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헬리콥터』제임스 리 인터뷰
기존 미국 출판시장에서 리더십 관련 경제·경영서는 백인 남성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하퍼콜린스가 비주류 동양 남성을 리더십 저자로 처음 선택한 거다. 그가 하버드 학부와 로스쿨을 나와, 미국 사회 핵심 주류로 꼽히는 대형 사모펀드 출신 변호사이자 금융인·투자자·기업가·교육가여서 고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민자 부모를 둔 소수자가 주류 엘리트 사회에 편입하려고 세상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는커녕 기존 통념에 반하는 다정함(kindness)과 호의(goodwill·회계상 무형자산)라는 생소한 경영 전략을 제시해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업 회생으로 주목받은 한국계
엄마의 다정함으로 경영 전략 바꿔
성공 재정의로 삶 변화까지 이끌어
'폭삭' 연상 이민자 부모 희생 뭉클
업계,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면에서 아무 접점 없던 회사에 그는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이런 궁금증은 유통업계와 경영학계 등 미국 사회 전반이 그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 등 경영 잡지부터 보스턴 글로브와 워싱턴포스트·CNN·ABC 등이 그의 비즈니스 전략을 다뤘다. TED 등 숱한 강연 무대에 섰고, EY 최우수 기업가상 등 영예로운 상도 많이 받았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과 하워드대(존슨 기업가정신 석좌교수) 등에서 강의도 한다.
1막 제임스와 레드 헬리콥터 수십억 달러(수조 원)를 운용하는 보스턴 사모펀드 맨으로서 난 3년 전인 2010년 애슐리스튜어트를 파산에서 구한 당사자였다. 전문 경영인을 닥달해 기업 가치를 올려 매각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이사회 의장으로 3년을 지켜봤지만 경영은 날로 악화했다. 이대로 가면 회사 청산까지 6주밖에 남지 않았다. 직원이나 고객에겐 신경 끄고 자본을 많이 회수해야 했다. 냉혹한 사모펀드 업계에선 그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펀드 동료는 물론 부모님마저 "미쳤어?"라고 물을 만큼 비상식적 선택을 했다. 6개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애슐리스튜어트 본사가 있는 뉴저지 세카우커스로 날아가 직접 경영에 나선 거다.
그땐 왜 이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애슐리스튜어트가 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진료실처럼, 그리고 영어에 서툰 어머니가 들어서는 순간 바로 어깨를 펼 수 있던 한국 식료품점처럼, 애슐리스튜어트는 단순히 옷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못 받는 흑인 여성들이 자존감을 충전하는 안전지대라는 걸. 세상엔 다정함이 더 필요하다는 걸.
지금도 그때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자부심 그득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어릴 적 누구나 알았지만 다들 잊고 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애슐리스튜어트에서의 출근 첫날 타운홀 미팅에서 즉흥적으로 끄집어내 이렇게 말했다. "다정함(kindness)과 수학(math)을 회사 중심에 두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어요. "
2막 필리스와 한국식료품점 부모님은 한국에선 서울대 의대와 간호학과 나온 엘리트 부부였지만, 백인 동네 롱아일랜드 교외에선 모든 면에서 한두 박자 뒤처진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었다. 어떻게든 섞이려고 이름부터 바꿨다. 어머니는 화자에서 필리스가 됐다. 1966년에 먼저 이민 온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막 태어난 큰아들을 시부모에 맡기고 온 필리스는 둘째인 내가 태어나고도 1년 뒤에야 다섯 살 큰아들과 재회했다. 종일 가족에 헌신하느라 필리스의 영어 실력은 늘 수 없었다.
그런데 부당한 소송에 휘말려 아버지의 작은 소아과가 위기에 처하자, 전업주부로만 25년 산 필리스는 셋째까지 모두 대학에 보낸 뒤 영어로 간호사 자격증을 다시 따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요양원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며 가정을 지켰다. 남편 유찬, 아니 매튜의 장장 15년에 걸친 파킨슨 투병 치료비도 필리스의 요양원 의료보험 덕분에 가능했다.
