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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향하던 공비들과 산에서 마주쳐…고인 귀순 뒤 끈끈한 우정


고(故) 김신조 목사 빈소에서 만난 우성제 씨와 유족들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지난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고 김신조 목사 빈소에서 우성제(맨 왼쪽)씨와 고인의 아내, 딸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25.4.10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고 슬프네요.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10일 오후 '청와대 습격사건'의 북한 무장 공비 출신 고(故) 김신조 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영등포구 장례식장.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는 백발의 신사에게 조문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57년 전 그날을 떠올리던 우성제(77)씨가 잠시 눈을 감았다. 우씨는 고인을 포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의 침투 사실을 경찰에 처음 신고한 '나무꾼 4형제' 중 막내다.

당시 스무살이던 우씨가 경기 파주 삼봉산에서 무장 공비들에게 붙잡힌 건 1968년 1월 19일이었다.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목표로 북한 개성에서 출발한 지 이틀만이었다.

오후 1시께 우씨가 갈퀴로 낙엽을 모으는데 별안간 8촌 형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산길을 20∼30m 올라가니 군인 네 명과 이야기하는 형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가슴이 덜컹하면서 '아이고, 죽었구나' 싶더라고요. 보자마자 무장 공비인 걸 알아챘어요. 중위, 하사, 사병으로 계급이 제각각인데 AK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하나씩 차고 무장 상태가 똑같았거든요."

우씨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추운 날씨에 수고하신다"며 말을 건넸다. 공작원들은 우씨 형제를 쭉 지켜보고 있었는지 다짜고짜 "분명히 네 명이 올라왔는데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느냐"고 추궁했다.

이들은 "할 이야기가 있으니 산꼭대기에 있는 본부로 올라가자"고 우씨 형제를 채근했다. "나무를 해서 저녁에 가져다 팔아야 양식을 사 먹는다"며 버텼으나 들고 있던 낫까지 뺏기고 끌려갔다.

공작원들은 우씨 형제를 앉혀놓고 이름과 가족관계, 파출소 위치 등을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솔직히 이야기하라"는 취조에 우씨는 한술 더 떠 "훈련 나온 거 같은데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한 국이나 먹고 가시라"고 답했다. 그 사이 우씨의 6촌 형 두 명도 잡혀 왔다.

기자회견하는 김신조
[연합뉴스 자료사진]


"동무들…." 옥신각신한 끝에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별안간 억센 북한 사투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북조선에서 넘어온 지하 혁명당이오. 일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고 있소."

공포감에 아찔했지만, 우씨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버텼어요. '이북은 어버이 수령의 햇살을 받아 온 인민이 골고루 잘 살고 대학도 무료로 보내준다'더군요. '거기서 살면 좋겠다. 여기서는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겨우 먹고산다'고 계속 이야기했죠."

저녁이 돼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공작원들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공산당 입당 원서를 건넸다. 우씨 형제는 허겁지겁 서명했다. 우씨는 "목숨이 날아갈 위기인데 100장인들 못 써 주겠나"라고 웃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들을 딱하게 보던 공작원들이 주섬주섬 짐을 풀더니 보상이라며 일본제 손목시계를 주고는 돌려보냈다. "6개월 뒤에 다시 올 테니 그때 만나자는 증표"라고 했다. 우씨의 얼굴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제대로 먹지 못해서 말랐다"며 혀를 찼다.

"신고하면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에도 우씨 형제는 그 길로 파출소에 들러 신고했으나 경찰은 한동안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1·21사태 당시 군경과 무장공비 교전 중 총탄 흔적 남은 북악산 소나무
[연합뉴스 자료사진]


군경이 소탕 작전에 들어가 차단선을 설치하는 것을 본 공작원들은 우씨 형제의 신고 사실을 알아챘다.

이들은 시속 10㎞로 행군해 1월 21일 밤 청와대 500m 코앞인 자하문고개까지 침투했으나 군경과의 교전 끝에 김 목사 홀로 생포됐다.

김 목사의 딸(53)은 "아버지께서 수류탄으로 자폭하려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생각에 살고 싶다는 본능이 들며 두 손을 드셨다더라"며 "평생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3천여회의 안보 강연을 다니셨다"고 울먹였다.

이후 귀순한 김 목사와 우씨는 최근까지 여러 차례 왕래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우씨는 무장 공비를 신고한 공로로 경찰관이 돼 2005년 퇴직했다.

우씨는 김 목사가 1997년 서울성락교회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도 참석해 누구보다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김 목사는 생전 여러 차례 "우씨 형제가 대한민국을 살렸다"며 치켜세웠다.

김 목사와 호형호제하며 지낸 우씨는 "지난해 여름 치매를 앓고 계신 중에도 동생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우씨는 조문 후 김 목사 아내의 손을 맞잡고 한동안 놓지 못했다. 기념사진을 찍는 우씨와 유족들 뒤로 영정사진 속 김 목사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2011년 육군 25사단 장병에게 침투 과정 설명하는 김신조 목사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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