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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관통한 안동 길안면 대곡리 가보니]
6개 마을 50여 가구 전소 "한 마을은 전멸"
"지금 산불 어디로 갔나" 재난문자 못 받아
농기계, 과수원 모두 타… "긴급 지원 간절"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대곡1리의 한 주택이 전소돼 무너져 있다. 안동=강지수 기자


경북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국도 35호선)를 따라 차로 30분을 내려오고도 20분을 더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야 나오는 곳. 27일 낮 12시
안동 길안면 대곡리
초입에 다다르자 휴대폰의 모든 기능이 먹통이 됐다. 며칠째 쉴 새 없이 울리던 '산불' 재난안전문자도 뚝 끊겼다. 대곡1리(하지골·한실·보초마을)와 대곡2리(가라골·모티·검단마을)엔 모두 6개 마을이 있다. 이틀 전 '괴물 산불'이 마을을 덮쳐 산꼭대기에 있는 검단마을은 10가구가 모두 불에 탔다. 나머지 5개 마을엔 미처 대피하지 못했거나 몸을 피했다가 돌아온 10여 명의 주민이 화마에서 살아남은 집을 대피소 삼아 옹기종기 모여 지내고 있다.
이틀째 통신이 끊긴 탓에 주민들은
50시간 넘게 세상과 단절돼 있다.


"우예 살아있었나… 니 죽은 줄 알았다"



길안면은 왼쪽으론 의성, 오른쪽으론 청송과 접한다.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25일 안동으로 옮겨붙었는데, 그때 길안면이 가장 먼저 피해를 봤다. 묵계서원과 만휴정 등 문화재는 지켰지만, 마을은 잿더미가 됐다. 주민들은 "재난 알림 문자가 온 건 화마가 모두 훑고 간 뒤였다"고 입을 모았다.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대곡1리에서 주민 서복래씨가 전소된 집을 바라보고 있다. 안동=강지수 기자


가장 큰 문제는 통신이다. 대곡1리 하지골마을 주민 김상규(63)씨 부부는 "전화를 한번 하려면 고개를 넘어 차로 15분 가야 한다"며 "어제 처음 나가서 주변에 안부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이날 김씨의 아내를 찾아온 이웃마을 주민은
"우예 살아있었나! 나는 니가 '여기 완전 끝났다'고 전화하고 연락 끊기니 어떻게 된 줄 알고..."
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살아있으면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모여 앉은 이들은
"기자님, 지금 산불 어디로 갔나예"라고 연신 물으며 "산불 뉴스도 도대체가 TV가 나와야 보지, 우린 아무것도 모른다"
라며 혀를 찼다.

전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대는 마을이라 수도도 덩달아 끊겼다. 한 마을 주민은 "가끔 대피소 내려갔다 오면 면사무소에서 '전기 돌아왔지예?'라고 한다. 전기가 돌아왔는 줄로 안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여긴 전멸, 저데는 마을회관도 타부렀다카이"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대곡1리 이장 손현원씨가 자가용을 타고 마을 산불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는 "여기는 전멸이야"라며 "저데 마을은 회관까지 타부렀다카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안동=강지수 기자


대곡 1, 2리는 50여 가구의 95%가 불에 탔다. 이장네 두 집도 화마가 삼켰다. 대곡2리 이장인 김정동(78)씨와 부녀회장인 신정자(76)씨 부부는 피해가 가장 컸던 검단마을에 살았다. 부부는 주민들 대피를 모두 돕고 나서 빠져나왔다. 마을이 전소된 탓에 지금은 길안중학교 대피소에서 지낸다. 신씨는 "중간에 아저씨(남편)가 안 보였는데 옆집 할매 데리고 오더라"라며 "얼굴이 시커메가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지만 죽은 사람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다"고 했다. 대곡1리 이장 손현원(67)씨도 집을 잃었다. 그는 "갈아입을 옷까지 다 타서, 옷을 사 입고 마을로 돌아왔다"며 "오전엔 마을을 돌고 밤엔 아는 동생 집에서 신세를 진다"고 토로했다.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길안중학교 체육관에 산불 피해 이재민을 위한 대피소가 마련돼 있다. 안동=허유정 기자


인명 피해가 없었던 건 천만다행이다. 산골마을 주민들은 서로 의지해 목숨을 건졌다. 25일 오후 3시 30분쯤 안동에서 가장 먼저 산불을 마주한 대곡1리 주민들은 곧장 차를 나눠 탔다. 김상규씨 부부는 이웃집 부부와 함께 동네 어르신들을 실어 날랐다. 김씨는 "여기 다리 밑 개울가에 노약자들을 모아 두고 입에 계속 물을 묻히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환경부가 낙동강 수질 관리를 한다며 마을을 둘러싼 땅에 나무를 심었는데 되레 화를 키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빽빽한 수목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대곡1리 한 주택 앞에서 노부부가 잿더미를 정리하고 있다. 안동=강지수 기자


긴급대피했던 고령층 주민 일부는 마을에 돌아왔다. 대곡1리 보초마을에서 72년을 살았던 서복래(89) 할머니는 "아들 집은 아파트라서 답답하고 대피소도 답답하다"며 "여기가 우리 집인데..."라고 되뇌었다. 할머니는 이날 전기도 수도도 끊긴 집 바로 옆 마을회관에서 홀로 밤을 보냈다. 80대 노부부가 다 타고 뼈대만 남은 집 앞 잿더미를 연신 빗질하며 정리하는 모습도 보였다.

"농기계 긴급 지원해달라"

27일 경북 안동 길안면 대곡2리 마을 주택이 산불에 전소된 채 무너져 있다. 안동=강지수 기자


대곡1리 보초마을로 2년 전 귀농한 황창희(58)씨는 집과 차량 두 대, 집 뒤편 사과밭이 모두 불에 탔다. 그는 "2,600만 원짜리 농약 살포 기계는 이달 14일에 샀는데 시동도 못 걸어봤다"고 말을 흐렸다. 이어
"다른 건 안 바라요, 농사짓게 해달라고만 하는 겁니다"
라며 "꽃 피면 약을 뿌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하소연했다. 옆에 있던 주민 손정대씨도 "연장만 주면 나머지는 농사꾼들이 알아서 한니더"라고 거들었다. 두 사람은 의용소방대원으로 집을 비운 사이 화마가 덮쳤다. 화선이 뻗친 곳과 마을 사이로 흐르는 내천이 방어선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황씨는 불에 타지 않은 손씨 집에서 숙식한다.

"여기 소식은 (바깥에서) 전혀 모르잖아. '여 마을도 사람 있심니더'라고 꼭 알려주이소."
황씨와 손씨는 마을을 떠나려는 기자에게 두 손을 꼭 잡고 신신당부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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