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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5년간 31차례 경찰 신고·고소
가해자 폭행죄로 감옥행…출소 뒤 또 폭력
방화치사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2년 선고
양형 사유엔 교제폭력 피해 언급 전혀 없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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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일부 독자에게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과 이미지가 포함돼 있습니다.

수없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미안해. 다시는 때리지 않을게”라는 말을 믿었다. 2019년 시작된 ‘교제폭력의 악순환’은 2024년 5월11일, 가해자가 죽고서야 끝났다. 이날 새벽 전북 군산에서 1982년생 여성 김은지(가명·43)는 전 연인이자 가해자인 ㄱ(당시 38)의 집에 불을 냈고 ㄱ은 전신 화상 등으로 숨졌다. 그해 9월, 김은지는 ㄱ을 살해한 혐의(현주건조물방화치사)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약 5년 동안 교제폭력에 시달려온 피해자는 어쩌다 가해자가 됐을까. 그가 겪은 ‘폭력의 역사’를 제대로 살펴야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한겨레는 이 사건의 1심 판결문과 수사·재판 기록, 112신고 내역, 피고인 인터뷰를 토대로 교제 시작부터 방화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되짚었다.

김은지가 겪은 ‘폭력의 역사’

김은지는 어린 시절부터 외로웠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해 어머니가 집을 나갔고, 정서적 어려움을 겪다 10대 때부터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 한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이를 지속하긴 어려웠다. 친척이 빌려준 전북 익산의 한 농갓집에서 아버지와 살며 국민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을 만큼 곤궁했다. 알코올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수차례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완전히 끊지 못하고 약물 치료를 이어갔다. 2019년 여름 잠시 노래방 접객원으로 일하다 손님으로 온 ㄱ에게 “첫눈에 반해” 교제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주로 ㄱ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ㄱ은 술에 취하면 “전 남친이랑 좋았냐?”는 등 ‘과거 남자’ 이야기를 꺼내며 김은지를 때렸다. 경찰이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에 제출한 ‘112신고 사건 처리 내역’(2022~2023년) 자료와 재판기록 등을 종합하면, 김은지는 2019년 7월부터 2023년 5월까지 모두 112신고, 고소 등을 통해 모두 31차례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렸다. 피해 초기(2019~2021년)엔 ㄱ의 폭력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쌍방폭행 혐의로 입건됐고 상호 처벌불원(양쪽 모두 처벌을 원하지 않음) 의사에 따라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연인·배우자를 비롯한 친밀한 관계 간 폭력은 ‘사적인 일’로 인식돼 국가가 적극적 개입을 하지 않는 동안 반복·지속적으로 발생하며, 그 강도가 점차 심해지는 특성이 있다. ㄱ의 폭력 수위도 2021년말을 기점으로 한층 높아졌다. 김은지의 머리나 뺨 등을 때리는 데서 목을 조르는 행위로 나아갔다.

김은지의 구조 요청도 잦아졌다. “살려주세요”(2022년 6월11일, 10월23일 112신고 문자) “와주세요 제발”(2023년 5월6일 112신고 문자) 2022년 10월23일, ㄱ이 김은지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때리고 담뱃불로 다치게 했다. 얼굴을 집중적으로 때려 김은지는 안와골절로 시력이 감퇴(외상성 시신경병증)한 상태다. 피해 신고가 반복되자 익산·군산경찰서는 2022년 7월6일~9월13일, 10월27일~11월10일, 2023년 4월28일~5월11일 총 3차례 김은지에 대한 안전조치(스마트워치 지급, 맞춤형 순찰 등)를 시행했지만, 폭력의 굴레를 끊기에는 역부족이었다. ㄱ의 사과와 회유, 위협감은 무엇보다 질기고 공고했다. 함께 사는 아버지 외에 친구나 직장 동료 등 사회적 관계가 부재한 김은지에겐 ㄱ이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했다.

