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간 탄핵 집회 주도했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이야기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파면 선고기일인 지난 4월 4일 서울 안국역 일대에서 철야 농성을 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시민들이 선고 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문재원 기자
[주간경향] 지난 4개월간 도심 광장에서는 탄핵 집회가 수십 차례 열렸다. 시민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휴일에, 퇴근 후에 시간을 쪼개 집회 현장을 찾았고, 혹한의 추위에도 광장에서 밤을 새웠다.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바라보는 무대 뒤편에서, 시민들이 돌아올 자리를 광장에 만들기 위해 애쓴 이들도 있다. 각각의 시민단체에서 모인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응원봉의 불빛이 꺼질세라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했다. 임민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기획국장(활동명 ‘밍갱)’은 “(지난 1월) 윤석열 구속 이후 집회 현장을 찾는 시민들이 크게 줄었다. 다시 광장을 찾을 시기까지 광장을 지키는 게 시민사회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잠을 쪼개고 때로는 코피를 쏟는 과정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부터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고 회복하기까지 이들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들에게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은 일단락이되 끝이 아니다. 다시 각자가 속한 시민단체로 돌아간 이들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사회 변화를 위한 또 다른 버거운 싸움을 마주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지난 2년 11개월에 대해, 계엄 이후 4개월에 대해, 파면 이후 각자가 나아갈 길에 관해 물었다.
활동가도, 시민도 코피
17년차 사회활동가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은 지난 4개월간 푹 쉰 적이 없다. 그는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에 파견돼 집회와 행진을 주관하는 일을 했다. 비상계엄 이후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출범한 ‘비상행동’은 지난 4개월간 서울에서만 67차례 집회를 열고, 60차례에 걸쳐 145㎞를 행진했다. 윤 전 대통령이 석방된 지난 3월 8일부터 4월 5일까지는 강도가 높아져 집회만 34차례 열었다. 담당자인 그는 쉴 수도 없었고, 아파서도 안 됐다. 혹시라도 아플까봐 영양제를 끼고 살고, 링거를 두 번쯤 맞았다.
정 활동가는 “매일 집회를 하던 3월 중에는 (같이 일하는) 활동가들이 집회 준비를 하다가 코피를 쏟고 행진하다 코피를 쏟았다. 활동가들만 힘든 게 아니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발언하기로 한 시민이 대기실에서 코피를 쏟는 일이 있었다. 모두가 정말로 힘들게 광장을 지켜왔다. 결의가 대단했다”고 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미뤄지면서 피로는 극에 달했다. 서민영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 활동가는 비상행동에서 조직팀장으로 일했다. 전국에서 진행되는 비상행동 집회와 1인 시위를 취합했다. 비상행동 의장단이 헌재 결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가자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농성장 앞에서 여러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지난 4개월간 비상행동은 전국 100여 곳 이상에서 1800회 이상의 집회·시위를 열었다.