백인 사이에서 말없이 미소 짓다 한인 식료품점에 가서야 고갯짓이 달라지던 엄마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오해했다. 열두세 살쯤 엄마가 철물점에 갔다가 녹 제거제가 영어로 뭔지 몰라 점원으로부터 모욕당한 적이 있다. 레슬링부로 덩치 좋던 나는 점원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 사장은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를 걸어와 엄마에게 "점원을 해고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하고 부끄러워했다.
한참 뒤에 알았다. 엄마는 일상의 수모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두지 않고 본인 기준으로 인생을 측정하는 사람이었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등 온갖 불공정을 당하고도 그토록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나약함으로 착각했던 강인함 덕분이었다. 엄마는 입대하는 이웃 청년을 위해 우리도 비싸서 자주 못 먹는 갈비를 구웠다. 배관공 등 우리 집에 온 누구든 얼음물을 쟁반에 받쳐 제대로 대접했다. 난 이런 다정함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그리고 엄마의 이런 한국식 정(情)은 우리 삼 남매를 넘어 모두에게 확장됐다. 엄마는 식료품점에서나 겨우 당당한 게 아니라, 자기 세상에서 원래 당당한 사람이었다.
3막 다시, 제임스와 애슐리스튜어트 갑작스런 췌장암 선고를 받고 불과 수개월 만에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 후 백화점 체인 메이시스 CEO가 부탁한 임직원 상대 연설에서 한 직원이 물었다. "남들 가치판단에 휩쓸리지 않고 어릴 적 알던 단순한 진리가 옳은 해법이라는 새 관점을 제시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 용기가 어디서 나왔느냐"고. 주저 없이 답했다. "엄마와의 연대감. "한국말 서툰 아들과 영어 서툰 엄마와의 언어 장벽은 때로 답답하긴 했으나 우리 유대를 방해하진 못했다. 지금도 DEI(다양성 정책)니 CSR(사회적 책임)·ESG(지속가능성) 같은 업계 약어나 복잡한 수사법에 반감이 있는데, 아마 이런 배경 때문일 거다.
엄마는 나를 무조건 사랑했지만 억누르진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고 실수할 여지를 허락했다. 하버드 졸업 후 세상이 하버드 출신에 기대하는 번듯한 직장 대신 연봉 1만2500달러짜리 고교 선생으로 2년 근무할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본인 삶의 결핍이라 여긴 안정과 소속감을 자식들만큼은 누리기 바랐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지 역경은 내게 위험을 감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니냐, 하버드가 자랑스럽지만 하버드가 되고 싶진 않다"고 대들었다. 집 담보로 학비 댄 입장에서 어이없는 보상에 실망할 법도 한데, 엄마는 아버지를 달랬다. "괜찮아. 내버려 둬요. "
국선 변호사 되려고 로스쿨에 갔지만 매년 4만 달러씩 쌓이는 빚 앞에서 결국 사모펀드를 택해 수십억 달러 굴리며 전용기 타고 다닐 때도 부모님은 돈이란 세속적 성공을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되려 "남들이 네 성공을 진정 기뻐해야 진짜 성공"이라 했다.
리더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수년,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평가받는다는 걸 안다. 엄마의 삶으로 그걸 배운 덕분에 난 애슐리스튜어트에서 타인의 주도성을 인정하는 다정함으로 자격 있는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우며 기업을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너는 나가"라는 배제 대신 "같이 가자"라는 다정함을 감히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손익계산서와 달리 삶의 총합인 대차대조표엔 과거 평판이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여 있다. 인생의 진정한 자산과 부채를 재평가해서, 성공을 재정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많은 한국 남성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내 말이 변화를 이뤄낸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거 같다. “철중아, 수고했다. 사랑한다. 제임스.”
