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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 진화에도 농·어촌 할퀸 상처 그대로
송이·대게 등 특산물 생산 차질 "앞날 캄캄"
농기구 소실... "밭을 손으로 갈 수도 없고"
28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2리 마을회관 앞에 소나무, 건물 지붕 등 화재 잔재가 남아있다. 그 뒤로 불에 그을린 축사가 보인다. 영덕=최현빈 기자


"저래 가지고 이래까지(저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송이 산(山)이거든요. 그랑(개울)부터 위에까지 다 타버렸어. 우리는 가을이 되믄 한 달은 송이 캐면서만 지냈는데···."


28일 오전 9시쯤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2리에서 만난 이종훈(61)씨가 마을 길 양옆으로 펼쳐진 산들을 가리키며 한숨을 쉬었다. 송이를 키우려고 사 놓은 약 3만3,000㎡(1만 평) 크기 산자락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밭에서 수확한 사과를 저장해두던 그의 창고는 비닐처럼 구겨졌고, 작물을 싣던 소형 운반차는 바퀴가 모두 터진 채 창고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씨는 "솔직히 막막하다"면서도 녹아버린 농업용 호스를 교체하러 갔다. "어쨌든 농사는 지어야지. 안 지을 수는 없잖아요."

28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2리 주민 이종훈씨의 창고가 화재로 무너져 있다. 영덕=최현빈 기자


의성에서 시작돼 경북 북동부 지역 5개 시·군을 휩쓴 대형 산불의 주불이 엿새 만에 진화됐다. 큰 불길은 잡혔지만 '농심(農心)'은 시커먼 잿더미 속이다. 집은 물론 농기구와 창고, 과수원 등을 몽땅 잃었기 때문이다. 지역 특산물도 예외가 아니다. 바닷가가 인접한 영덕까지 직격탄을 맞은 탓에 어민들도 "앞날이 컴컴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영덕군은 13년째 송이 생산량 전국 1위를 지키고 있는 '송이의 성지'다. 전국 송이 가운데 21%(2023년 기준)가 이곳에서 난다. 영덕 송이의 대부분은 지품면의 국사봉(지품면 산의 봉우리 이름) 근처 산에서 채취된다. 송이가 자라는 소나무가 많은 데다 서늘한 산간 지역이라 온도도 적당하다.

28일 소나무들이 화재에 소실되는 바람에 민둥산이 돼 버린 경북 영덕군 지품면 삼화2리의 한 산. 영덕=최현빈 기자


20여가구가 자리잡은 지품면 삼화2리 주민들에게도 송이는 소중한 존재였다. 가을마다 삼삼오오 송이를 따러 다녔고, 이를 팔아 살림에 보탰다. 하지만 마을을 덮친 불길 탓에 이제는 헐벗은 민둥산만 남았다. 당분간 송이 생산은 어렵다. 송이는 30~40년 묵은 소나무가 송이균에 감염된 뒤 토양 상태와 온도가 적당해야 자라는데 소나무가 죽으면 균도 함께 사라진다. "30년은 넘어가야 돼.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인제 (송이를) 구경도 못하제. 30년이면 다 죽지 그거 살아내나." 삼화리 주민 권수봉(81)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된 농기구 하나 없이 언제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라 농민들 속은 더욱 타들어간다. 안동 길안면 주민 신정자(76)씨는 "이미 탄 집은 어쩔 수 없더라도 논밭은 갈아 씨앗은 뿌려야 될 거 아니냐"며 "농기계는 죄다 타고 밭을 손으로 갈 수도 없어서 막막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28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의 한 대게집에서 대게가 수족관과 함께 불에 타 그대로 놓여 있다. 영덕=김정혜 기자


영덕 특산물인 대게를 판매하는 어촌 주민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수족관의 냉매가스 등이 불을 만나 폭발하면서, 그 안의 생선은 물론 가게가 통째로 탄 곳이 비일비재했다. 영덕 축산면 경정리에서 만난 대게집 사장 김영출(60)씨는 "(화재 당일인 25일) 이끼 많은 방파제 틈에 웅크려 불을 피했다"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게는 이미 불타고 있는데 정말 무섭고 눈물이 났다"고 몸서리쳤다. 박현자(48)씨는 "어부인 남편이 평생 대게를 팔아 번 돈으로 3년 전 건물을 지었지만 다 타버렸다"며 "5월 말까지 대게 최대 성어기(물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기)인데 빨리 복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렸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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