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간 한국에서 사목한 두봉 주교 선종 전, 마지막 인사
“앞날 분명하지 않아도 살아봅시다, 기쁘게 떳떳하게”
한국에서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의 인터뷰는 지난 2월 17일에 이뤄졌다. 두 달이 채 못 되는 지난 4월 10일, 두봉 주교는 뇌경색으로 선종했다. 두봉 주교의 마지막 인터뷰는 언제나 그렇듯 웃음과 사랑이 흘러넘쳤다. 기자로 만났지만 특별한 절차나 격식 없이, 매일 전국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한 명의 몫으로 묻고 들었다.
두봉 주교는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한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70년이 넘었다. 경북 안동 교구에서 주교로 사목했고, 20년 전부터는 의성군 봉양면에서 살고 있다. 봉양면은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이다. 두봉 주교는 집 앞 텃밭에서 작은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주민들과 나눈다.
붉은 벽돌 사제관 앞에 도착하니, 97세의 노인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식복사가 눈길에 미끄러져 다치는 바람에 식사 준비를 못 했다며, 근처 식당으로 앞서 안내했다.
“식당에 뭐가 나올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늘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가봅시다.” 배불리 먹고 계산하려니 식당 주인이 ‘이미 값은 치러졌다’며 웃었다. 아무런 인연도 없고, 다시 볼 일도 없을 이들에게 비빔밥과 된장찌개와 삼치구이로 푸짐한 한 상을 대접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셈법일까.
예능 프로그램(‘유퀴즈’)에 출연한 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불교 승려도 오고 개신교 신자도 온다. 어린아이들도 오고 청년도 오고 부부도 오고 노인도 온다. 사전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두봉 주교는 시간을 쪼개서 이 방문객을 맞는다.
사제관의 거실 마루는 햇볕이 잘 들어서 밝았다. 두봉 주교는 작은 탁자를 제대로 삼아 미사를 드린다고 했다. 미사복을 갖추어 입고 복사도 없이 혼자 미사를 드린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는 예수를 믿느냐고 묻지 않는다. 방문객들은 주로 자기의 고달픔을 토로하고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말하다 울다 웃다가 돌아가는 것만으로 크게 위로를 받는다.
게다가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는 특별한 모터를 달았다. 클클클, 푸푸푸, 하하하.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는 공기의 틈새를 시원하게 벌리고 투명한 햇빛 방울을 불어넣는다. 수시로 터지는 파안대소는 전염성이 강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달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구겨진 얼굴을 펴서 다들 활짝 함께 웃게 된다.
문제와 갈등은 현존하지만 그래도 기쁨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들 기운 내서 돌아가는 것이다.
두봉 주교는 1969년 주교품을 받고 20년 이상 안동교구장직을 맡아왔다. 안동교구는 안동, 영주, 에천, 문경, 봉화 등 경상붇고 북부 지역을 맡고 있다. 한국 유림의 본향에서 그는 유림 사회의 지도자들과 조화롭게 지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데도 왜 많은 분들이 주교님을 찾아오는 걸까요?
“나는 성당 다니라고 안 해요. 충고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냥 사정을 이야기하면 들어줘요. 들어주고 기도해 달라고 하면 기도해 주고, 좋은 일 얘기하면 힘껏 손뼉 쳐줍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자꾸 돈을 두고 갑니다. 안 받는다고 하면, 나한테 주는 게 아니래요.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주라고 합니다. 나는 돈 준 사람 이름도 몰라요. 몇백만 원씩 쌓이면, 몇천만 원도 돼요.”
-그 돈은 어디로 가나요?
“다 제 길을 딱 맞게 찾아갑니다. 겉으론 괜찮아도 어려운 집들도 있어요. 사람들이 알려주기도 해요. 어느 집 가장이 큰 병에 걸렸다더라, 장사에 실패했다더라… 형편 어려운 사람이 찾아와도 줬어요. 누가 줬는지 나도 모르니 받는 사람한테도 내 얘기하지 말라고 해요. 돈들이 아무도 모르게 묘하게 흘러가요. 계획도 없이. 아하하.”
-계획도 없이…요?
“네. 묘하게 맞아들어가요. 세상에 선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주교님은 항상 기쁨이 차오르시는 것 같습니다.
“기쁘죠. 나는 기쁘게 살고 있어요.”
