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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존립 위기의 차이나타운
북미 최대 규모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유동인구 급감·중국 관세 상향 등에 휘청
이소룡 동상 건립 등으로 유산 보존 추진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중심부의 한 건물 외벽에 미국 태생의 중국계 영화배우 브루스 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화려한 붉은 지붕과 용 조형물, 딤섬 향기가 넘실거리는 타운 중심부의 한 건물 외벽 앞에서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들을 붙든 건 한국에서는 이소룡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중국계 영화배우, 고(故) 브루스 리의 벽화였다.

브루스 리는 1940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태어났다. 차이나타운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는 각별한 의미다. 단순히 이곳 출신 유명 배우라서가 아니다. 그는 할리우드가 중국인을 찢어진 눈에 변발을 한 사람으로만 묘사하던 시절, 이 같은 인종적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상업영화에서 중국 문화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 5편의 장편 영화만 남기고 떠난 그를 차이나타운이 대형 벽화를 통해 영원히 기억하려는 이유다.

최근 차이나타운은 그를 기리기 위한 새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타운 내 포츠머스 광장에 2m
높이 브루스 리 동상을 세우는 것
이다. 미국 중국역사학회는 이달 초 차이나타운에서 브루스 리 동상 건립 프로젝트 출범식을 열고 총 25만 달러(약 3억6,650만 원)를 모금해 앞으로 3~5년 내 동상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이 프로젝트에 5만 달러를 기부한 로즈 팍 커뮤니티 기금의 고레티 로 루이 부대표는 "그가 태어난 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다면 아주 적절한 헌사가 될 것"이라며 "전 세계인들이 순례하듯 찾는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브루스 리 동상을 세우자는 제안은 예전부터 꾸준히 있었으나, 지금에서야 이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70여 년 역사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이 요즘 존립 위기에 처해 있는 탓이다. 자니스 페티 미국 중국역사학회 사무총장은 출범식에서 "
이번 프로젝트는
아시아인 및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혐오에 맞서 연대 의식을 고양하는 것이 목적
"이라고 말했다. 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것을 넘어, 미국 내 중국인 커뮤니티를 지켜내기 위한 시도라는 얘기다.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거리 위에 홍등이 매달려 있다. 길 양쪽으로는 중국어 간판을 단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차별, 배제에도 살아남은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 약 1.3㎢, 24개 블록에 걸쳐 뻗어 있는 차이나타운은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자, 아시아 외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국인 거주지 중 하나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와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계기로 광둥성과 홍콩에서 이주해 온 이들에 의해 처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낯선 땅에서 함께 외로움을 달래려는 이민자들이 샌프란시스코 포츠머스 광장 주변에 모여 살기 시작했고, 광장을 중심으로 중국 음식점과 식료품점, 의약품점, 사원 등이 잇따라 생겨나며 이 일대는 '미국 안의 중국'으로 발전했다.

미국 내 많은 아시아계 집단 거주 지역처럼 이곳 차이나타운도 샌프란시스코 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곧 차별과 배제, 재난을 이겨낸 이들의 발자취다.

1882년 제정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은 첫 번째 위기였다. 중국인들의 노동 시장 유입에 따른 백인들의 위기감이 커지면서, 당시 미국 연방 의회는 중국인의 시민권 취득과 신규 이민 금지를 골자로 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10년간 유효한 법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반복적으로 연장되며 사실상 60년 지속됐다. 이에 따라 차이나타운은 가족 없이 홀로 사는 남성 노동자 위주로 채워졌고, 빈곤과 과밀, 열악한 위생환경의 '길디드 게토'(Gilded Ghetto·겉은 화려하지만 고립된 공간)로 낙인찍혔다. 그렇게 차이나타운은 점차 축소되고 고립됐다.