지난 4일 오전 일찍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레드 헬리콥터』저자인 제임스 리를 만났다. 그는 한국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임현동 기자
지난해 4월 미국에서 이례적인 책 한 권이 나왔다. 노벨 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자를 수없이 배출한 오랜 전통의 미국 메이저 출판사 하퍼콜린스가 출간한 한국계 제임스 리(54)의『레드 헬리콥터』다.
기존 미국 출판시장에서 리더십 관련 경제·경영서는 백인 남성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하퍼콜린스가 비주류 동양 남성을 리더십 저자로 처음 선택한 거다. 그가 하버드 학부와 로스쿨을 나와, 미국 사회 핵심 주류로 꼽히는 대형 사모펀드 출신 변호사이자 금융인·투자자·기업가·교육가여서 고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민자 부모를 둔 소수자가 주류 엘리트 사회에 편입하려고 세상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는커녕 기존 통념에 반하는 다정함(kindness)과 호의(goodwill·회계상 무형자산)라는 생소한 경영 전략을 제시해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레드 헬리콥터』는 지난해 출간 후 일론 머스크 전기와 버크셔 헤서웨이 찰리 멍거 책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야말로 망하기 직전, 그가 딱 6개월만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하러 간 흑인 저소득층 플러스 사이즈 여성을 위한 의류 브랜드 애슐리스튜어트 얘기다. 두 차례 파산 직전까지 갔던 이 회사는 제임스 리 부임 2년 만에 흑자 전환, 7년 만에 엄청난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팔렸다.
기업 회생으로 주목받은 한국계
엄마의 다정함으로 경영 전략 바꿔
성공 재정의로 삶 변화까지 이끌어
'폭삭' 연상 이민자 부모 희생 뭉클
업계, 인종, 젠더, 지역 등 모든 면에서 아무 접점 없던 회사에 그는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이런 궁금증은 유통업계와 경영학계 등 미국 사회 전반이 그를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 등 경영 잡지부터 보스턴 글로브와 워싱턴포스트·CNN·ABC 등이 그의 비즈니스 전략을 다뤘다. TED 등 숱한 강연 무대에 섰고, EY 최우수 기업가상 등 영예로운 상도 많이 받았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과 하워드대(존슨 기업가정신 석좌교수) 등에서 강의도 한다.
한 미디어 행사에서 패널로 나온 걸그룹 르세라핌 허윤진과 함께. 르세라핌은 지난해 코첼라 무대로 가창력 논란에 시달렸는데, 허윤진은 이 책 덕에 우울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사진 제임스 리]
지난해 12월 한국어판 출간 후 최근 한국에 다녀간 그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로 시끄러웠던 지난 4일 만났다. 평범한 경영서로 알고 책을 펼쳤다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천한『H마트에서 울다』나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저리 가라 할 그의 부모 인생 궤적에 눈물깨나 흘렸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제임스 리에 영향을 끼친 부모 인생을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1막 제임스와 레드 헬리콥터 수십억 달러(수조 원)를 운용하는 보스턴 사모펀드 맨으로서 난 3년 전인 2010년 애슐리스튜어트를 파산에서 구한 당사자였다. 전문 경영인을 닥달해 기업 가치를 올려 매각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이사회 의장으로 3년을 지켜봤지만 경영은 날로 악화했다. 이대로 가면 회사 청산까지 6주밖에 남지 않았다. 직원이나 고객에겐 신경 끄고 자본을 많이 회수해야 했다. 냉혹한 사모펀드 업계에선 그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펀드 동료는 물론 부모님마저 "미쳤어?"라고 물을 만큼 비상식적 선택을 했다. 6개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애슐리스튜어트 본사가 있는 뉴저지 세카우커스로 날아가 직접 경영에 나선 거다.
그땐 왜 이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애슐리스튜어트가 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진료실처럼, 그리고 영어에 서툰 어머니가 들어서는 순간 바로 어깨를 펼 수 있던 한국 식료품점처럼, 애슐리스튜어트는 단순히 옷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못 받는 흑인 여성들이 자존감을 충전하는 안전지대라는 걸. 세상엔 다정함이 더 필요하다는 걸.