아담한 거실과 몇 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된 소박한 사제관은 영적인 온기가 가득했다. 쏟아지는 햇빛이 공기의 실핏줄을 타고 사이사이 퍼져갔다. 통유리 창밖으로 펼쳐진 마당은 작물을 심기 전이라 한가로웠고, 와인을 대신해서 노 주교가 직접 내려준 커피 향이 코끝에 닿아 향긋했다.
그가 긴 팔을 허공에 뻗을 때마다 모든 동작이 그리는 포물선이 크고 넓었다.
“과자도 먹고 커피도 드세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두봉 주교는 그의 몸이 뿌리내린 농촌 마을을, 그 땅의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했다. 20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살던 건넛집 할머니도 10년 전 세상을 뜨고, 지금은 그곳에 조선족 교포 남편과 베트남 아내가 4살 된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또 하나 아이가 나올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요. 아하하.”
두 사람 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50대 이장인 농촌 총각과 베트남 아가씨는 두봉 주교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한국말을 모르는 베트남 신부 가족을 위해 그는 커다란 백지에 베트남어로 ‘사랑, 인내, 친절’이라고 큰 글씨로 써서 하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크게 읽었더니 다들 까르르 까르르 웃었어요. 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어요.”
두봉 주교가 또 함박웃음을 지었다. 베트남 아내가 천주교 신자가 돼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고, 남편도 아내 따라 신자가 되겠다고 예비자 반에 들어갔다며 그가 동네 소식을 전했다. 사랑과 인내와 친절이 모이는 곳이 마을이라고 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아빠 엄마, 삼촌, 다섯 남매와 5살 7살 된 사촌이 같이 살았어요. 일곱 아이와 부대끼는 한가운데서 남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1차 대전 때 말라리아에 걸려서, 우리 집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대부분 초등학교까지만 다녔고, 저만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고3 철학 시간에 유교, 불교, 도교… 세상의 모든 종교를 배웠어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에 반해서 두 손을 번쩍 들었죠. 하하. 그 시절에 배운 사랑과 행복의 기둥이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됐어요. 사랑이 얕으면 행복도 얕아요.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지요. 행복은 사랑에 달려있어요. 최고로 사랑해야 최고로 행복합니다.”
최고 사랑이 최고 행복이라고 했다.
“저는 천막 만드는 기술로 살았던 바오로 사제처럼 노동사제가 되고 싶었어요. 식구들이 다 농사를 지었으니, 노동사제에 나만큼 딱 맞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신학교 학장 신부님은 교황청에서 노동사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다 파리외방전교회를 알게 됐어요. 2차 대전 직후에 UN군으로 독일에 머물 때였는데, 부대원 중 한 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학생이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대 후에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두봉 주교는 1953년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배를 타고 왔다. 배는 이집트, 스리랑카, 홍콩, 일본을 거쳐서 두 달 만에 인천에 닿았다. 1954년 12월이었다. 전쟁 직후에 폐허가 된 거리에서 사람들이 떨면서 배회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도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보였다’고 했다. 대전에서 사목하며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요즘도 매일매일 행복하게 보내십니까?
“나는 아침에 5시면 일어나요. 추워도 그냥 벌떡 일어나서 움직여요. 5분도 안 걸립니다. 1시간 반 정도 여기서 미사를 올리고, 아침으로 커피하고 빵 먹어요. 행복하지요. 그리고 2시간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나요?
“꾸며봐야 좋은 기도 안 나와요. 뭐가 필요한 지 제 마음을 다 아시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킵니다. 전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어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하느님 앞에 가만히 있어요. 입을 벌려 ‘하’ 소리를 내고 두 팔을 벌려 엎드립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으시네요.
“없어요.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줘요. 여름엔 풀 뽑고 물 주고 농사를 지어요. 기쁘고 떳떳해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기쁘고 떳떳하다…
“그 말은 제가 안동 교구장으로 있을 때 만들었어요. 60년 전 교구가 생길 당시엔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농촌 인구가 확 줄었어요. 젊은 사람도 없고 앞날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어요.
도시 사람들처럼 노는 거, 먹는 거, 돈 쓰는 거 마음껏 못해도 괜찮다...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아보자. 농촌은 생명을 만드는 곳이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면서, 그러다 보면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단순한 말에 눈물이 났다. 한동안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제 옳은 소견대로 말했고, 내일의 사명도 내일의 날씨도 몰라 갈지자로 걸었다. 기쁘지도 떳떳하지도 않게 보낸 시간들이 사무쳤다. 어른이 그리웠다.