서 활동가는 “일정상 무리를 할 수밖에 없는 데다, 겨울에 독감이 유행하면서 아픈 사람들이 나왔다. (다른 활동가들이) 아파서 (집회) 못 나온다고 할 때 너무 미안해하면서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손이 부족한지 아니까. 사람이 4개월 동안 이렇게 하면 안 아플 수 없고 하루도 안 빠질 수 없는 건데 다들 큰 무게감을 갖고 일하고 있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비상행동에 파견된 활동가들은 여러 임무를 동시에 맡았다. 어디나 손이 부족한 시민단체 특성상, 원소속 단체의 일과 비상행동 일을 병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탄핵 집회로 일이 곱절은 늘어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광장만 한 피로해소제도 없었다.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지난 3월 1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파면 촉구 각계 긴급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시민들과 함께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광장에서 기를 받고
밍갱 활동가는 지난 4개월간 시민들이 보낸 글에 파묻혀 지냈다. 비상행동 집회는 발언을 희망하는 시민들에게 사전에 발언문을 받고 발언자를 선정했다. 촘촘한 집회 일정상 발언 시간을 준수해야 했고,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반복되면 듣는 사람이 지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탄핵 집회는 차별 없는 광장을 지향했다. 원활한 수어 통역을 위해 사전 발언문이 필요했다. 누군가의 발언이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누군가는 발언문을 꼼꼼히 읽고 발언자와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토요일 집회 전에는 150개씩 발언문이 들어왔는데 이를 검토하는 것이 밍갱 활동가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는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는) 한강진 집회 때 3박4일 동안 철야 집회를 하게 됐다. 현장에서 발언 신청을 받으니까 발언문이 없는 게 당연한데 시민들이 (휴대전화에) 다들 발언문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 얘기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써두고 다니는 거다. 그걸 보면서 이런 광장이 열리기만 기다린 사람들이 많았구나, 꼭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광장은 그에게 적잖은 위로가 됐다. “집에 돌아오면 우울하고 오히려 광장에서 일하면 좀 나았다. 사회적 합의나 상식은 무형의 자산이지 않나. 정치권에서 나와야 할 얘기가 있고, 나오지 말아야 할 얘기가 있는데 그 경계가 무너지고, 민주주의 사회의 룰이 무의미해지는 걸 보면서 복구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고 했다.
집회와 행진 사회를 맡았던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행진 트럭에 타서 한 시간 동안 소리 지르면 목이 쉰다. 그런데 행진 사회를 맡은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엄청 힘을 받는다고들 했다. 몸은 고되지만 누군가와 같이 호흡하고 입을 맞추는 과정, 뜻을 맞추는 과정들이 고마움과 성취감을 줬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 직후 여의도로 간 분들은 내가 살자고 나간 것이 아니다. 우리 공동체를 살리고 살아가기 위해 힘을 모은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출발한 일이기 때문에 힘이 됐다”고 했다.
힘을 받는 걸 넘어서 때로 시민들에게 경외를 느꼈다. 정진임 활동가는 윤 전 대통령 체포를 촉구하며 지난 1월 3일부터 3박4일간 열린 한강진 집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집회 둘째 날 많은 눈이 왔다. 셋째 날이 되자 주최 측은 비상행동 대표들만 남기로 하고 철야를 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앰프와 불도 껐다. 그러나 시민들이 떠나지 않았다. 의료 부스에서는 저체온이 심각해 체온이 측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넷째 날 새벽 비가 왔지만 시민들은 자리를 지켰다. 체포는 그만큼 시민들에게 간절한 일이었다. 그는 “3박을 이어서 할 동안 시민들이 왜 집에 안 가고 있는가, 이 마음이 무섭다는 생각까지 했다. 시민사회가 이 마음을 어떻게 받아나갈 것인가, 우리는 준비가 돼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활동가들은 이번 집회가 여러모로 과거의 대규모 집회와 달랐다고 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 때는 시민단체의 깃발을 두고 시민들이 “깃발 내려”를 외쳤다. 정파성 없는 ‘순수한 시민’이 강조됐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는 시민들이 저마다의 깃발을 들고나왔다. 밍갱 활동가는 “배후세력을 색출하라는 권력에 ‘내 배후는 나다’라고 말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당시에도 시민과 시민사회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이번 집회는 주최 측과 시민이 그 간극을 좁혔다. 비상행동은 집회의 주축인 2030 여성에게 다가가기 위해 대중가요를 집회에서 틀었고, 시민들은 이참에 배워두자며 민중가요 재생을 요구했다. 시민 발언자가 민주노총의 방식대로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라고 말문을 여는가 하면, 지난 3월 8일 윤 전 대통령이 석방된 긴급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주최 측인 비상행동의 공식 공지를 기다렸다. 비속어와 혐오 표현을 지양하고 모두가 배제되지 않는 광장을 만든 것도 이전 집회들과 차이점이다.