김은지가 전북 익산에 있는 ㅇ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 모습. 김은지는 ㄱ이 외출하기 어렵도록 얼굴을 집중적으로 때렸다고 기억한다. 목을 조르고 복부 등 몸 곳곳을 발로 차기도 했다. 왼쪽부터 2021년 11월11일, 2022년 9월22일 ㅇ병원 의무기록 일부. 김은지 가족 제공

경찰은 김은지에게 쉼터(보호시설) 입소 등을 권했으나 피해자가 이를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심각한 폭력 피해에도 김은지는 왜 가해자를 떠나지 못했을까? 광주여성의전화 부설 광주여성인권상담소 한솔 정책홍보팀장은 “친밀한 관계 간 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 가족 등 사소한 정보까지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경제·정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 사건에서 가해자의 통제로 인해 피해자가 전반적인 생활 영역에서 고립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용혜인 의원은 “경찰이 ‘교제 폭력 피해자가 원치 않았다’는 말 뒤에 숨지 않고 피해자 보호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김은지는 수년 동안 학대를 겪으며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ㄱ을 떠나는 게 머무르는 것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무력감을 학습하고 있었다. 그는 ㄱ과 교제 이후 중증 우울증과 불안장애, 비기질성 불면증, 망상·환각·혼란 같은 정신과적 질환을 얻었다. 김은지는 경찰 조사에서 ‘(ㄱ에) 맞서 싸운 일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가만히 있어야 덜 맞아요. 그게 제일 덜 맞는 거예요.”

2024년 5월10일은 ㄱ이 김은지를 심각하게 폭행해 1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정지된 자신의 휴대전화 대신 친척 휴대전화로 연락해 “정말 때리지 않는다”며 집으로 와달라 애원했다. 과거 ㄱ의 요청을 거부하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난동을 피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까지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ㄱ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준 친척이 집에 있으니 단 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애써 안심했다. ㄱ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수차례 사과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믿고 찾아간 집에서 폭력이 되풀이 됐다. 5월10일 저녁에 ㄱ의 집으로 간 김은지는, 전보다 폭력 수위가 한층 강해졌다고 느꼈다. 술에 취한 ㄱ은 “너 때문에 감옥갔다”고 김은지를 원망하며 목을 졸랐다.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턱 부위가 찢어져 티셔츠와 바지에 피가 흘렀다. 만취한 ㄱ이 잠에 든 11일 새벽, 김은지는 논밭에 둘러싸인 그 집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ㄱ에게 휴대전화를 빼앗겨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찾다가 ㄱ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때릴까 두려웠다. 집 바깥을 서성이다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안방문 틈새로 ㄱ이 자는 모습이 보였다. 거실에 있던 이불에 불을 붙이고 집 바깥 별채(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교제폭력 피해 맥락 지운 수사·재판

1심 재판부는 “ㄱ이 술에 취해 잠이 든 사실을 알면서도 집에 불을 질러 사망하게 했다”며 김은지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김은지도 만취한 상태였다. 사건 발생 직후인 5월11일~17일) 경찰과 검찰 신문조서를 보면 김은지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ㄱ을 보며 “(나를) 죽일듯이 패놓고 저렇게 잠이 오나하는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집에 불이 나게 해 골탕이나 먹어봐라 하는 마음으로 불을 붙였다. (불이 나면) 피해자가 깰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진술도 있다. 수사기관은 ㄱ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혼란을 겪는 김은지가 살인을 ‘자백’한 것처럼 보이는 진술에만 집중했다.

지난달 6일 전국 34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6일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천경석 기자

“피고인(김은지)은 평소 피해자(ㄱ)의 반복된 폭력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1심 재판부가 판결문 첫머리에 쓴 문장이다. ‘원한을 품고 앙갚음하려고 벼르는 마음’을 뜻하는 앙심은, 체포·구속영장, 공소장에 모두 등장한다. 수사·사법기관이 김은지가 ㄱ의 집에 불을 지른 주요 동기로서 교제폭력 피해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은지가 ㄱ의 집에서 느낀 주된 감정은 “또 맞았다”는 좌절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1심 재판부는 단 두 차례 공판 뒤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징역 20년)보다 낮은 형이지만 양형 사유엔 김은지가 겪은 교제폭력 피해는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김은지와 검찰 모두 항소했다. 최근 김은지의 상황을 알게 된 호남여성시민들의 모임 ‘비호’ 등 전국 34개 단체는 ‘군산 교제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꾸렸다. 공대위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오랫동안 교제폭력에 시달린 맥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공대위는 “죽기 직전까지 맞아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김은지의 방화는 가해자가 죽기를 바라는 ‘앙심’이 아니라, 그저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라고 했다.

항소심(광주고등법원 전주재판부 형사1부) 마지막 공판이 열린 2일 법정에 김은지와 함께 하기 위한 활동가와 시민 100여명이 모였다. 판사가 “시민 4천여명이 피고인을 선처해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김은지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항소심 선고는 오는 9일로 예정됐다. 검찰은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김효실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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