“살아보면 알아요. 어쨌든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제목을 짓고 선언하며 살아보니까, 그렇게 살아져요. 앞날이 분명하지 않다고 신경을 쓴다든가 그런 게 없어요. 나름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몇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자, 그러면 분위기가 살아나요.”
-주교님, 그래도 젊은이들이 많이 우울해합니다.
“(어두운 얼굴로)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세상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져요.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안 좋은 것도 많습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그래도 이로운 게 더 많습니다.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사세요. 악보다 선이 훨씬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많이 움직이라고 했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지고 나쁜 생각을 덜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우리나라가 6·25 이후에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나는 다 봤어요. TV도 굿 뉴스를 좀 더 많이 내보내면 좋겠어요.”
-살면서 괴로울 때는 없으셨나요?
“교회 전체를 생각해 보면 60년 전이었어요. 원래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드렸는데 교황청에서 예배도 사목도 현지어로 현지화하라고 내려왔어요. 엄청난 변화였어요. 그전까지 신부들은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우고 고해 성사도 드렸어요. 그때부터는 한국말, 일본말, 중국말이 다양하게 미사에 쓰였어요.
각 나라에는 풍속이 있어서 한국에서는 설이나 세배, 대보름, 유교 전통 식사 같은 것들을 다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안동교구에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적응을 못 해서 하나둘 떠났어요. 19개 본당에서 7개 본당이 비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많이 괴로웠어요. 프랑스에 가서 일주일 동안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내가 신경 써봐야 소용없다’였어요.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그때부터 침묵 기도가 시작됐다.
“대구 교구에서 도움을 주고 다른 선교사들이 도와주고 조금씩 한국 신부님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평생 내가 머리 써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어요. 마음 비우고 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그건 평범한 우연이 아니었어요.”
안동 교구장이었던 1973년 두봉 주교는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의원을 열었고, 1978년 카톨릭농민회를 설립했다. 장애인 직업 훈련원,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법인 상지학원도 세웠다. 교회가 현지화되면 현지 출신 사제에게 맡긴다는 원칙에 따라 그동안 두봉 주교는 네 번 교황청에 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반려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일명 ‘오원춘 사건’으로 한국 정부와 갈등을 빚을 때는, 오히려 사직 제의를 거절하고 ‘주교’로서 한국 농민의 곁을 지켰다. 1978년 영양군의 불량 감자 종자 피해에 사제들이 함께 항의하며 보상을 받아낸 일이 시발이 되어 벌어진 ‘오원춘 사건’은 이후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54년부터 71년간 그는 정직과 낙관을 갖춘 한국인의 의젓함을 사랑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대통령상을, 프랑스는 나폴레옹 훈장을 수여했다.
-고향인 오를레앙은 언제 다녀오셨어요?
“5년 전에 다녀왔어요. 눈이 나빠지고 귀가 나빠져서 이제는 더 못 가요. 이제는 운전도 못 해요.”
-오를레앙과 의성 중 어디가 더 고향 같으세요?
“나는 오를레앙에서 태어났지만, 여기서 살았어요. 여기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 살았어요.”
자신의 이름 두봉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봉양 두씨로 본관을 정해 시조로 호적에 등록했다. 서울로 돌아갈 길이 멀어 해지기 전에 사제관을 나왔다. 양손이 허전하지 않도록 유과와 곶감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안겨주었다. 값없이 받은 게 너무 많아 꿈인가 생시인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담장 문밖으로 배웅을 나온 두봉 주교가 웃으며 흰 손을 흔들었다.
“잘 사세요. 기쁘게 떳떳하게.”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는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
“앞날 분명하지 않아도 살아봅시다, 기쁘게 떳떳하게”
▲두봉 레나도 주교.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나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54년 한국 파송 후 71년간 한국에서 약자들을 위해 사역했다. 2월 17일 생존 마지막 인터뷰 사진./사진=김지수
한국에서 약자를 위해 헌신했던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의 인터뷰는 지난 2월 17일에 이뤄졌다. 두 달이 채 못 되는 지난 4월 10일, 두봉 주교는 뇌경색으로 선종했다. 두봉 주교의 마지막 인터뷰는 언제나 그렇듯 웃음과 사랑이 흘러넘쳤다. 기자로 만났지만 특별한 절차나 격식 없이, 매일 전국에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 한 명의 몫으로 묻고 들었다.
