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 워싱턴DC에서 열린 공화당의회위원회(NRCC) 만찬에서 연설 중이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많은 나라들은 우리를 엄청나게 갈취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갈취할 차례”라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일에서 3년 4개월 만에 좌우를 아우르는 ‘대연정’ 출범이 임박했다. 애초 정치적 이념 차이가 커서 독일의 연립정부 구성이 늦어질 거란 예상이 우세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에 놀란 독일 정치인들이 서둘러 연정 타협에 나선 것이다.
8일(현지시간) 슈피겔 등에 따르면 연정 구성을 두고 협상 중인 중도우파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이 최종 협상 타결을 앞두고 있다. 독일 보도전문 방송 ntv는 “두 정당이 다음달 6일을 연방 총리 선출 날짜로 협의 중”이라고 전했다.
기민·기사 연합과 사민당은 지난 2월 총선에서 각각 1당과 3당을 차지했다. 양당은 2당에 올라선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을 배제하기 위해 함께 연정을 구성하는 협상을 일찌감치 진행했었다. 하지만 주요 정책에 대한 입장 차가 커서 타결에 시일이 걸릴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예를 들면 국방 문제에서 기민·기사 연합은 독일 자체 국방 강화를, 사민당은 유럽차원의 통합 방위를 기본 노선으로 하고 있다. 재정 정책에서도 기민·기사 연합은 긴축을, 사민당은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을 선호한다.
독일의 차기 총리에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 대표. 지난달 28일 독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가 던진 돌에 사정이 달라졌다. 1차 충격은 트럼프의 방위비 인상 요구였다. 독일은 헌법에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0.35% 이내로 제한하는 ‘부채 브레이크 조항’을 두고 있어 GDP의 2% 수준인 현 방위비를 트럼프의 요구치(GDP의 5% 수준)에 당장 맞추기가 불가능한 구조다.
그런데 돌연 기민·기사 연합은 재정 긴축을 버리고 방위비를 무제한 지출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개헌을 지난달 단행했다. 개헌에 협조한 사민당은 5000억 유로(약 819조2750억원)에 달하는 인프라 투자 예산 확보란 대가를 얻어냈다.
지난 2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것도 독일 정치권을 자극했다. 슈피겔은 “(차기 총리에 오를)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는 '미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 국방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다만 이때만 해도 두 정당의 동맹을 일시적인 것으로 독일 언론은 관측했다. 이민 정책처럼 독일 국내에서 민감한 사안을 두고 두 정당이 타협할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상호관세(9일 발효)를 예고하자, 독일 정치권은 2차 충격을 받았다. “연간 130억 유로(약 21조3010억원)의 수출 손실”(킬 세계경제연구소) 같은 구체적인 전망이 나오자, 두 정당이 더 이상 줄다리기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ntv는 “두 정당 대표가 연정 협상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서 낙관주의가 싹트고 있다”며 “독일은 러시아에도 맞서야 하고, 동시에 미국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전했다.
트럼프의 유럽 내 미군 감축 위협도 독일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다. 실제 미국이 동유럽 주둔 미군을 1만명 수준까지 감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8일 미 NBC뉴스는 복수의 미국과 유럽 당국자를 인용해 "미 국방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루마니아 등 우크라이나 접경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2022년 파병한 미군 2만명 중 절반을 줄이는 방안으로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