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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의 노동]②'무늬만 프리' 방송작가 下
한빛노동센터 조사, 비자발적 퇴사가 83%
"일하는 게 프리한 게 아니라, 해고가 프리"
직장 내 갑질 만연··· "시녀인지, GPT인지"
정부가 근로자 인정해도 계약 종료하면 끝

편집자주

전문적이지 않은 직업이 있을까요? 평범하고도 특별한 우리 주변의 직장·일·노동. 그에 담긴 가치, 기쁨과 슬픔을 전합니다.
한국일보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프리랜서 방송작가.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게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의 현실이라 얼굴을 가린 채 인터뷰를 진행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29일 공개된
<상편> 최저임금 2.5배 오르는 동안, 임금 동결된 이 업계 "그래도 일은 사랑하니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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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저임금 2.5배 오르는 동안, 임금 동결된 이 업계 "그래도 일은 사랑하니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32710260004984)

한국일보는 지난 14일 10년 차, 20년 차 베테랑 방송작가 3명을 만났다. 방송작가의 99%는 프리랜서로 일하지만,
실제로는 일하는 양상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회사에 상주하며 업무 지시를 받는 근로자와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매일 뉴스 생방송을 진행하는 보도국 방송작가의 경우, 드라마·예능과 달리 방송 시간에 매여 하루 일과가 돌아간다. 2021년 고용노동부 감독 때 조사 대상인 방송작가 10명 중 4명꼴로 '근로자성'이 인정됐던 배경이다.

그러나 '무늬만 프리랜서'인 작가들은, 근로계약서가 아닌 프리랜서 용역계약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상시적인 해고 위험에 노출돼 살아간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지난해 11월 예능 작가 186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퇴사 사유 중 △개인사로 인한 자발적 퇴사는 14.7%에 그쳤고 나머지는 전부 △프로그램 제작 종료 48.3% △예상치 못한 편성 변경 14.7% △임금체불·직장 내 괴롭힘 등 11.2% △계약해지(해고) 통보 8.6% 같은 비자발적 퇴사였다.


일은 근로자처럼, 작별은 프리랜서답게?

김한별 전 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이 연출한 단편영화 '일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여성 비율이 94.6%, 방송계 대표적인 비정규직·프리랜서 직군인 방송작가들의 투쟁과 연대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자가 세 작가에게 '해고(계약 해지)' 경험을 묻자 한목소리로, 무얼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다 겪었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프리랜서가 괜히 프리랜서가 아니라 "해고가 프리(Free·자유)"라며 자학개그를 하는 그들이었다.

정수연(가명·이하 정)="
해고 경험이 있는지가 아니라 몇 번 당했나 세봐야 될 것 같아요.
한 번은 종편에서 즐겁게 잘 일하고 있는데, 월초에 PD가 불러 그달 말까지만 일하라고 통보하더라고요. 이유를 물어도 대답을 못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보도본부장이 자기 친한 작가를 그 방송에 넣고 싶었던 거예요. 다른 PD들이 '일 잘하는 작가인데 왜 그만둬야 하느냐'고 항의했더니,
본부장이 "내가 작가 하나 마음대로 못 잘라?" 하며 호통을 쳤다고 하더라고요.
이직할 때 평판 때문에, 혹시라도 '일 못하는 작가였다'라는 뒷말이 나올까 봐 저는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했죠, 그게 참 수치스러워요."

김은진(이하 김)="해고라는 단어가 의미 없을 정도로 너무 쉽게 잘려요. 프로그램 개편뿐 아니라 시청률이 잘 안 나온다, 어느 높은 분 마음에 뭔가 안 든다 하면 하루아침에 잘릴 수도 있는 거죠. 제작진은 아무 잘못 없어도, 출연자가 사고 쳐서 방송 자체가 없어지면 작가도 덩달아 잘리고요. 그러다 보니 항상 작가들은 위축돼 있어요. 일도 열심히 잘해야 하지만, 윗사람 심기 보전도 해야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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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10314580005935)

'프리랜서'라고 하면 "투잡 스리잡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도 받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억대 연봉도 번다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극소수 메인작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저임금에 장시간·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구조
라는 것이다.

김="청춘을 갈아가며 일하는 20대가 가장 많고, 업계에서는 30대 초중반 경력 7~8년 차를 제일 좋아하죠. 싼데 일은 잘하니까요. 30대 중후반 넘으면 힘든 것 같아요. 일자리는 없고 나이 많은 사람은 안 뽑아요."

정="프리랜서라고 해서 이직이 쉬운 게 아니에요. 항상 되게 슬펐던 게
일 시킬 때는 정직원처럼 시키면서, 헤어질 때만은 '프리랜서다움'을 강조하더라고요.
'너 프리랜서잖아. 다른 일도 하잖아. 다른 회사 가면 되지' 이러면서요. 작가들조차 초라해지기 싫어서 투잡, 스리잡 하는 걸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괜찮아, 나는 이거 없어도 다른 거 또 하면 돼'라면서요. 근데 사실 괜찮지 않거든요. 프리랜서여도 잘린 거고, 오늘 나는 또 한 번 부당해고를 당한 거예요."

정부, 프리랜서에 갑질 방지법 확대 검토

고(故) 오요안나 사건 이후, 정부와 정치권은 프리랜서 등 비정형 근로자에 대해서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지난달 7일 서울시내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관련 상담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뉴시스


프리랜서 작가들은 방송국의 '피라미드 하층'을 이루고 있다. 쉬운 해고가 가능하고, 평판은 쉽게 도는 좁디좁은 업계 바닥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정규직들은 갑질을 일삼는다. 물론 좋은 정규직도 있을 것이다. 그 지점이 문제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같은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순전히 같이 일하는 정규직 동료 개인의 '인성'에 일터의 평안이 달려 있는 것
이다.