두봉 주교는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한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70년이 넘었다. 경북 안동 교구에서 주교로 사목했고, 20년 전부터는 의성군 봉양면에서 살고 있다. 봉양면은 의성에서 군위로 넘어가는 접경의 외진 마을이다. 두봉 주교는 집 앞 텃밭에서 작은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주민들과 나눈다.
붉은 벽돌 사제관 앞에 도착하니, 97세의 노인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식복사가 눈길에 미끄러져 다치는 바람에 식사 준비를 못 했다며, 근처 식당으로 앞서 안내했다.
“식당에 뭐가 나올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늘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가봅시다.” 배불리 먹고 계산하려니 식당 주인이 ‘이미 값은 치러졌다’며 웃었다. 아무런 인연도 없고, 다시 볼 일도 없을 이들에게 비빔밥과 된장찌개와 삼치구이로 푸짐한 한 상을 대접하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셈법일까.
예능 프로그램(‘유퀴즈’)에 출연한 뒤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불교 승려도 오고 개신교 신자도 온다. 어린아이들도 오고 청년도 오고 부부도 오고 노인도 온다. 사전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두봉 주교는 시간을 쪼개서 이 방문객을 맞는다.
사제관의 거실 마루는 햇볕이 잘 들어서 밝았다. 두봉 주교는 작은 탁자를 제대로 삼아 미사를 드린다고 했다. 미사복을 갖추어 입고 복사도 없이 혼자 미사를 드린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는 예수를 믿느냐고 묻지 않는다. 방문객들은 주로 자기의 고달픔을 토로하고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말하다 울다 웃다가 돌아가는 것만으로 크게 위로를 받는다.
▲얼마 전까지 사제관에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했던 두봉 주교./사진=김지수
게다가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는 특별한 모터를 달았다. 클클클, 푸푸푸, 하하하. 두봉 주교의 웃음소리는 공기의 틈새를 시원하게 벌리고 투명한 햇빛 방울을 불어넣는다. 수시로 터지는 파안대소는 전염성이 강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달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구겨진 얼굴을 펴서 다들 활짝 함께 웃게 된다.
문제와 갈등은 현존하지만 그래도 기쁨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다들 기운 내서 돌아가는 것이다.
두봉 주교는 1969년 주교품을 받고 20년 이상 안동교구장직을 맡아왔다. 안동교구는 안동, 영주, 에천, 문경, 봉화 등 경상붇고 북부 지역을 맡고 있다. 한국 유림의 본향에서 그는 유림 사회의 지도자들과 조화롭게 지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데도 왜 많은 분들이 주교님을 찾아오는 걸까요?
“나는 성당 다니라고 안 해요. 충고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냥 사정을 이야기하면 들어줘요. 들어주고 기도해 달라고 하면 기도해 주고, 좋은 일 얘기하면 힘껏 손뼉 쳐줍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자꾸 돈을 두고 갑니다. 안 받는다고 하면, 나한테 주는 게 아니래요.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주라고 합니다. 나는 돈 준 사람 이름도 몰라요. 몇백만 원씩 쌓이면, 몇천만 원도 돼요.”
-그 돈은 어디로 가나요?
“다 제 길을 딱 맞게 찾아갑니다. 겉으론 괜찮아도 어려운 집들도 있어요. 사람들이 알려주기도 해요. 어느 집 가장이 큰 병에 걸렸다더라, 장사에 실패했다더라… 형편 어려운 사람이 찾아와도 줬어요. 누가 줬는지 나도 모르니 받는 사람한테도 내 얘기하지 말라고 해요. 돈들이 아무도 모르게 묘하게 흘러가요. 계획도 없이. 아하하.”
▲최고의 사랑이 최고의 행복이었다고 말하는 두봉 주교./사진=김지수
-계획도 없이…요?
“네. 묘하게 맞아들어가요. 세상에 선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주교님은 항상 기쁨이 차오르시는 것 같습니다.
“기쁘죠. 나는 기쁘게 살고 있어요.”
아담한 거실과 몇 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된 소박한 사제관은 영적인 온기가 가득했다. 쏟아지는 햇빛이 공기의 실핏줄을 타고 사이사이 퍼져갔다. 통유리 창밖으로 펼쳐진 마당은 작물을 심기 전이라 한가로웠고, 와인을 대신해서 노 주교가 직접 내려준 커피 향이 코끝에 닿아 향긋했다.
