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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농사꾼 집 딸내미의 ‘들판의 추억’
|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mail protected]


내 고향은 폭넓은 하천을 끼고 부락이 조성됐다. 수량이 풍부한 저수지가 곳곳에 있고, 들녘마다 작게 물을 가둬 놓는 방죽이 있었다. 지형이 밭농사보다는 벼를 심는 게 더 적합했다. 더욱이 농산물 중 값이 정해진 품목은 벼가 유일했다. 또 논농사만큼 사람 손을 덜 가게 하는 작물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작업이 기계화되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만 하더라도 논농사 역시 사람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

3월 개학을 해 학교에 가다 보면 집집마다 마당에 커다란 고무통을 내놓고 볍씨를 담가 놓는 광경이 흔했다. 빨간 소독약을 푼 물에서는 고약한 약 냄새가 났다. 엄마는 산비탈 밭에 문짝만 한 체를 비스듬히 세워 놓고 삽으로 흙을 퍼 체로 곱게 걸렀다. 모판에 담을 흙이었다. 모판은 직사각형의 납작한 플라스틱 판때기로 바닥에 촘촘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모판에 흙을 깔고 싹튼 볍씨를 뿌려 키우는데 이걸 육묘종이라 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외바퀴 수레로 엄마가 온종일 쳐 놓은 고운 황토를 퍼담아 우리 논으로 옮겼다. 일을 돕고 집에 들어와 코를 풀면 먼지와 살충제 섞인 검고 파란 덩어리가 묻어났다. 황토에는 살충제를 뿌려 섞어 놓아야 모가 병해충에 탈이 나지 않았다.

엄마 혼자서 농사지었기에 쉴 틈 없었던 어릴 적 나의 봄

모심은 뒤엔 기계 안 닿은 땅 모깁기로 땜질

허리 펴보면 꽃의 계절은 이미 저만치 지나간 뒤였다


논에는 못자리가 들어갈 만큼만 미리 로터리를 쳐 놓고 땅을 평평히 골라 놓는다. 모판에는 황토를 미리 담아 쌓아 놓고 비닐로 황토가 마르지 않게 덮어 놓는다. 볍씨가 어느 정도 싹을 틔우면 날을 잡는데 품앗이할 이들과 상의해 스케줄을 짠다. 못자리 날은 일손이 여럿 필요하다. 둘씩 짝을 지어 모판에 파종을 하고 황토를 얇게 덮는다. 볍씨가 마르지 않게 일은 신속해야 한다. 선 작업을 기다렸던 두 사람이 모판을 부직포가 깔린 논으로 옮기고 줄 맞춰 자리를 잡아 놓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모판 위에 얼기설기 활을 세워 소형 비닐하우스를 짓는다. 마지막으로 모판이 충분히 젖어 들도록 논에 물을 대면 못자리는 끝이 난다. 오전에 못자리 스케줄을 잡은 가구는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새참은 우유와 보름달빵, 막걸리 댓 병으로 준비하고 식사는 읍내 중국집에 미리 맞춰 놓는다. 그러면 짜장면집 사장이 들에까지 배달을 와 준다. 일꾼들이 식사하는 동안 그는 모자란 일손을 돕다가 빈 그릇을 챙겨 돌아간다. 그리고 오후 품앗이 간 다른 논에서 다시 얼굴을 본다. 저녁 식사를 가져온 그는 슬쩍 막걸리 한 모금을 얻어먹고 오토바이에 빈 그릇을 싣고 돌아간다.

모는 40일 정도 키워 논에 이식한다. 농사꾼들의 봄은 쉴 틈이 없다. 들에는 집채만 한 농기계들이 드나들며 땅을 뒤집고 흙을 곱게 갈아 놓는다. 농부들은 기계 뒤를 따라다니며 복합 비료를 뿌리거나 물이 빠질 수로를 손본다. 땅이 곱게 다져지면 논에 물을 대고 물이 새지 않는지 논둑을 확인한다. 물이 가득 찬 논에는 피가 자라지 않게 농약을 한 번 친다. 지금 농약을 쳐 놔야 모를 이식한 후에 피서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의 일도 고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보다 더 힘이 든 농사는 밭농사다. 어디선가 농사는 자연이 짓는 것이라고 하던데 농사는 농부가 짓는 것이지 제멋대로인 자연이 돕는 일은 거의 없다. 되려 심술을 부려 일 년 농사를 망쳐 놓는 일이 허다하다.

밭농사의 기본은 고랑을 파고 둑을 쌓아 비닐을 씌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온종일 삽질을 하다 보면 어깨고 허리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다. 농사꾼 집 자식들은 학교가 끝나면 부모가 일하는 들로 뛰어갔다. 어린 애들이 돕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새참을 내다 드리거나 비닐을 씌울 때 바람에 날리지 않게 붙잡는 등 잔심부름에 동원되는 것이다.