여기에 1906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로 차이나타운은 소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이곳의 대부분 건물이 전소되자, 시당국과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이를 틈타 중국인들을 도심 외곽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항의와 지역 상인들의 단호한 저항 끝에 차이나타운은 원래 위치에 재건될 수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재건 과정에서 중국풍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새로 들어섰고, 중국 도시를 빼닮은 특유의 분위기가 미국인들의 호기심과 환상을 만족시키며 차이나타운은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차이나타운은 또 한번 변화를 겪는다. 인종 기반 이민쿼터제가 폐지되면서 대만과 중국 본토에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이에 따라 광둥어 이용자가 주류를 이루던 차이나타운은 보통화 이용자가 증가했고 젊은 층도 크게 늘었다. 인구 과밀화에 중산층 이민자들부터 거주 환경이 나은 샌프란시스코 외곽 리치몬드, 실리콘밸리로 거주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은 점차 상대적으로 형편이 좋지 않거나 영어 소통이 어려운 노년층 중심 커뮤니티로 변화했다. 샌프란시스코시에 따르면, 차이나타운은 뉴욕 맨해튼을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주민 대다수가 단칸방에 거주하고 있으며, 2013년 기준 평균 가구 소득은 2만 달러로 샌프란시스코 평균의 30% 수준에 불과했다.

바꿔 말하면 차이나타운은 이들 거주자들에게 문화·경제적 안전망이다.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기댈 곳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차이나타운이라는 얘기다.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식료품점에서 거주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제품의 약 80%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이 가게는 최근 미국 정부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상향하면서 직격타를 맞았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모든 이민자 유산은 보존돼야 한다"



숱한 위기를 극복해 온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요즘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의
차이나타운 상권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국인 혐오 정서가 확산하고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 타운의 노후화와 고령화, 캘리포니아 전반에 걸친 임대료 상승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이나타운 거주민들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최근 찾은 차이나타운은 지역 거주민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바빠 보였지만, 차이나타운 인포메이션 센터의 한 직원은 "팬데믹 전과 비교하면 유동인구가 60%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길 건너편의 문 닫힌 한 식당을 가리키며 "110년이 넘은 유명 중식당인데 올해 초 문을 닫았다.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른다"며 "손님이 줄어드니 고가의 임대료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중국어 간판을 단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중국에서 볼 법한 건물들과 샌프란시스코 도심 건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위기는 불행히도 더 악화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2018년 이래 유지되던 중국산 수입품 관세를 상향하면서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월 4일 중국산 수입품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지난 4일에는 추가 관세율을 20%까지 끌어올렸다.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차이나타운에 추가 관세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
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앨런 사이크스 스탠퍼드대 국제통상학 교수는 "중국산 제품은 미국에 대체재가 없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직결된다"고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말했다.
차이나타운 상점들이 주로 수입하는 한약재, 견과류, 호랑이연고 등은
미국에서 아예 생산되지 않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 한다. 중국 식료품을 판매하는 차이나타운의 한 식료품점 점원 그레이스 위는 "제품 80% 이상을 중국에서 들여오고 있어서 수입가격이 크게 올랐다"며 "(그런데) 고객 대부분이 고정 수입으로 사는 사람들이라 가격을 쉽게 올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분명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차이나타운 수입업자 및 도매상들을 대표하는 오리엔탈 푸드 협회는 무역대표부에 대체 불가능한 제품에 대한 관세 면제를 요청하는 서한을 준비 중이다.

이런 가운데 추진되는 브루스 리 동상은 "중국계 미국인의 유산이 재차 널리 공유되고 새롭게 탐구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페티 사무총장은 말했다. 중국계 미국인들은 이 밖에도 샌프란시스코 인접 도시 오클랜드의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중전철역(레이크 메리트) 이름을 '오클랜드 차이나타운'으로 바꾸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동상 건립 프로젝트를 이끄는 저스틴 후버
디렉터는 "이는 단지 미국 내 중국인뿐 아니라 모든 이민자를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이민자들의 유산은 보존될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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