최전선에서 보낸 2년 11개월
탄핵 집회 이전에도 활동가들은 윤석열 정부라는 권위주의 정부와 싸우는 최전선에 있었다. 2년 11개월 지속한 윤석열 정부가 잘못되고 있음을 가장 빨리 알아차린 이들이기도 하다. 정보공개센터에 윤석열 정부는 ‘취임 전부터 알 권리를 침해했던 정부’였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부터 정보공개 청구에 응하지 않았고, 답변 기한을 넘겨 인수위가 문을 닫는 날에야 비공개 통보를 했다. 대통령실이 직원 명단 공개를 거부해 정보공개센터와 소송까지 이어졌다. 대법원이 ‘명단을 공개하라’고 확정판결을 내렸지만, 대통령실은 아직도 응하지 않고 있다. 군인권센터도 집권 초부터 계엄 직전까지 정부와 싸웠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과 박정훈 대령 수사 외압 사건은 “불의한 정권”(김형남 활동가)의 일단을 보여줬다. 노동자들에게는 더없이 잔혹했다. 화물연대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고,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에도 강경 대응했다. 비상행동에서 행사 기획자로 일한 이사라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이하 비없세) 활동가는 “어떤 정부도 노동자들에게 친절하진 않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적대적이었고 탄압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시민사회에 혹독한 겨울을 가져왔다. 시민사회를 정책을 논할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비상행동에 파견돼 집회를 준비하는 실무자들과 운영위원회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한 김지애 활동가는 기독교 사회단체 고난함께 소속이다. 고난함께는 사회적 재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과 연대하고 비전향 장기수·양심수들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김지애 활동가는 “윤석열 정부는 거대한 벽 같았다. 어떤 소통도 할 수 없고, 어떤 걸 기획해도 나아갈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해 삼보일배를 진행할 때 폭우가 쏟아졌다. 정말 화가 났다. 진상 규명을 하자는 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라고 했다. 서민영 연대회의 활동가에게도 윤석열 정부는 불통의 정부였다. 그는 “어느 정부에서나 시민사회는 정부 정책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윤석열 정부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우리의 주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막막함이 컸다”고 했다. 연대회의는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 발생할 때 연대체를 꾸리고 운영하기 위해 상설 운영되는 단체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언론장악 저지, 이태원 참사,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 등에 대응했다.
끝이 아닌 시작
“파면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은 적어도 활동가들에게는 멋스러운 관용구가 아니다. 지난 4월 4일 파면 선고의 순간 이사라 비없세 활동가는 헌재 인근 안국역 집회 현장에 있었다. 기쁨도 잠시, 안국역 집회를 마치자마자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투쟁 문화제를 준비하러 갔다. 현재 거제통영고성의 조선하청 노동자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와 세종호텔의 해고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이사라 활동가는 “고공에 농성자들이 남아서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윤석열 파면이 끝이 아니다. 고공 농성자가 내려와야,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사회가 바뀌는 모습을 보여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비상행동은 윤 전 대통령 파면 이후 개혁 과제에 집중하는 의미로 단체명을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으로 바꿨다.
서민영 활동가는 문형배 헌법재판관이 파면을 선고하는 순간 안국역 집회 현장에서 동료를 껴안고 울었다.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위원회에서도 활동했던 서 활동가는 지근거리에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아봤다. 참사 희생자 고 이주영씨의 아버지 이정민 위원장의 눈빛에서는 기쁨의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서 활동가는 “진상규명이 안 됐고,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리기도 힘든 과정이었고 해결 없이 시간만 갔는데 윤석열이 파면됐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을 보니 죄송스러웠다.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에겐 미뤄둔 숙제가 산적해 있다. 윤 전 대통령이 권좌에 있든 없든 세월호 11주기는 돌아온다. 언론 장악 시도를 저지해야 할 과제도 남았다.
다행인 점은 광장을 지나오면서 희망을 품게 됐다는 점이다. 김지애 고난함께 활동가는 “윤 정부의 벽 같은 모습에 비관할 때가 많았다. 탄핵했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지만, 광장에 모인 이 힘이면 믿고 나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무엇 하나라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