엄마 혼자 농사를 짓는 우리 집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삽질이라면 이골이 났다. 주말 내내 밭에 고랑을 파고 비닐을 씌워 놓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4월이 되어 있었다. 식목일은 고추 모종을 심는 날이었다. 엄마가 비닐에 구멍을 뚫어 놓으면 내가 포트에서 고추 모종을 뽑아 구멍에 던져 넣는다. 엄마가 외바퀴 수레로 물 담긴 양동이를 실어 오면 내가 조리개에 퍼담아 모종 뿌리에 물을 준다. 그러면 엄마가 호미로 고랑에 흙을 퍼서 구멍을 덮어 뿌리를 묻어 준다. 반나절 일을 돕다 보면 어깨는 떨어져 나갈 듯 아프고 인내심은 바닥이 난다. 엄마는 “고만 들어가 숙제하라”고 나를 놓아준다. 나는 부리나케 도망가 자전거를 타고 건넛마을로 놀러 간다. 친구 집에는 텔레비전과 연결해 게임을 할 수 있는 오락기가 있었다. 오락기는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재밌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홀로 일하고 있을 엄마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결국 두 시간 정도 놀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밭으로 향했다.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밭일이 끝나기도 전에 모 심는 날이 정해졌다. 모는 기계가 심지만 논에 모판을 나르고 모판 밑으로 늘어진 잔뿌리를 제거하는 작업은 일일이 사람이 해야 했다. 그래야만 모판에서 모가 쉽게 떨어졌다. 엄마는 항상 모 심는 날을 주말로 정했다. 그땐 그게 항상 불만이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어린 고사리손이나마 빌려야 했던 그 처지가 이해되었다. 기계쟁이 아저씨는 꼭두새벽부터 이앙기를 몰고 왔다. 그는 마지기당 품삯을 쳐서 받았는데, 농사꾼들은 기계 품삯을 쳐줄 때는 슬쩍 한 마지기를 줄였고 땅을 팔 때는 슬쩍 반 마지기를 늘려 팔아먹는 수법을 썼다.

모 심는 날 나와 엄마는 눈곱도 떼지 않고 들로 나갔다. 모판을 옮기고 기계쟁이 아저씨가 이앙기에 모를 싣기 좋도록 모와 모판을 분리해 논둑 군데군데 쌓아 놓았다. 열 시쯤 되면 엄마가 1차 새참을 내왔다. 기계쟁이 아저씨는 이앙기의 연료를 채우고 논둑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정오도 되지 않아 아저씨 코는 새빨개졌다. 농번기든 농한기든 아저씨 코는 늘 오전부터 새빨갰다. 그런 모습으로 천연덕스럽게 농기계들을 운전하고 다녔다. 작은 사고 한 번 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또 그는 기가 막히게 논의 구조를 잘 알았다. 어떤 방향으로 모를 심을지, 어디쯤 땅이 물러 기계가 빠질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하루 일당이 아니라 일한 만큼 돈을 받는 아저씨의 계산법상 일이 지체되는 것은 큰 손해였다. 아저씨는 땅이 무른 곳은 기계를 들이지 않았다. 그가 빼놓고 모를 심지 않은 땅은 사람이 직접 들어가 모를 심어야 했다.

땅 주인들은 그가 빼놓은 빈터를 보면서 속으로는 탐탁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이해하는 척 점잔을 떨었다. 대신 모심은 값을 쳐줄 때 땅 크기를 줄여 값을 깎는 것으로 응수했다. 논에 모 이식이 끝나면 농사꾼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꽃놀이를 떠나는 쪽과 모깁기하는 사람. 우리 집은 모깁기를 하는 쪽이었다. 모깁기는 기계가 빼놓은 땅에 모를 사람이 직접 이식하는 것을 말한다. 나와 엄마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노란 장화를 신고 푹푹 빠지는 논을 걸어 다니며 모깁기를 했다. 뻘밭은 내 몸을 삼킬 것같이 다리를 잡아당겼다. 한참을 엎드려 모를 이식하다 딱딱하게 굳은 허리를 폈다. 어느새 서산 너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노을에 물든 야산을 물끄러미 훑어봤다. 산은 진달래가 피어서 불붙은 듯 새빨갰다. 그 진달래 군락지 한가운데 흰 나무 한 그루가 삐죽이 솟아 있었다. 왕벚꽃 나무였다. 봄바람에 만개한 벚꽃이 눈송이처럼 진달래꽃밭 위에 날리듯 쏟아졌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 어떤 명화도 그때 그 광경을 넘어설 순 없으리라.

모깁기를 마지막으로 벼농사 준비가 끝이 나고 우리의 봄날도 그렇게 저물어 갔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펴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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