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영덕 임시대피소 가보니]
구조 기다릴 새도 없이 목숨 건 '탈출'
이재민 수백 명 가득 찬 대피소 열악
"오늘 밤 또 올라"... 화마 공포 여전
구조 기다릴 새도 없이 목숨 건 '탈출'
이재민 수백 명 가득 찬 대피소 열악
"오늘 밤 또 올라"... 화마 공포 여전
26일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영양군민회관에 전날 산불을 피해 모인 이재민들이 머물고 있다. 영양=문지수 기자
“연기로 눈앞이 새카만데 산은 봉화 올리듯 타오르고…집이고 밭이고 다 버리고 왔지. 종말이 온 줄 알았어.”
26일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임시대피소 영양군민회관에서 만난 신정한(61)씨는 전날 화마가 집을 집어삼키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석보면 화매리에 있는 신씨 집은 매캐한 산불 연기로 인해 오후 5시인데도 한밤처럼 깜깜했다. 휴대폰 라이트에 의존해 겨우 운전대를 잡은 신씨는 아내, 이웃까지 6명을 싣고 차로 약 25분 거리의 임시대피소로 왔다.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차 양옆으로 떨어져 운전 내내 두 손이 후들댔다. 폭격 같은 산불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그는 밭과 집 등 수십 년을 보낸 터전을 한순간에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구조 기다릴 새 없이...목숨 건 탈출
26일 경북 영양군 영양군민회관에 산불을 피해 모인 아이들이 임시로 마련된 텐트 앞에 누워 있다. 영양=문지수 기자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이 강풍을 타고 안동·영양·청송·영덕까지 순식간에 번지며 산자락에 사는 주민들의 급박한 탈출이 이어졌다. 이들은 통신이 끊긴 상황에서 구조를 기다릴 새 없이 이웃끼리 한 차를 타고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고 간밤을 회상했다.
이날 오후 찾은 임시대피소는 500여 명의 이재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 다인용 천막과 은색 돗자리를 깔고 누운 주민들은 "타죽는 줄 알았다" "전 재산이 불탔는데 어찌 사냐"며 울먹였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포산리에서 대피한 이순자(82)씨는 "거센 바람에 지붕이 날아다니고 사방이 불타서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이웃 덕에 살았다"며 "급히 오느라 아들 혈압약도 못 들고 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곳곳이 그을린 데다 연기를 마셔 눈물샘이 부어오른 반려견을 품에 꼭 안은 김모(67)씨도 "개 목줄을 끊어내는 동안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며 "그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집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국민체육센터에 마련된 산불 임시대피소에 이재민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나연 기자
이날 오후 4시 기준 가장 많은 사망자(8명)가 나온 영덕군의 임시대피소 영덕국민체육센터 역시 이재민들로 포화 상태였다. 영덕에선 기지국이 불에 타 주민들은 전날 대피 당시 통신 두절까지 겪었다. 아내와 함께 가까스로 몸을 피한 김용철(80)씨는 "노인들 사는 동네에 (불씨가) 폭탄처럼 집 안으로 들어와 불이 붙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휴대폰이 먹통이 돼 전화도 지도도 못 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지품면에서 남편과 함께 과수원을 하는 장소희(50)씨는 "밭에서 일하다 불길을 보고 바로 차로 달려갔는데 5분도 안돼서 (밭이) 활활 타고 있었다"며 "나무도 농기계도 다 타버려 이제 살아갈 길이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화마 공포는 현재 진행형
26일 경북 영양군 영양군민회관에 설치된 공기청정기에 '매우 나쁨'을 의미하는 빨간불이 떠 있다. 영양=이유진 기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임시대피소 상황은 열악하기만 하다. 영양군민회관 내부엔 연기가 자욱했고 곳곳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1층 구석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공기청정기에는 오후 내내 빨간불(위험·공기가 매우 나쁘다는 뜻)이 들어왔다.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만난 30대 주민도 "이재민 대부분이 지병이 있는 어르신인데, 대피 중 연기를 흡입하고 놀라셨을 노인분들을 며칠간 돗자리에 방치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화재가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도 여전하다. 이날 오후 4시 30분쯤 영양군 임압면 주민의 대피를 촉구하는 재난문자가 오자 영양군민회관 이곳저곳에서 불안에 찬 웅성거림이 들렸다. 간신히 눈을 붙였다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초등학생 자녀 셋과 함께 이곳으로 대피한 김수예(50)씨는
"(어젯밤) 정전이 됐는데 촛불만 봐도 심장이 벌렁대서 그냥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껴안고 버텼다"며 "밤에도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 불길이 다시 올까 봐 걱정"
이라고 토로했다.