대해 사과는 제대로 하지 않고 법률적으로 책임을 피하려는 ‘법 기술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데서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이씨는 “법 기술자들은 법을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하고 해석한다. 이런 법 기술자들에게 권력을 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이번 사태를 통해 느꼈다”며 “다음 대통령은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지, 부끄럽지 않은지를 아는 대통령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여러 시민의 입에선 이번 헌재 결정을 끝으로 더 이상의 혼란이 없었으면 한다는 말이 나왔다. 계엄 이후 4개월간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가 많았다. A씨(62)는 다음 대통령이 ‘민주주의 수호’와 함께 ‘경제 안정’을 급선무로 챙겼으면 한다고 했다. A씨는 “나라를 지탱하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돼야 하고, 국민이 잘 먹고 잘살려면 경제가 좋아야 한다”며 “이 두 개가 나라의 기본”이라고 했다. A씨는 “국민이 생각하는 상식과 정의에 기반해 자기 나름대로의 정책과 철학을 발휘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B씨(29)는 “(윤석열 정부는) 기득권층을 위주로 국정이 운영됐는데 (다음 대통령은) 평범한 시민들이 잘살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며 “내수 경제가 잘 돌아가 소상공인들이 잘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