독자와 아버지 사진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즐겼던 노래를 부르는 제임스 리. [사진 제임스 리]
그래서였을까. 와이파이 없는 허름한 본사 건물로 출근한 첫날, 40년 가까이 완전히 잊고 있던 레드 헬리콥터가 불현듯 떠올랐다. 5살 어느 날 친구 아빠가 유치원에 찾아와 줬던 바로 그 빨간색 장난감 헬리콥터 말이다. 종종 내가 도시락을 나눠줬던 친구 아빠의 선물이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아내를 잃고 갑자기 자녀 넷을 혼자 책임지게 된 친구 아빠가 막내아들인 점심을 챙기지 못할 때마다 난 도시락을 나눴고, 이에 레드 헬리콥터로 고마움을 전한 거였다. 내 다정함을 친구 아빠는 온전한 호의로 갚았다.
지금도 그때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자부심 그득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어릴 적 누구나 알았지만 다들 잊고 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애슐리스튜어트에서의 출근 첫날 타운홀 미팅에서 즉흥적으로 끄집어내 이렇게 말했다. "다정함(kindness)과 수학(math)을 회사 중심에 두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어요. "
지난 2019년 애슐리스튜어트 매장을 찾은 배우 우피 골드버그(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우피 골드버그는 제임스 리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사진 제임스 리 X 캡처]
미국에서 한인과 흑인 사회의 반목을 고려할 때 패션 문외한인 사모펀드 출신 한국인을 거부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나도 학벌 같은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마법의 묘약 없이, 단지 투명함을 바탕으로 성공을 재정의하는 것으로 비즈니스는 물론 우리 모두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이뤘다.
2막 필리스와 한국식료품점 부모님은 한국에선 서울대 의대와 간호학과 나온 엘리트 부부였지만, 백인 동네 롱아일랜드 교외에선 모든 면에서 한두 박자 뒤처진 유일한 동양인 가족이었다. 어떻게든 섞이려고 이름부터 바꿨다. 어머니는 화자에서 필리스가 됐다. 1966년에 먼저 이민 온 아버지와 합류하기 위해 막 태어난 큰아들을 시부모에 맡기고 온 필리스는 둘째인 내가 태어나고도 1년 뒤에야 다섯 살 큰아들과 재회했다. 종일 가족에 헌신하느라 필리스의 영어 실력은 늘 수 없었다.
그런데 부당한 소송에 휘말려 아버지의 작은 소아과가 위기에 처하자, 전업주부로만 25년 산 필리스는 셋째까지 모두 대학에 보낸 뒤 영어로 간호사 자격증을 다시 따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요양원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며 가정을 지켰다. 남편 유찬, 아니 매튜의 장장 15년에 걸친 파킨슨 투병 치료비도 필리스의 요양원 의료보험 덕분에 가능했다.
백인 사이에서 말없이 미소 짓다 한인 식료품점에 가서야 고갯짓이 달라지던 엄마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오해했다. 열두세 살쯤 엄마가 철물점에 갔다가 녹 제거제가 영어로 뭔지 몰라 점원으로부터 모욕당한 적이 있다. 레슬링부로 덩치 좋던 나는 점원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 사장은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를 걸어와 엄마에게 "점원을 해고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하고 부끄러워했다.