그가 긴 팔을 허공에 뻗을 때마다 모든 동작이 그리는 포물선이 크고 넓었다.
“과자도 먹고 커피도 드세요.”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두봉 주교는 그의 몸이 뿌리내린 농촌 마을을, 그 땅의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했다. 20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살던 건넛집 할머니도 10년 전 세상을 뜨고, 지금은 그곳에 조선족 교포 남편과 베트남 아내가 4살 된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또 하나 아이가 나올 것도 같은데, 모르겠어요. 아하하.”
두 사람 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50대 이장인 농촌 총각과 베트남 아가씨는 두봉 주교의 주례로 식을 올렸다. 한국말을 모르는 베트남 신부 가족을 위해 그는 커다란 백지에 베트남어로 ‘사랑, 인내, 친절’이라고 큰 글씨로 써서 하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인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내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크게 읽었더니 다들 까르르 까르르 웃었어요. 식장이 웃음바다가 됐어요.”
▲천국의 사제./사진=김지수
두봉 주교가 또 함박웃음을 지었다. 베트남 아내가 천주교 신자가 돼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고, 남편도 아내 따라 신자가 되겠다고 예비자 반에 들어갔다며 그가 동네 소식을 전했다. 사랑과 인내와 친절이 모이는 곳이 마을이라고 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아빠 엄마, 삼촌, 다섯 남매와 5살 7살 된 사촌이 같이 살았어요. 일곱 아이와 부대끼는 한가운데서 남의 입장을 잘 이해하게 됐어요. 아버지가 1차 대전 때 말라리아에 걸려서, 우리 집은 살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대부분 초등학교까지만 다녔고, 저만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고3 철학 시간에 유교, 불교, 도교… 세상의 모든 종교를 배웠어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에 반해서 두 손을 번쩍 들었죠. 하하. 그 시절에 배운 사랑과 행복의 기둥이 제 인생의 나침반이 됐어요. 사랑이 얕으면 행복도 얕아요.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의 사랑이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지요. 행복은 사랑에 달려있어요. 최고로 사랑해야 최고로 행복합니다.”
최고 사랑이 최고 행복이라고 했다.
“저는 천막 만드는 기술로 살았던 바오로 사제처럼 노동사제가 되고 싶었어요. 식구들이 다 농사를 지었으니, 노동사제에 나만큼 딱 맞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신학교 학장 신부님은 교황청에서 노동사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다 파리외방전교회를 알게 됐어요. 2차 대전 직후에 UN군으로 독일에 머물 때였는데, 부대원 중 한 명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학생이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대 후에 파리외방전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두봉 주교는 1953년 프랑스에서 사제품을 받고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배를 타고 왔다. 배는 이집트, 스리랑카, 홍콩, 일본을 거쳐서 두 달 만에 인천에 닿았다. 1954년 12월이었다. 전쟁 직후에 폐허가 된 거리에서 사람들이 떨면서 배회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도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이 보였다’고 했다. 대전에서 사목하며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햇살이 고여있는 거실 탁자 위에서 매일 홀로 미사를 드린다./사진=김지수
-요즘도 매일매일 행복하게 보내십니까?
“나는 아침에 5시면 일어나요. 추워도 그냥 벌떡 일어나서 움직여요. 5분도 안 걸립니다. 1시간 반 정도 여기서 미사를 올리고, 아침으로 커피하고 빵 먹어요. 행복하지요. 그리고 2시간 기도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시나요?
“꾸며봐야 좋은 기도 안 나와요. 뭐가 필요한 지 제 마음을 다 아시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킵니다. 전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어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하느님 앞에 가만히 있어요. 입을 벌려 ‘하’ 소리를 내고 두 팔을 벌려 엎드립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으시네요.
“없어요.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누구든지 다 받아줘요. 여름엔 풀 뽑고 물 주고 농사를 지어요. 기쁘고 떳떳해요.”
-그 말이 참 좋습니다. 기쁘고 떳떳하다…
“그 말은 제가 안동 교구장으로 있을 때 만들었어요. 60년 전 교구가 생길 당시엔 인구가 17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농촌 인구가 확 줄었어요. 젊은 사람도 없고 앞날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비관적으로 보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어요.
도시 사람들처럼 노는 거, 먹는 거, 돈 쓰는 거 마음껏 못해도 괜찮다...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아보자. 농촌은 생명을 만드는 곳이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면서, 그러다 보면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단순한 말에 눈물이 났다. 한동안 사람들은 다 귀를 막고 제 옳은 소견대로 말했고, 내일의 사명도 내일의 날씨도 몰라 갈지자로 걸었다. 기쁘지도 떳떳하지도 않게 보낸 시간들이 사무쳤다. 어른이 그리웠다.