정="일하다 보면 제가 시녀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들의, 앵커들의 시녀."

박현영(가명·이하 박)="보도국 사례를 들자면, 희한하게 정규직 기자한테는 헤드라인 한 줄 적어달라는 것도 굉장히 미안해하며 시키는데 작가들한테는 방송 직전에 나온 기사를 원고로 만들어달라는 무리한 요구도 당연한 일처럼 해요. 제가 어쩔 때는 그냥 챗 GPT 같아요, 요구하면 바로 뱉어내야 하는."

김="
정규직끼리는 감정 조절 굉장히 잘해요
. 괴롭힘 금지법이 있으니, 본인 기분 나쁘다고 해서 감정 쓰레기통처럼은 못 대하거든요. 반면 법 사각지대에 놓인 프리랜서들한테는 본인 감정 좋을 때는 '잘했다'고 했다가, 똑같이 일했는데도 본인 기분 나쁘면 '일 못한다'고 공개 면박을 주는 식인 거예요. 프리랜서한테는 '일 못한다' 딱지가 가장 큰 무기거든요, 언제든 잘릴 수 있으니까."

지난해 연말 MBC 프리랜서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씨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숨진 사건이 뒤늦게 알려지자, 정부는 프리랜서 등도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근로자 인정될까 봐, 식권도 책상도 안 줘

게티이미지뱅크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이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21년 고용부는 '지상파 방송3사' 방송작가의 근로자성 여부를 판단하는 대대적인 근로감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인 방송작가 363명 중 152명(41.9%)이 '근로자성이 인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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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이러니하게도 조사 후에 여건이 더 안 좋아졌어요. 너무 슬프죠. 정부 감독 후에는 방송사에서 '이제 프리랜서 많이 쓰지 말자' '오래 쓰면 안 되겠다'는 태도거든요. 직접 업무 지시를 하면 근로자성이 인정되니 작가들 보고 단체 메신저방에서 다 나가라고 하고, 방송 스튜디오 부조정실에도 못 들어가게 하고요. 무슨 불가촉천민처럼."

김="일자리도 줄었고, 그래도 전에는 작가들한테
업무용 책상과 컴퓨터는 줬는데 이제 안 줘요. 다른 제작진과 밥도 함께 먹고는 했는데, 이제 식권도 안 주고요.
작가들끼리 유배시키듯 너희끼리 일하라고 하죠. 최근에 들은 한 지상파 라디오는, 8시간 풀타임 회사에 나오는 대신 방송 몇 시간 전에 출근하라고 한대요. 근로자로 인정될까 봐 오전 재택근무를 시키는 건데, 실제 일하는 시간은 8시간이 넘는데도 출근만 늦게 하라고 꼼수를 부리는 거죠."

고용부 감독을 통해서
상당수 작가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처우 개선 대신 돌아온 것은 '계약 종료'(해고) 통보
였다. 통상 일을 하는 데 별 문제가 없으면 갱신 계약을 하는데, 근로자성이 인정되자 '정규직 처우 요구'를 우려해 예정된 날짜를 끝으로 고용 관계를 종료한 것이다. 김은진 작가도 2021년 12월 31일 MBC와 근로계약이 종료됐으나, 이후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사실이 인정돼 복직 후 '방송지원직 무기계약직'으로 재고용된 경우다.

김="제가 계약종료 될 당시 함께 일했던 다른 작가도 부당해고를 다퉜는데,
저는 MBC에서 2년 9개월 일하고 그 친구는 1년 11개월 일했다는 이유로 저만 복직됐어요.
둘 다 근로자성은 똑같이 인정됐는데도, 저는 2년(현행법상 2년 넘게 계약직 근무 시 자동으로 무기계약직 전환)을 넘겼기 때문에 무기계약직으로 되고 부당해고도 인정된 거죠. 반면에 다른 작가는 저랑 같이 일했는데도 2년에서 1개월이 모자란다는 이유 하나로 부당해고가 아닌 게 된 거고요.


이후
그 작가가 소송까지 갔는데, 패소하니까 MBC에서 최근 880만 원 소송비를 물라고 통지가 왔대요.
억울하게 계약해지를 당해서 대기업 상대로 소송까지 낸 거였는데, '어디 감히 프리랜서가 노동자성을 주장하느냐'며 입 틀어막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죠."


"작가들의 열정과 자부심 착취하지 말라"



김="저는 지금도 사회에 묻혀있는 이야기를 발굴해서, 파장을 일으키고,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는 방송을 만들 때면 돈 문제를 떠나서 뿌듯해요.
근데 방송계의 잘못된 관행들이 이런 작가들의 열정 페이, 자부심을 악용하는 거예요. 열정 없이 어느 누가 이렇게 낮은 임금 받고 장시간 일할까요.
작가들이 창작자이자 예술가지만, 노동자이기도 하잖아요. 근데 그 열정을 착취하는 업계에 화가 나요. 일은 노동자처럼 시키면서, 부당한 근로 조건에 대해 말하면 '작가님들은 창작자인데 무슨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는 태도니까요."


인터뷰를 마친 뒤 그들이 너무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그 일, 아는 누군가가 하겠다면 추천하겠느냐고 물었다. "도시락 싸서 따라다니며 말릴 것 같아요."(박) "저는 집에 돈 많으면 하라고 할 거예요."(김) "돈 많아도 건강 버리고 인성 버리는 데도 하라고 할 거야?"(정). 훗날 후배들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인터뷰를 나섰다는 세 작가의 용기가 언젠가 보답받을 수 있을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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