한참 뒤에 알았다. 엄마는 일상의 수모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두지 않고 본인 기준으로 인생을 측정하는 사람이었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등 온갖 불공정을 당하고도 그토록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나약함으로 착각했던 강인함 덕분이었다. 엄마는 입대하는 이웃 청년을 위해 우리도 비싸서 자주 못 먹는 갈비를 구웠다. 배관공 등 우리 집에 온 누구든 얼음물을 쟁반에 받쳐 제대로 대접했다. 난 이런 다정함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그리고 엄마의 이런 한국식 정(情)은 우리 삼 남매를 넘어 모두에게 확장됐다. 엄마는 식료품점에서나 겨우 당당한 게 아니라, 자기 세상에서 원래 당당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리는 애슐리스튜어트에 엄마가 보여준 '다정함'을 비즈니스 전략으로 접목해 성공시켰다. 최근 서울에서의 한 강연에서 엄마와 애슐리스튜어트 흑인 여성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사진 제임스리]
그런 엄마도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형이나 여동생과 싸울 때마다 늘 "우리 다섯 식구가 전부"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알리지도 않았는데 장례식장에 날아와 엄마를 안아주며 위로하던 애슐리스튜어트 흑인 여성들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이 여성들은 나네, 그렇지?" 치료비 없이 진료받았던 아빠 환자들의 애도 편지도 끊이지 않았다. 온 세상이 그 방에 있었다. 언제나 다섯 이상이었다. 엄마가 틀렸다.
3막 다시, 제임스와 애슐리스튜어트 갑작스런 췌장암 선고를 받고 불과 수개월 만에 돌아가신 엄마의 장례식 후 백화점 체인 메이시스 CEO가 부탁한 임직원 상대 연설에서 한 직원이 물었다. "남들 가치판단에 휩쓸리지 않고 어릴 적 알던 단순한 진리가 옳은 해법이라는 새 관점을 제시해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 용기가 어디서 나왔느냐"고. 주저 없이 답했다. "엄마와의 연대감. "한국말 서툰 아들과 영어 서툰 엄마와의 언어 장벽은 때로 답답하긴 했으나 우리 유대를 방해하진 못했다. 지금도 DEI(다양성 정책)니 CSR(사회적 책임)·ESG(지속가능성) 같은 업계 약어나 복잡한 수사법에 반감이 있는데, 아마 이런 배경 때문일 거다.
엄마는 나를 무조건 사랑했지만 억누르진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고 실수할 여지를 허락했다. 하버드 졸업 후 세상이 하버드 출신에 기대하는 번듯한 직장 대신 연봉 1만2500달러짜리 고교 선생으로 2년 근무할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본인 삶의 결핍이라 여긴 안정과 소속감을 자식들만큼은 누리기 바랐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지 역경은 내게 위험을 감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니냐, 하버드가 자랑스럽지만 하버드가 되고 싶진 않다"고 대들었다. 집 담보로 학비 댄 입장에서 어이없는 보상에 실망할 법도 한데, 엄마는 아버지를 달랬다. "괜찮아. 내버려 둬요. "
영화배우 맷 데이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 하버드 시절 친구들과 함께. 제임스 리는 늘 학교는 물론 사회적 모임에서 언제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사진 제임스 리]
하버드 로스쿨 시절 만난 아내 메그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부유한 백인 가정에서 자란 명문 기숙학교 필립스 앤도버 출신이라 그런지 1학년 여름 인턴을 쉽게 구했다. "왜 일자리 못 구했느냐"는 아버지한테 "인맥 없잖아요"라고 내뱉었다. 그 말에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부모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시켜도 아이들은 세파에 다치기 마련인데, 부모 마음에 못을 박았다.
국선 변호사 되려고 로스쿨에 갔지만 매년 4만 달러씩 쌓이는 빚 앞에서 결국 사모펀드를 택해 수십억 달러 굴리며 전용기 타고 다닐 때도 부모님은 돈이란 세속적 성공을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되려 "남들이 네 성공을 진정 기뻐해야 진짜 성공"이라 했다.
리더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수년,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평가받는다는 걸 안다. 엄마의 삶으로 그걸 배운 덕분에 난 애슐리스튜어트에서 타인의 주도성을 인정하는 다정함으로 자격 있는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우며 기업을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너는 나가"라는 배제 대신 "같이 가자"라는 다정함을 감히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손익계산서와 달리 삶의 총합인 대차대조표엔 과거 평판이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여 있다. 인생의 진정한 자산과 부채를 재평가해서, 성공을 재정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많은 한국 남성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내 말이 변화를 이뤄낸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거 같다. “철중아, 수고했다. 사랑한다. 제임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