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된 영덕읍 매정리 가보니]
주민들 "손쓸 새도 없이 불이 번져"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집은 잿더미
주민들 "손쓸 새도 없이 불이 번져"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집은 잿더미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집들이 전소돼 있다. 영덕=최현빈 기자
"목사님이 그때 연락을 안 해주셨더라면···."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만난 김형원(88)씨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날 김씨는 오후 6시쯤 뉴스를 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 약 80㎞ 떨어진 안동에서 화재가 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약 30분쯤 잤을까. 교회 목사의 다급한 전화에 깼다. "장로님, 빨리 피난 가소."
읍내로 나가는 유일한 밭길은 시뻘건 불에 막혀 있었다. 근처에서 도움을 청하는 이웃 주민을 차에 태운 김씨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차 옆으로 위로 그냥 불이 막 붙어가지고 콱콱 문짝에 막 갖다 때리는데. 그래도 우얍니꺼. '서면 죽는 거구나' 하고 막 달렸죠. 아이고, 본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예."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가 30년 넘게 살았던 집은 잿더미가 됐다.
화마 할퀸 마을... 간밤 흔적 가득
26일 잿더미가 된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마을. 한 집 앞에 반려견이 묶여 있다. 영덕=최현빈 기자
김씨가 사는 영덕읍 매정리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매정리 인근 사망자 5명 포함 영덕 일대에서만 이날 오후 4시 기준 8명이 숨졌다. 매정리에 살던 노부부는 대피 도중 변을 당했고, 근처 실버타운 입소자 3명은 산불이 옮겨붙은 대피 차량이 폭발하며 명을 달리했다. 실제 이날 오후 4시쯤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7㎞ 떨어진 매정리를 가보니 화마가 휩쓸고 간 마을은 입구부터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잔불이 꺼지지 않아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올랐고 화염이 휩쓸고 간 집들은 기와로 만든 지붕이나 뼈대만 남겨둔 채 전소됐다. 불길을 피해 급히 대피했다가 돌아온 주민들은 모두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새까맣게 탄 집 안에 작게 남아 있는 불을 직접 꺼트리던 윤용철(72)씨는 "어제 대구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와 보니 이렇게 돼 있었다"면서 "살면서 이 정도로 심한 화재를 겪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토로했다.
26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의 주택이 화재로 붕괴됐다. 안동=강지수 기자
강풍 탓에 불이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주민 남경구(67)씨는 "바람이 태풍같이 불었다. 10분 만에 불길이 동네를 덮쳤다"고 몸을 떨었다. 그는 "이장님이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방송하려 했는데 그때 딱 마을이 정전됐다"면서 "집집마다 일일이 문을 두드려 데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윤명수(80)씨도 오른손에 든 지팡이로 이곳저곳을 가리켜가며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산에서 불덩이가 막 날아드는데, (불길에 빠르게 휩싸여) 이리 가도 몬하고 저리 가도 몬하고."
영덕뿐 아니라 안동에서도 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에서는 홀로 살던 70대 노인이 매몰돼 숨졌다. 3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인데 9개 집이 완전히 붕괴됐다.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는 이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피난해 적막하기만 했다. 신덕리 주민 금우섭(70)씨는 "(돌아가신) 옆집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보행기를 끌고 다니신다"면서 "(불을) 못 피했다가 화를 당하신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금씨와 함께 있던 다른 주민은 "(단수·단전이) 몇 년 동안 이어질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