▲그의 웃음소리는 전염성이 있다./사진=김지수
“살아보면 알아요. 어쨌든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제목을 짓고 선언하며 살아보니까, 그렇게 살아져요. 앞날이 분명하지 않다고 신경을 쓴다든가 그런 게 없어요. 나름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몇 사람이라도 그렇게 살아보자, 그러면 분위기가 살아나요.”
-주교님, 그래도 젊은이들이 많이 우울해합니다.
“(어두운 얼굴로)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세상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져요. 모든 걸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세상에 안 좋은 것도 많습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그래도 이로운 게 더 많습니다. 좋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많이 생각하고 사세요. 악보다 선이 훨씬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많이 움직이라고 했다.
“그래야 몸이 건강해지고 나쁜 생각을 덜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우리나라가 6·25 이후에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나는 다 봤어요. TV도 굿 뉴스를 좀 더 많이 내보내면 좋겠어요.”
-살면서 괴로울 때는 없으셨나요?
“교회 전체를 생각해 보면 60년 전이었어요. 원래 모든 미사는 라틴어로 드렸는데 교황청에서 예배도 사목도 현지어로 현지화하라고 내려왔어요. 엄청난 변화였어요. 그전까지 신부들은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우고 고해 성사도 드렸어요. 그때부터는 한국말, 일본말, 중국말이 다양하게 미사에 쓰였어요.
각 나라에는 풍속이 있어서 한국에서는 설이나 세배, 대보름, 유교 전통 식사 같은 것들을 다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런데 안동교구에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적응을 못 해서 하나둘 떠났어요. 19개 본당에서 7개 본당이 비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많이 괴로웠어요. 프랑스에 가서 일주일 동안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에서 얻은 깨달음이 ‘내가 신경 써봐야 소용없다’였어요.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그때부터 침묵 기도가 시작됐다.
▲두봉 주교가 머물렀던 사제관.
“대구 교구에서 도움을 주고 다른 선교사들이 도와주고 조금씩 한국 신부님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평생 내가 머리 써서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았어요. 마음 비우고 살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그건 평범한 우연이 아니었어요.”
안동 교구장이었던 1973년 두봉 주교는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의원을 열었고, 1978년 카톨릭농민회를 설립했다. 장애인 직업 훈련원, 여성 교육을 위한 학교법인 상지학원도 세웠다. 교회가 현지화되면 현지 출신 사제에게 맡긴다는 원칙에 따라 그동안 두봉 주교는 네 번 교황청에 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반려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일명 ‘오원춘 사건’으로 한국 정부와 갈등을 빚을 때는, 오히려 사직 제의를 거절하고 ‘주교’로서 한국 농민의 곁을 지켰다. 1978년 영양군의 불량 감자 종자 피해에 사제들이 함께 항의하며 보상을 받아낸 일이 시발이 되어 벌어진 ‘오원춘 사건’은 이후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954년부터 71년간 그는 정직과 낙관을 갖춘 한국인의 의젓함을 사랑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대통령상을, 프랑스는 나폴레옹 훈장을 수여했다.
-고향인 오를레앙은 언제 다녀오셨어요?
“5년 전에 다녀왔어요. 눈이 나빠지고 귀가 나빠져서 이제는 더 못 가요. 이제는 운전도 못 해요.”
-오를레앙과 의성 중 어디가 더 고향 같으세요?
“나는 오를레앙에서 태어났지만, 여기서 살았어요. 여기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 살았어요.”
자신의 이름 두봉은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는 봉양 두씨로 본관을 정해 시조로 호적에 등록했다. 서울로 돌아갈 길이 멀어 해지기 전에 사제관을 나왔다. 양손이 허전하지 않도록 유과와 곶감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안겨주었다. 값없이 받은 게 너무 많아 꿈인가 생시인가,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1969년 주교가 된 것을 기념해 김수환 추기경과 기념 촬영을 한 젊은 얼굴의 두봉 주교(앞줄 세번째)
담장 문밖으로 배웅을 나온 두봉 주교가 웃으며 흰 손을 흔들었다.
“잘 사세요. 기쁘게 떳떳하게.”
약자들을 위해 헌신한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 주교는 4월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